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에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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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에몬 사건(틀:Ja-y)이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급서 직후인 1199년(쇼지 원년) 2월, 이치조 요시야스(一条能保)・타카요시(高能) 부자의 신하들이 곤다이나곤(権大納言) 츠치미카도 미치치카(土御門通親)를 암살하려다 발각돼 체포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이 산자에몬(三左衛門)이란 이름으로 붙린 이유는 체포된 사건 주동자인 고토 모토키요(後藤基清), 나카하라노 마사츠네(中原政経), 오노 요시시게(小野義成) 세 명의 관위가 모두 사에몬노조(左衛門尉)였기 때문이다. 3명의 사에몬(左衛門) 들이 일으켰다 해서 산자에몬 사건이라 불린다.

사건의 개요

메이게츠키(明月記)-藤原定家 作 (오사카부립 나카지마도서관 소장)

(註:사건 개요는 모두 츄나곤 후지와라 사다이에(藤原定家)의 일기인 메이게츠키(明月記)의 기록에 따른 것임)

1199년(쇼지 원년) 1월 11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낙마 사고를 당했고, 현재 위중하다는 급보가 일주일 뒤인 18일 교토에 전해졌다[1]. 가마쿠라 막부의 기반은 아직 약했고 수도인 교토에는 다음 대권을 누가 잡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과 함께 혹시 있을지 모르는 정변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2]. 바로 전년도에 외손자인 츠치미카도 천황(土御門天皇)을 옹립해 권세를 부렸던 츠치미카도 미치치카(土御門通親)는 요리토모가 죽은 20일에 임시 황궁 회의를 주재해 스스로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将)에 오르고 자신의 관위였던 좌중장(左中将) 관위를 요리토모의 장남 요리이에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모레인 22일부터 교토에는 '사태위급,교토 가마쿠라 상행선에 병력이동 징후가 있음[3]' 같은 낭설이 퍼져 크고작은 소동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우근위대장 미치치카는 명을 내려 '지금 밖에 나가면 살해당할 뿐이다[4]'라며 교토 주민들에게 집밖에 나오지 못하게하는, 마치 오늘날의 계엄령 사태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궁중경비를 군진을 친 것처럼 하라[5]'라는 명령이 포고되는 와중인 2월 11일에 사마노카미(左馬頭) 미나모토노 타카야스(源隆保)가 사병을 모아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다음날 가마쿠라에서 도착한 막부의 무사들이 우근위대장 미치치카 지지 선언을 하고 경비에 나섰으며 그 소문이 이미 교토 주민들에게 알려진 모양으로, '마침내 우대장 미치치카가 나선다. 살생부에 적힌 사람이 많다더라'는 소문도 돌았다고 한다.

그리고 14일, 타카야스의 역모에 관련해 고토 모토키요(後藤基清)와 나카하라노 마사츠네(中原政経), 오노 요시시게(小野義成) 3명의 사에몬노조(左衛門尉)들이 요리이에(頼家)의 수사관들에게 체포돼 황궁 감옥으로 연행되는 것을 시작으로, 여타 관련자들의 체포 및 고문이 시작됐다. 17일에는 사이온지 키미츠네(西園寺公経)와 시묘인 야스이에(持明院保家)・미나모토노 타카야스(源隆保)들이 관직을 삭탈당하고 요리토모 시체의 염습을 맡았던 고승 분가쿠(文覚)와 함께 케비이시(検非違使)[6] 들에게 넘겨졌다. 26일에는 가마쿠라에서 막부의 중신 나카하라노 치카요시(中原親能)가 상경해 사건 뒷처리를 맡으면서 교토는 일단 평온을 되찾았다[7].

세 명의 사에몬노조들은 가마쿠라에 호송되지만, 도중 막부가 신병 인도를 거부해 다시 교토로 보내졌다. 모토키요는 사누키 국(讃岐国) 슈고직을 해임당한 상태였고 나머지 2명은 아직 처분이 정해지지 않았다. 키미츠네(公経)와 야스이에(保家)는 가택연금 됐고, 역모 수괴인 타카야스(隆保)는 토사 국(土佐国)으로, 고승 분가구(文覚)는 에치고(越後)의 사도(佐渡) 섬으로 유배당했다.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에 따르면 분가쿠는 다이라노 고레모리(平維盛)의 아들로 과거 겐페이 전쟁 때 살아남은 얼마 안되는 다이라 씨의 일족이었으나 이 일로 후일 처형된다고 한다. 분가쿠를 제외하면 관련자 모두는 친척지간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8].

