소 요시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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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토시(宗義智)
제1대 쓰시마후추 번
1588년 ~ 1615년
무사 정보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도 시대
출생 에이로쿠 11년(1568년)
사망 게이초 20년 1월 3일(1615년 1월 31일)
별명 초명 : 아키카게
별명 : 히코시치(통칭), 하시바 요시토시
세례명 : 다리오
계명 崇虎石翁万松院
쓰시마 후추 번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
관위 종사위하 시종, 쓰시마노카미
씨족 소 씨(宗氏)
부모 아버지 : 소 마사모리
어머니 : 다테이시 다카히로의 딸·류안인
형제자매 소 시게나오
소 요시즈미
소 시게쿠니
소 요시토시
배우자 정실 : 마리아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 이혼)
계실 : 이토쿠인 (가와무라 씨 또는 아비루 씨)
측실 : 요후쿠인 (다테이시 모리하루의 딸)
자녀 소 요시나리
딸 (스기무라 도모쓰구의 아내)
딸 (야나가와 시게오키의 아내)
딸 (소 나리치카의 아내)
딸 (후루카와 시게노리의 아내)
딸 (우치노 스케나리의 아내)
묘소 쓰시마 시 이즈하라 정 반쇼인

소 요시토시(틀:Ja-y1568년 ~ 1615년 1월 31일)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 겸 다이묘이다. 소(宗) 가문의 20대 당주이며 쓰시마 후추 번의 초대 번주이기도 하다.

생애

가독상속

에이로쿠 11년(1568년) 소 마사모리(宗将盛)의 4남[1]으로서 태어난다. 제17대 당주 소 요시시게(宗義調)가 은거하면서 소 마사모리의 장자 소 시게나오(宗茂尚)를 양자로 맞아 가독을 양도하였다. 하지만, 소 시게나오는 일찍 죽었고, 이를 대신하여 차남 소 요시즈미(宗義純)를 양자로 맞이해 가독을 양도 했지만, 소 요시즈미도 마저 일찍 죽어 덴쇼 7년(1579년) 음력 1월 4남 소 요시토시를 양자로 맞아 가독을 양도하였다. 이렇게 하여 소 요시토시는 소 가문 제19대 당주가 되었다.[2]

덴쇼 15년(1587년) 음력 5월 정계에서 물러나 있던 양부 소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했기 때문에 소 요시토시는 가독을 소 요시시게에게 당주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는 동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규슈 정벌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 요시토시는 소 요시시게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신종하였고, 쓰시마의 영지를 인정받았다.

이 무렵,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조선을 복속시키라는 명령을 받아 소 요시시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시마이 소시쓰(島井宗室)등은 조선과의 교섭에 힘썼다. 덴쇼 16년(1588년)에 소 요시시게가 사망 등의 악조건도 있어 교섭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더불어 소 요시토시는 소 요시시게의 뒤를 이어 소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덴쇼 18년(1590년) 조선에서 일본을 방문한 사절단인 조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 수행무관 황진(黃進)을 복속사로 사칭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알현시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이 복속한 것이라고 받아들여 조선에 명나라 정복사업의 선도역을 맡을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이 조선 사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각과 달리, 전국 통일에 대한 축하사절이었고, 이는 소 요시토시가 조선에 축하사절을 보내도록 거짓 요청을 했기 때문에 내방한 사절이었다. 조선은 건국 이래 명나라의 책봉국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나라 정복사업의 선도역을 승낙할리 없었다. 궁지에 몰린 소 요시토시는 명나라 정복의 선도역 명령을 조선에게 전해야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 대신 조선이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3]는 거짓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실현되지는 않았다.

임진왜란

조선과의 교섭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였고, 덴쇼 20년(1592년)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대에 속해 일본군의 최선봉으로서 싸웠다.

제 1군의 편성
장수 이름 병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7,000명
소 요시토시(宗義智) 5,000명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鎮信) 3,000명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2,000명
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 1,000명
고토 스미하루(五島純玄) 700명
총계 18,700명

덴쇼 20년(1592년) 음력 4월 12일 소 요시토시는 5,000명의 군세를 이끌고 쓰시마 섬 북단의 오우라(大浦)를 출항해 부산에 상륙하였다. 13일에 총공격을 시작으로, 14일에 동래, 15일에 기장, 좌수영, 16일에 양산, 17일에 밀양, 그 후에 대구, 인동, 선산을 차례차례로 공략하고, 26일에 경상도순변사 이일(李鎰)을 상주에서 격파하였으며, 27일에 경상도를 넘어 충청도로 진군, 탄금대에서 요격 나온 신립(申砬)의 조선군을 괴멸시켜 충주를 공략하였다. 또, 경기도로 나아가 음력 5월 1일에 여주 공략 후, 2일에 용진을 거쳐 한성 흥인지문 앞에 도착한 후, 3일에는 수도 한성에 입성하였다.

