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3세 심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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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3세

샤를 3세 또는 단순왕 샤를 (프랑스어: Charles III le Simple, 독일어: Karl der Einfältige, 879년 9월 17일929년 10월 7일)은 카롤링거 왕조의 일원으로 프랑스 왕(서프랑크 왕국)이었다. 샤를 3세는 재위기간 중 로트링겐을 되찾고 노르망디노르만족을 정착시켰다.

말더듬이 루이 2세의 유복자였으며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났다가 893년 랭스 대주교 풀크 등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일부 귀족들에 의해 추대된 외드와 5년간 대립하였다. 898년 1월 아들이 없던 외드가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음으로써 내전이 종식되었다.

재위기간 중 바이킹 족의 침투를 격퇴하였으나 내분을 수습하지 못했고, 로트링겐을 차지하기도 했다. 920년에는 독일을 침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922년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의 반란으로 축출되었고, 923년 투옥되었다가 솜므의 감옥에서 사망했다. 카롤링거 왕조의 군주들 중 경건왕 루트비히 다음으로 두 번째로 쿠데타로 축출당한 지도자였다.

생애

왕자 시절

왕후 에드지푸와 아들 루이 4세

샤를은 879년 ‘말더듬이 왕’ 루이와 그의 계비 아델라이드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루이 3세샤를로망은 그의 이복 형들이었다. 루이 2세는 첫 번째 부인인 안스가르데와의 사이에서는 루이 3세와 샤를로망 형제가 있었고, 두 번째 부인에게서는 자녀가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 부인인 아델레이드에게서는 딸 기셀라와 유복자 아들 샤를 3세가 태어났다. 그의 생모 두 번째 부인 아델라이드는 할아버지인 대머리 카를이 직접 고른 아들의 신부감이었다.

그는 친절하다 혹은 순진하다, 바보, 얼간이 등의 뜻이 담긴 단순왕, 생플이라 불렸다. 그는 처음부터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다. 884년 의붓형 샤를로망이 죽었을 때나, 887년 11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삼촌 동프랑크‘비만왕’ 샤를이 폐위되었을 때는 아직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고 외드가 대신 왕위에 올랐다. 어려서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쾰른의 대주교 위그의 간호로 기적적으로 소생하였다.

왕위 계승권 박탈

884년 형 샤를로망이 죽었을 때 그는 5세의 유아였으므로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동프랑크의 샤를 3세 르 그로(카를 3세 비만왕)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쾰른의 대주교 위그는 네우스트리아 백작인 로베르 4세의 외손자로, 그는 샤를의 후견인이었다. 그는 귀족들이 추대하는 인물 대신 어린 샤를의 시간을 벌게 하기 위해 샤를 3세 르 그로을 찬성했다.

888년 1월 샤를 르 그로아르눌프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된 뒤에는 바이킹을 퇴치한 데 공을 세운 로베르 가문의 외드를 왕으로 추대했다. 885년~886년 파리 시에 침투한 바이킹을 물리쳤던 외드경건왕 루이의 외손으로 아득하게나마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한편 888년 초, 새로 서로마 황제가 된 귀도는 샤를을 지지하였다.

즉위

왕위 계승권 분쟁

단순왕 샤를 3세, 16세기 작

889년 6월 아키텐 공작이자 푸아티에 백작라눌프 2세를 찾아가 외드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자신에게 협조할 것을 요청하여 포섭하였다. 893년 1월 28일 랭스대주교 풀크와 다른 귀족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이들은 샤를을 서프랑크 왕국이 진정한 왕으로 내세워 왕위 수여식을 거행했다.

이후 샤를 3세의 지지파와 외드 지지파 간에 내전이 발생했다. 전쟁은 894년 3월 31일에 잠정 휴전하였다.

아르눌프는 미성년자가 영토를 제대로 다스릴수 있느냐며 샤를과 외드보름스로 소환했지만 샤를은 가기를 거부했다. 895년 샤를과 외드보름스로 소환했지만 샤를은 가기를 거부했다. 화가 난 아르눌프외드서프랑크의 왕으로 승인하였다. 이어 아르눌프의 이탈리아 원정 지원 요청 역시 거부하고 응하지 않았다.

896년 다시 외드와의 전쟁이 벌어졌지만 이렇다할 소득 없이 아르눌프의 지시로 휴전하였다.