고토바텐노(後鳥羽天皇)

사에몬노조 3명은 이치조 요시야스(一条能保)의 심복들로, 요시야스는 요리토모의 매형이며 교토슈고로서 가마쿠라 막부의 교토 교섭에 깊이 관여해왔다. 요시야스는 사건 발생 2년 전에 병사했는데 요리토모의 비호아래 성장한 이치조 집안은 요리토모와 요시야스의 죽음으로 막부와 연결끈이 약해져 집안의 장래가 불투명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이치조 집안의 무사들이 교토의 권세가 츠치미카도 미치치카를 제거해 새 장군 요리이에에게 공을 세우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권력 교체기에 일어난 이 사건은 분명 큰 파문을 일으키긴 했으나, 권력 교체를 원만하게 추진하고자 했던 막부는 중신 오오에노 히로모토(大江広元)를 비롯해 사태 진정에 온 힘을 쏟았다. 이치조 집안에게 노려졌던 미치치카는 막부에 협력을 약속했고 산자에몬 사건으로 오히려 불만 세력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9]. 한편 미치치카와 막부를 견제하려 했던 고토바상황(後鳥羽上皇)에 의해 사건 관련자 사면령이 대거 내려져, 유배됐던 타카야스나 분가쿠 역시 미치치카 사후에 복권이 된다[10]. 핍박상태에 처해졌던 이치조 씨도 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에게 복권되면서 죽은 요시야스의 아들 노부요시(信能)와 요리우지(頼氏) 등이 상황의 측근으로 등용되었고 이때부터 이치조 가문은 막부가 아닌 황실에 충성하게 된다.

주석

  1. 1월 13일의 요리토모 서거 사실이 일주일 후인 20일 교토에 전해졌다고 하니 당시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교토, 가마쿠라 간 연락망은 일주일의 시차를 갖고 있었다고 짐작되고 있다.
  2. '공포핍박의 세상인가'(「怖畏逼迫の世か」-『明月記』), '천하는 편할 틈이 없고'(「天下閑かならず」-『猪隈関白記(이노쿠마 캄파쿠기)』)
  3. 본문:「院中物忩、上の辺り兵革の疑いあり」
  4. 본문:「只今マカリ出デバ殺サレ候ナンズ」-『愚管抄』(구칸쇼: 승려 지엔(慈円)이 쓴 7권의 역사서. 1220년 作)
  5. 본문:「院中警固軍陣の如し」
  6. 검비위사(틀:Ja-y,訓: 케비이시 or 켐비이시): 중세 일본의 감찰기구 중 하나로 관원의 부정 비리를 적발해 바로잡는 역할. 오늘날의 검사 혹은 감사원의 역할을 맡음.
  7. 나카하라노 치카요시(親能)는 요리토모의 차녀인 '산벤(三幡)'의 유부(乳父)이면서 산벤을 황실에 시집보내는 일에 대해 논의할 임무도 맡았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황실과의 혼사는 그 해 6월 산벤이 병사하면서 좌절된다.
  8. 키미츠네는 타카야스의 사위, 타카야스는 요시야스의 사촌이었고, 타카야스는 무라카미 겐지의 방계이나 모친이 아쓰다 신궁의 궁사인 후지와라 스에노리(藤原季範)의 딸이었고, 요리토모의 사촌이었다.
  9. 구칸쇼(愚管抄)에 의하면 오오에노 히로모토가 미치치카에게 '한 편(方人-味方)'이라고 했던 대화 내용이 실려있다. 히로모토는 1191년에 미치치카의 추천으로 명법박사(明法博士) 및 케비이시(検非違使)에 임명돼, 히로모토의 장남인 치카히로(親広)가 이후 아비의 벼슬을 세습하기도 했다.
  10. 단, 분가쿠는 복권되어 교토에 돌아온지 일개월 만에 쓰시마에 유배당하고 후일 처형된다.

관련항목

참고문헌

  • 이즈모 타카시(出雲隆) 편저 '가마쿠라무가사전'(『鎌倉武家事典』), 세이아보우(青蛙房) 출판, 2005년 초판발행, ISBN 978-4-7905-0530-3
  • 가와치 쇼스케(河内祥輔) 著 '교토황실재건운동과 황실・막부 양대체제의 성립'(「朝廷再建運動と朝廷・幕府体制の成立」), 요시카와 코분칸(吉川弘文館), 2007년 초판발행, ISBN 978-4-642-02863-9
  • 우에스기 카즈히코(上杉和彦) '오오에노 히로모토의 재검토'(「大江広元像の再検討」), 요시카와 코분칸(吉川弘文館), 2006년 초판발행, ISBN 978-4-642-02446-4
  • 시오하라 히로시(塩原浩) '산자에몬사건과 이치조 가문'(「三左衛門事件と一条家」), 리츠메이칸분가쿠(立命館文學), p624, 2012년 초판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