그 후, 여러 장수들과 한성회의를 한 후, 음력 5월 11일에 소 요시토시는 한층 더 북쪽을 향해 진격해, 18일에 임진강에서 김명원(金命元)등의 조선군을 격파하였고, 27일에 개성 공략, 황해도의 서흥, 평산, 황주, 중화를 차례차례로 공략하여 평안도로 나아갔다. 또, 음력 6월 8일에 대동강의 근처까지 도달하였으며, 16일에는 평양을 공략하였다.

음력 7월 16일, 명의 요동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평양을 공격해 왔지만 격퇴했다. 이때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패주하는 명군을 추격 해, 명군장수 사유(史儒), 천총(千総) 장국충(張國忠), 마세륭(馬世隆)등을 죽였다. 29일, 이원익(李元翼)의 조선군이 평양을 공략하지만, 이도 격퇴하였다.

분로쿠 2년(1593년) 음력 1월 7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약 4만의 명군과 김명원의 1만명의 조선군을 가세해 평양을 공격하였다. 명군이 평양성의 성문을 돌파하자 일본군은 북부 구릉지역의 진지로 퇴각하였다. 이에 이여송은 "퇴로를 주겠으니 성을 양도하라"라고 통보하였고, 일본군은 이것을 수락하고 남쪽을 향해 철퇴를 개시하지만, 조명연합군의 추격도 있어 어려운 퇴피행이 되었다. 한성을 목표로 해 진격하는 명군에 대해, 일본군은 여러 방면의 각 군을 한성에 결집한 후, 조명연합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 전투가 벽제관 전투였다. 명군에서는 이 패전으로 위축되었고, 일본군도 병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강화교섭을 한 후, 부산 주변까지 철퇴했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명측의 강화 담당자·심유경(沈惟敬)과 평화교섭을 하였지만, 쌍방은 서로 요구하는 조건과는 달라, 국서의 내용을 쌍방의 형편에 맞게 개찬하는 등 평화교섭 성사를 위해 노력했지만, 명나라측 강화 담당자인 심유경의 부족한 됨됨이와 이런 기만행위를 동반한 교섭은 아무 성과 없이, 각국에 혼란만 야기시켰고, 교섭은 결렬되었다.

게이초 2년(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소 요시토시는 좌군에 속해 참진하였다. 우선 서쪽으로 진격해, 음력 8월 13일 남원성 공략을 개시하였고, 4일째에 성을 함락했다. 다음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를 점령하고. 전라도를 제압했다. 그 후, 겨울을 앞에 두고 후퇴한후 남해왜성에 머물렀다. 게이초 3년(1598년) 음력 8월 18일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에 파견된 일본군에게 음력 10월 15일부로의 귀국명령이 하달되었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창선도에서 만나 함께 귀국할 예정이었지만, 이때 순천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마쓰라, 아리마, 오무라, 고토 5제장은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璘)의 조명연합수군에 퇴각로가 저지되어 순천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것을 본 소 요시토시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다카하시 무네마스(高橋統増), 데라자와 마사시게(寺沢正成) 등과 함께 순천에 갇힌 일본군을 구원하러 출진하였고, 노량해협에서 매복하고 있던 조명수군과 교전하였다. 이 전투가 노량해전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등 5명의 왜장은 이 틈을 이용해 탈출에 성공하였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부산을 거쳐 귀국하였다. 이로써 7년 동안의 전쟁은 끝이 났다.

세키가하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서군에 속해 후시미 성 공격에 참진하였고, 오쓰 성 공략과 세키가하라 전투는 가신을 대신 출진시켰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이 승리하였고, 서군의 다이묘 대부분은 영지가 몰수 되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특히 서군 소속 다이묘들 중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형에 조리돌림까지 추가되어 가장 혹독한 형벌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그가 소 요시토시의 장인어른이었다. 하지만 다행이도 소 요시토시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평소 임진왜란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던 소 요시토시 자신의 행동과 악화된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원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죄가 사면되어 영지가 보전되었고, 쓰시마 후추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이 시기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4]했다.

말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임진왜란으로 악화된 조선과의 관계를 수복하라는 명령을 받은 요시토시는, 게이초 14년(1609년)에 조선과의 기유약조를 맺어 국교를 회복하였다. 이 공적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인정받아 소 가문은 막부로부터 독립한 기관으로 조선과의 독점적 무역권리를 인정받았다. 게이초 20년(1615년) 음력 1월 3일 향년 48세의 나이로 죽었다. 후계는 장남 소 요시나리(宗義成)가 이었다.

