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BIGRULE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9월 9일 (수) 11:54 판
변영태
卞榮泰
작가 정보
출생1892년 12월 15일(1892-12-15)
조선 조선 경기도 부평군
사망1969년 3월 10일(1969-03-10)(76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 대한민국
직업시인
영문학자
교육자
정치가
외교관
학력중국 셰훠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중퇴
활동기간1917년 ~ 1969년
장르시, 영문학
부모변정상(부)
친지변해영(할아버지)
변영만(형)
변영로(아우)

변영태(卞榮泰, 1892년 12월 15일 ~ 1969년 3월 10일[1])는 대한민국시인, 영문학자, 교육자, 정치가, 외교관이었다.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20여년간 교편을 잡았고, 해방 후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외무부 장관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제3공화국 때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시인 변영로(卞榮魯)의 형이며, 법률가한학자 변영만(卞榮晩)의 동생이다. 아호는 일석(逸石)이다.

경기도 부천에서 출생하였고 한성부(지금의 서울)에서 성장하였으며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원적지는 경기도 부평도호부 하오정면 고리동(지금의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313번지)이다.

생애

생애 초기

1913년 만주의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중국 셰훠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1년을 중퇴하였다. 1917년부터 1945년까지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다. 1945년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관료 생활

1949년 1월 27일, 주필리핀 특사에 임명되어[2] 일본 도쿄를 거쳐 마닐라로 부임하였다.[3] 도쿄에서는 이승만의 명을 따라, 맥아더 사령부에 방문하여 대한군원(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주둔 등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내 임무는 명확히 규정되어 카르빈 한 자루도 넘겨줄 수 없다"면서 애치슨 국무장관만을 비난했다.[4][5]

1951년 외무부장관이 되어 파키스탄라호르에서 개최된 에카페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한국 전쟁으로 인한 대한민국 사정의 어려움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이 회의에 참석할 때 가지고 간 여행경비를 남겨서 돌아오면 국고에 반환을 할 정도로 청렴하고 곧은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 내려온다.[6]

변영태 외무장관 등 한국대표단이 제네바회담 참석차 출국하였다.(1954)
1954년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 대표들. 왼쪽부터 양유찬, 한표욱, 변영태, 임병직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제7~9차 국제 연합 총회에서 한국대표단 단장으로 활동했다. 1952년 제7차 총회에는 임병직, 양유찬, 한표욱, 이재항, 서재식, 전상진으로, 1953년 제8차 총회에는 양유찬, 임병직, 한표욱, 최덕신, 이수영, 이재항, 한유동으로, 1954년 제9차 총회에는 임병직, 양유찬, 최순주, 윤치영, 이재항, 한유동으로 한국 대표단을 구성하였다.[7] 1953년 5월 29일 한국전쟁의 휴전 후 5개 중립국의 한국 내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전 한국군을 유엔군 산하에서 탈퇴시키겠다고 유엔군을 위협하였다.[8] 1953년 10월 1일, 워싱턴 D.C.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하였다.[9] 1954년 4월부터 7월까지 제네바에서 열린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단의 수석대표에 참석하였다.[10] 5월 22일, 변영태는 "제네바제안"이라 불리는, 한국의 통일문제를 제안하였다.[11]

야당 정치인

제1공화국 붕괴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 3월 22일 윤보선·변영태·박순천 등의 재야지도자들은 박정희의 3월 16일 군정연장 선언에 반발하여 '민주구국선언대회[12]'를 열어 군정연장봉쇄를 결의하고 가두데모에 나섰다.[13]

1962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에 〈외교록〉, 번역서로는 〈논어〉(영역)가 있다.

사후

사후 장례는 사회장으로 예정되었으나 검소한 장례를 원하는 유족들의 뜻을 받아들여 가족장[14] 으로 치루어졌다.

저서 및 역서

저서

  • 〈외교록〉

번역서

  • 〈논어〉(영역)

학력

명예 박사 학위

가족 관계

같이 보기

참고 자료

  • "변영태",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2008. 2. 17자 기사)

각주

  1. 《한국일보》 (1969.3.11)前 總理 卞榮泰씨 別世
  2. 《경향신문》(1949년 1월 29일자) 1면. 〈駐比 特使에 卞榮泰博士
  3. 《경향신문》(1949년 2월 3일자) 1면. 〈卞駐比特使 卄七日出發
  4. 변영태 저, 외교여록에서
  5. “秘錄 韓國外交<28> : 政府樹立 직후 ⑩”. 경향신문. 1975년 3월 17일. 
  6. 《동아일보》 (1969.3.11)에피소드로 본 逸石편모
  7. “歷代유엔總會韓國代表團”. 경향신문. 1962년 8월 8일. 
  8. 이호재,《한국외교정책의 이상과 현실:이승만외교와 미국정책의 반성》(법문사,2000) 449~451쪽.
  9. 김창수,〈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행정협정〉,《역사비평》,제54호(2001년 봄),430쪽.
  10. “6·25 참전국 모두 모여 만든 ‘유일한 국제공인 통일원칙’”. 동아일보사. 2008년 2월 1일. 
  11.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남측자료] 변영태 외무부장관, 한국통일문제 제안 (54.5.22 제네바제안)”. 2008년 2월 15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12. 1974년의 민주회복국민선언과는 관련 없음
  13. 김용욱, 《한국정치론》 (오름, 2004) 346페이지
  14. 『어처구니없는 일』에 분통 - 동아일보 1969년 3월 12일자 기사
전임
백두진
제5대 국무총리
1954년 6월 27일 ~ 1954년 11월 28일
후임
백한성
(임시서리)
전임
임병직
제3대 외무부 장관
1951년 4월 16일 ~ 1955년 7월 28일
후임
조정환
(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