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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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임지(白任至, 1130년~1191년)는 고려 중기의 무신이자 정치가다. 본관은 대흥이다. 시호는 경렬(景烈). 대흥 백씨(大興白氏)의 시조다.

생애

대흥군(大興郡)(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출신으로 외가인 남포현(藍浦縣)(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에서 살았다.[1][2] 아버지 (曘)는 1114년(예종 9) 복시(覆試)를 보고 장원급제하였으나 벼슬한 기록이 없다.[3]

처음에는 농사를 지었는데, 용맹하여 개경으로 뽑혀 올라갔다. 이때 가난하여 땔감을 팔아 근근히 살림을 유지하였다. 고려 의종 때 내순검군(內巡檢軍)에 충당되어 왕을 호종하다가 잠시도 어가(御駕)를 떠나지 않아 대정(隊正)이 되었다.[4]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으로 무신들이 정권을 잡자 큰 공을 세워 현달하게 되었다. 명종조에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을 때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행렬을 꾸리고 일찌기 남의 집 살이 할 때의 옛 주인 노파를 찾아가 사례하니 노파가 탄복하였다.[4] 조위총(趙爲寵)이 군사를 일으키자 연주(連州)와 서도(西都)의 싸움에 이르기까지 공훈이 매우 많았으므로 우군지병마사(右軍知兵馬事)가 되었다.[1] 대장군(大將軍) 병마부사(兵馬副使)로 비뀌었다. 또 지형부사(知刑部事)가 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1]

양현고(養賢庫) 기관(記官) 한 사람이 관아에서 은그릇을 빌려 가지고 낭장(郞將) 이윤평(李允平)의 집에 갔다가 죽어 이윤평이 그를 죽인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마침 중군(中軍)이 전투 말을 검열함에 백임지가 주부동정(主簿同正) 조영인(趙英仁)의 말 안장이 매우 화려함을 보고, 이를 이상히 여겨 잡아가두고 법사(法司)에 넘겼는데, 조영인의 가동(家僮)이 '조영인이 은그릇을 탐내어 기관을 죽였다'고 발고하니 마침내 조영인의 범행이 드러나고 이윤평이 누명을 벗게 되었다.[4]

상장군(上將軍)의 직을 받아 곧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고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옮기기도 하였다.[1] 왕의 신임을 받아 칼을 차고 내전(內殿)에 들었으나 왕이 돈독한 예를 표하니 대간(臺諫)들이 탄핵하지 않았다.[4] 1188년(명종 18)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승진하였다가 곧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이부상서(吏部尙書) 태자빈객(太子賓客)으로 옮기고, 1190년(명종 20)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되었으나 1191년(명종21)에 졸(卒)했다. 임금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추도하고, 시호를 경렬(景烈)이라 추증하였다.[1] 고려사열전(列傳)이 있다.

가족관계

  • 아버지 : (白曘)[5], 급제
    • 아들 : 양필(白良弼)[5], 국학박사(國學博士)

깉이 보기

참고문헌

  • 《고려사》〈열전〉백임지전
  • 백임지묘지명(白任至墓誌銘)

각주

  1. 백임지묘지명
  2. 이로 인해 남포 백씨라는 오해가 있었으나 묘지명이 발견되어 대흥 백씨임이 밝혀졌다.
  3. 아버지 (曘)가 급제 후에 어떤 사정으로 벼슬하지 않아 외가에 보내져 남포에서 자란 것으로 추정된다.
  4. 《고려사》〈열전〉백임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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