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굿 마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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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굿 마셜
미국의 대법관
임기 1967년 10월 2일 - 1991년 10월 1일
전임 톰 C. 클라크
후임 클래런스 토머스
대통령 린든 B. 존슨

신상정보
출생일 1908년 7월 2일
사망일 1993년 1월 24일
배우자 비비안 버스터 버레이
세실리아 서얏
종교 성공회

서굿 마셜(Thurgood Marshall, 1908년 7월 2일 - 1993년 1월 24일)은 미 대법원의 첫 번째 흑인 법학자이다. 변호사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서굿 마셜은 린든 존슨 대통령에 의해 1967년 대법관으로 내정되어 1991년까지 그 직에 있었다. 사후에 1993년 11월 30일 빌 클린턴 대통령이 수여하는 자유훈장을 받았다.

유년기[편집]

조부모가 노예였던 마셜은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본래 서로우굿이었지만, 서로우굿이라는 스펠링이 싫다며 초등학교 2학년때 서굿으로 바꾼다. 서굿 마셜의 아버지 윌리엄 마셜(기차역의 짐꾼)은 서드굿 마셜에게 미국 헌법법의 지배에 대해 가르쳤다. 이러한 윌리엄 마셜의 가르침은 후에 서굿 마셜의 대학원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서굿 마셜은 비비안 버스터 버레이와 1929년 결혼 하지만 1955년 사별하고, 1955년 12월 세실리아 서얏과 다시 결혼해 그녀와 여생을 함께한다. 세실리아 서얏사이에 서드굿 마셜 주니어(前 클린턴 미 대통령 수석 보좌관)와 존 W. 마셜(전 미연방 보안관장) 두 아들이 있다.

교육[편집]

서굿 마셜은 프레드릭 더글라스 고등학교(볼티모어)를 1925년에 졸업하고, 링컨 대학교를 1930년도에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고향에 있는 메릴랜드 대학교 로스쿨에 지원하지만, 학교의 인종차별 정책때문에 불합격 통지를 받는다. 이후 마셜은 메릴랜드 대학 로스쿨이 아닌 하워드 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하여 1933년 1등으로 졸업하며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그는 하워드 로스쿨에서 NAACP 원년 인권변호사 찰스 해밀턴 휴스턴을 만나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흑인 분리교육 위헌 판결로 유명한 ‘올리버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사건’의 변호사였던 휴스턴은 마셜에게 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NAACP) 변호사가 될 것을 권유했다.[1]

초기 경력[편집]

그 후, 인권 변호사가 된 마셜은 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 발티모어 지회 소속으로 찰스 해밀튼 휴스턴 (Charles Hamilton Houston)과 함께 공동으로 머레이 대 피어슨 사건의 도널드 머레이 (Donald Gaines Murray)를 변호한다. 머레이 대 피어슨 사건은 머레이가 메릴랜드 대학 로스쿨에 지원하였으나 학교로부터 흑인분리정책을 이유로 들어 입학을 거부당한 뒤, 1935년 메릴랜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었다. 1936년 메릴랜드주 대법원이 하급심을 인용함으로써 승소하였다.

판사[편집]

1967년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의 대법관이 되었다. 판사로서, 마셜은 표현의 자유와 동등한 보호를 위한 중요한 결정을 썼고, 소수민족과 빈민을 위한 보호를 법원에 역설하였다. 그는 헌법의 요구를 만난 방향에서 사형이 집행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절규하기도 하였다. 법원에 보수적 판사들이 다수를 차지하면서, 마셜은 가끔 웅변적 성문 견해를 표현하였다.

1991년 병으로 24년간의 판사직에서 물러난 후, 1993년 1월 24일 볼티모어 근처에서 사망하였다.

더 보기[편집]

  •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 마셜 변호사가 흑인 최초 연방 대법관이 되게 한, 미국 역사상 매우 유명한 판결이다.

각주[편집]

  1. 최윤필 (2017년 1월 23일). “[기억할 오늘] 1.24 서굿 마셜”.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