즉위 초반

샤를 3세 시대의 동전, CARLES라 쓰여 있다.

897년 내란 이후 왕위를 포기했지만 898년 1월 외드는 샤를을 후계자로 지목하였으므로, 외드가 죽자 단독으로 왕이 되었다. 죽은 외드의 동생 로베르 1세바이킹과의 교전에서 여러번 승리를 거두어 인망을 쌓고 그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로베르는 911년 샤르트르에서 노르만족과 싸워 승리했다. 로베르는 왕의 자리는 샤를에게 양보했지만 여론을 형성하여 권력을 좌지우지했다.

898년 로트링겐의 귀족인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 등과 내통하여 로트링겐을 침공하였다. 그해 12월 28일 노르만 족과의 싸움에서 이겨 다량의 전리품을 얻었다. 그러나 종종 이겼을 뿐 계속된 전투에서 바이킹에게 패하게 된다.

900년대 초부터 노르웨이에서 온 롤로 등의 바이킹프랑스 서북부와 노르망디를 약탈했다. 샤를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상대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907년 4월 19일 인겔하임 백작인 이멘티가르(Immedinger)와 부인 라그네힐드(Reginlind)의 딸로,샬롱 쉬르 마른의 주교이자 캄파네 백작인 브레브 2세(Beuve II, 일명 보보)의 누이인 프레데루나와 결혼했다. 프레데루나의 이모가 하인리히 1세의 부인 마틸다였다. 이 결혼으로 그의 영지를 노리던 하인리히 1세나 부르고뉴의 루돌프 2세의 침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레데루나는 딸만 6명을 낳고 사망했다.

그는 로트링겐에 각별히 신경을 썼지만 직접 다스릴 수는 없었으므로 프레데루나의 부모인 이멘티가르와 라그네힐드, 로트링겐의 귀족으로 카를 2세 대머리왕의 외손자인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에게 사실상 로트링겐의 통치를 일임하였다. 그럼에도 로렌의 정치에 개입하여 각별히 신경을 썼다.

바이킹과의 조약 체결

단순왕 샤를 3세
롤로와 조약을 체결하는 샤를 3세

911년말 샤를은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체결하여 저 사이네 지역(나중에 노르망디라 불리게 된 지역)을 노르만족 롤로에게 봉토로 지급하고 바이킹의 프랑스 침공의 종지부를 찍었다. 또한 같은해 동 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카롤링거 왕‘유아왕’ 루트비히가 죽자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콘라트 1세 대신 샤를을 왕으로 받들겠다 하여 로타링기아도 복속시켰다.

생클레르쉬르레프트 조약으로 롤로바이킹 족에게 노략질을 일삼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노르망디에 정착시켰다. 이 조약에 따라 샤를은 나중에 노르망디라 불리게 된 지역을 바이킹 지도자 롤로와 그의 부하들에게 넘겨주었고 그 대신 롤로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샤를의 봉신이 되었다. 그러나 바이킹 족과 꾸준이 싸워온 로베르 가문 사람들과 베르망두아 백작가문은 강하게 반발했다.

918년부터 그의 지위가 허술하다는 것을 안 독일하인리히 1세 등은 서프랑크의 변경을 침략했으나 오히려 격퇴당했다. 919년 10월 잉글랜드에 결혼 동맹을 제의, 알프레드 대왕의 딸 에드지푸와 결혼하였다.

919년 로트링겐에서 샤를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하였다. 920년 샤를은 군사를 일으켜 독일 왕국을 침공하였으나 보름스 근처 페데르스하임에서 독일 국왕 하인리히 1세의 군대에 의해 격퇴당했다. 921년 7월 11일 샤를 3세는 독일 국왕 하인리히 1세로렌에서 만나 우정의 협정을 체결하였다.

정변과 투옥

922년 로렌에 침입한 독일의 왕 하인리히 1세를 상대하여 겨우 이기고 화약을 체결한 뒤 돌아왔다. 그는 로타링기아의 군사와 병력에 주로 의존하였다. 샤를이 로트링겐의 업무와 고문관들에게만 신경을 쓰고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을 소외시키자 920년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샤를의 퇴위를 요구하기도 했다. 922년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 외드의 형제인 로베르 1세를 왕으로 뽑았다. 900년대 이후 그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랭스 대주교 풀크는 그해 7월 2일에 사망하였다.