인물

  • 소 요시토시의 초명인 아키카게(昭景)는 무로마치 막부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로부터 아키(昭)라는 한자를 받은 것이다.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부터 히데요시의 예전 성이었던 하시바(羽柴)라는 성과 이름의 요시(吉)라는 한자를 받아 하시바 요시토시(羽柴吉智)로 개명하였다.
  • 조선과의 전쟁을 회피하려고 한 이유는, 무역에서 얻는 이해관계 외에도 쓰시마 섬이 전쟁의 중간기착지가 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이는 소 요시토시의 성격이 아니라 해도, 쓰시마의 번주의 입장이었다면 어느 누구라 해도 임진왜란을 반대하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 덧붙여 에도 시대에 조선과의 조약으로 소 가문의 쓰시마 번은 번영하였지만, 조선과의 교섭을 서둘러 처리하였기 때문에, 2대 번주 소 요시나리 대에 와서 국서위조가 발각되어 소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야나가와 잇켄)
  •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하였다. 세례명은 다리오이다.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을 군종 사제 자격으로 방문한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는 "지극히 신중한 젊은이로, 학식이 있고 훌륭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소 요시토시가 임진왜란 당시 맨 먼저 조선 땅을 밟은 장본인인 탓에 이에 밉보여서 소 요시토시의 이혼을 거론하며 간사하고 음흉한 자로 묘사하고 있다. 신빙성에 대해서는 소 요시토시와 항상 생사고락을 함께한 세스페데스쪽의 주장이 임진왜란의 피해만으로 인물을 판단한 조선왕조실록에서의 관점에서보다 높다.
만력 28년에는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이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풍신수뢰(일본어: 豊臣秀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끼고서 싸워 서해도(西海島)의 대명휘원(大明輝元)[5]을 내치고, 휘원이 친근하게 신임하는 장관 소서행장(일본어: 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과 석전삼성(일본어: 石田三成 이시다 미쓰나리[*]) 등 8∼9명을 모두 살해하여 죽이고 나라 안을 평정하여 제도(諸島)를 호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갑비수(甲斐守: 구로다 나가마사)·가등청정(일본어: 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 등이 바야흐로 친근하게 신임을 받으며 용사하는데, 종의지(일본어: 宗義智 소 요시토시[*]) 는 소서행장의 사위인 이유로써 자기 아내를 내쫓고 덕천가강에게 가서 붙었고, 평조신[6]은 소서행장의 모주(謀主)였었으므로 어떤 일을 기회로 납총(納寵)하려 하여 가강과 청정 의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갖은 말을 늘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종의지와 평조신은 곧 왜적들 중에서도 매우 교활한 자들로서, 거주하고 있는 곳이 우리의 지경과 밀접하게 가깝습니다. 강화 요청을 핑계삼아 자주 사람을 보내 바다를 건너와 간곡한 정성을 다하기도 하고 멋대로 공갈 협박을 하기도 하며, 몰래 쾌속선을 내보내 사람을 약탈하기도 하고 그들 섬의 왜인들로 하여금 투항해서 굶주리고 있음을 고하게도 하여, 변태가 종잡을 수 없으므로 더욱 측량하기가 어렵습니다. 빈번하게 왔다갔다 하면서 탐색이 갈수록 급박해지고 말을 바꾸어 가면서 계책을 더욱 깊이 쓰고 있습니다. 그들이 꺼리면서 은밀히 물어보는 것은 매양 중국 장수들이 어느 땅에 머물러 있느냐는 것과 중국군이 과연 본국에 머물러 있으면서 방수(防戌)하느냐는 것이니, 이런 때에 천조(명나라)에서 힘을 내어 구제해주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스스로 도모하여 큰 실패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 선조 163권, 36년(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6월 9일(갑오) 7번째 기사

가계

소 요시토시가 등장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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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관련 항목

각주

  1. 5남으로 태어났다는 이설도 있다.
  2. 1580년에 상속받았다고도 하는 설이 있다.
  3. 가도입명(假途入明)
  4. 정치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족을 멸하려 했기 때문에 소 요시토시는 그 화가 쓰시마 후추 번에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과 이혼해야만 했다.
  5. 다이묘인 毛利輝元 모리 데루모토[*]를 지칭함
  6.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 대마도의 가신, 임진왜란이 시작될 무렵과 관련이 깊은 인물
제1대 쓰시마 후추 번 번주 (소 가문)
1588년 ~ 1615년
후임
소 요시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