샤를의 왕관이 귀족들에 의해 박탈되는 장면

923년 샤를은 군사를 일으켜 뫼즈, 아팅기에, 수아송에서 로베르 1세의 군대와 싸웠다. 수아송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자객을 보내 로베르를 죽였지만 플랑드르로 갔다. 그해 7월 플랑드르성에 미리 숨어있던 로베르 1세의 처남이자 사위인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곧 부르고뉴의 라울이 새로 왕이 되었다. 그의 아내 에드지푸는 아들 루이 4세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건너갔다.

최후

헤르베르트 2세는 협상을 하자고 한 뒤 그를 성안에 감금했다. 샤를은 노르만 족에게 자신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노르만 족은 소수가 그를 지원하였다.

헤르베르트 2세는 포로로 잡은 샤를을 이용해, 새로 왕이 된 로베르의 사위 라울에게서 이권을 얻었다. 샤를은 곧 헤르베르트 2세에 의해 유폐되었다. 라울은 그를 합법적인 왕으로 예우하는 한편 포로로 예우하였다. 샤를은 927년 솜므의 다른 감옥으로 옮겨졌다가 929년 10월 페로네(Peronne) 감옥에서 굶어 죽었다.

사후

페로네의 생 푸르시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샤를은 페로네의 감옥에서 굶어죽은 것으로 보나 일설에는 헤르베르트 2세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그의 아들 루이922년 그가 폐위되기 전 모후 에드지푸와 함께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936년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가계

샤를3세와 에드지푸, 아들 루이 4세

부르고뉴의 앙스가르데(Ansgarde of Burgundy)

    • 이복 형 : [[루이 3세(Louis III of France,863?~882)
    • 이복 형 : 샤를로망 2세(Carloman II,865~884)
  • 어머니 : 파리의 아델라이드(Adelaide of Paris, 850?~901)
  • 왕비 : 프레데루나(Frederuna, 887~917.2.10) 또는 프레데군드(Fredegund), 907년 4월 19일 결혼
    • 딸 :이르멘트루드(Ermentrude)
    • 사위 : 고드프리(Godefroy, 로트링겐의 팔라틴 백작
    • 딸 : 프레데루나(Frederuna)
    • 딸 : 아델하이트(Adelheid)
    • 사위 : 구이(Gouy)의 백작 라울과 결혼
    • 딸 : 기셀라(Gisla), 노르만 부족장 롤로와 결혼
    • 사위 : 롤로
    • 딸 : 로트루드(Rotrud)
    • 딸 : 힐데가르트(Hildegard)
  • 왕비 : 에드지푸(Eadgifu, ?~951)
    • 아들 : 루이 4세(Louis IV d'outremer, 920~954), 서프랑크왕(936-954)
    • 아들 : 아르눌프(Arnulf)
    • 아들 : 드로고(Drogo)
    • 아들 : 로리코(Rorico, ?~976년 12월 20일), 949년 레온(Laon)의 주교, 레온의 생 빈센트의 수도원에 매장
    • 딸 : 오페어(Alpais)
  • 사위 : 에르발트(Erlebold), 랑가우의 백작

관련 항목

참고문헌

  • Auguste Eckel, Charles le Simple, Bibliothèque de l'École des hautes études: Sciences historiques et philologiques, Annales de l'histoire de France à l'époque carolingienne, #, Paris, Librairie Émile Bouillon, 1899, 168 pages (réimpression Genève, Slatkine Reprints - Paris, Honoré Champion, 1977)
  • Ivan Gobry, Charles III le Simple : Fils de Louis II, Pygmalion, 2007, 206 pages ISBN 978-2-7564-0114-0
  • Philippe Lauer, Recueil des actes de Charles III le Simple: roi de France, Imprimerie nationale, 2 tomes, 1940-1949
전임
외드
서프랑크의 국왕
(893년부터는 외드의 대립왕)
898년 - 922년
후임
로베르 1세
전임
유아왕 루트비히
로타링기아의 왕
911년 - 925년
후임
기셀베르트
전임
라눌프 2세
아키텐의 국왕
898년 - 928년
후임
윌렘 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