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한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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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한 감정(反韓感情)이란 한국 문화·한국인 등을 싫어하는 감정으로, 한민족을 싫어하는 감정이 쉽게 결합된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상 많은 많은 충돌이 있었던 주변국(일본중국)과의 사이의 전통적인 감정적 마찰과 더불어 근대 이후에 서양의 여러 나라와 교류를 시작하면서 생긴 문화적 편견이나 오해, 근래에는 대한민국의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국내에 유입된 개발도상국 국가 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 등 복합적인 이유이다.

용어

여러 외국 중 반한감정이 가장 심한 일본에서는 혐한(嫌韓)이라는 용어가 반한 감정의 대표적인 용어로 널리 쓰이고 있으며,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외에도 반한(反韓), 염한(厭韓), 멸한(蔑韓), 증한(憎韓), 이한(離韓), 정한(征韓), 망한(亡韓)등 다양한 용어가 반한 감정의 맥락에서 쓰이고 있다.

중국에서는 반한정서(反韓情緒) 또는 반한주의(反韓主義) 등의 말을 쓰고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 설명에 따르면, 혐한이란 용어는 적극적인 반대보다는 소극적인 혐오감을 표현하는 말이며, 이 자체가 한국이란 나라는 진지하게 반대할 만큼, 대단한 나라가 아니라는 멸시의 의미가 들어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1]

일본에서의 반한 감정

일본의 반한감정은 소위 혐한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내용과 강도에서 여타 국가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심하다.

전근대 일본

일본에서의 굴절되고 왜곡된 한반도 인식은 고대 사서인 일본서기의 기술로부터 시작된다. 분립했던 여러 소국들을 통합하여 성립된 야마토가 편찬한 일본서기는 왕권의 강화 및 안정화의 목적으로 천황가의 초기가계를 조작하고 대외적인 위신을 높이기 위해 당시 한반도 국가들과 야마토와의 관계를 매우 왜곡되게 기술하였다.

그 때문에, 야마토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신라에 대해 신공왕후의 삼한 정벌 전설을 비롯 백제·가야 심지어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국가들은 시종일관 야마토에 조공을 바치거나, 원조를 요청해 오는 종속국으로 그려 놓았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야마토가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으나, 백강구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하였다. 이후에 신라와 일본 양국은 사신을 주고 받는 등 외교적 관계를 회복하였으나, 일본은 신라를 자주 업신어기려 들었다. 일본서기는 고마로 쟁장 사건과 같은 역사 조작을 통하여 반신라 감정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일본 내 반한 감정은 다시 점화되었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김시민 등의 조선 장수에게 당한 패배에 대한 반발 심리를 기반으로 만든 가부키 공연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1609년 조선과 일본이 외교관계를 회복한 이후, 12차례의 조선통신사에도 막부의 요청에 따라 파견되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일본 내 지식인을 중심으로 국수적 풍조가 유행하게 되었고, 곧 조선통신사 초청 반대 움직임으로도 이어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통신사 요청에 따른 비용 문제가 대두되어 1810년을 마지막으로 일본은 통신사를 요청하지 않게 되었다.

근대 일본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이 근대국가로 발돋움하자,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탈아입구(脫亞入欧) 사상에 따라 그때까지 대등한 이웃나라였던 조선과 중국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은 서양인에 대한 열등감이 변질된 우월의식과 멸시감으로 변질되었다. 메이지 신정부의 국서에 대해 전통적 의례절차를 들어 이를 거부했던 조선에 대해 일찍이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정한론을 제기한 바 있으나, 정부의 주류는 일본의 국력이 아직 모자라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청일전쟁러일전쟁으로 동아시아의 전통적 패권국인 중국과 서구 강국인 러시아를 물리쳤다는 자부심에 넘친 일본은 기존의 서양 모방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야마토 민족의 우수함을 선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등한 조선인과 중국인 상을 조작하여 부각하는데 열심이었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대한제국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무단 통치가 실시되었다. 일본인은 한국의 문화를 야만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근대화를 명분으로 탄압을 자행하였다. 3·1 운동에서 한국인의 강한 저항에 부딪힌 일본은 문화 통치를 실시하여 탄압 대신 왜곡된 한국관을 심으려 하였다. 그리고 이를 내세워 한국인의 정체성, 역사, 문화를 철저히 없애고자 하였다.

일본인의 재일 조선인에 대한 반한 감정은 간토 대지진 이후 일어난 관동 대학살 사건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당시 재난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의 내각은 돌파구가 필요했고, 그 결과 한국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조작해 반한 감정을 들끓게 하여 대중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하였다. 이 사건으로 6,000명 이상의 한국인이 학살되었다.

현대 일본

1980년대 중반부터 대한민국에 대한 비판은 진보진영 주도하의 군사독재에 대한 비판에서, 우파 진영에 의한 민족주의적 비판으로 바뀌었다.

또한 이 시기에 등장한 자유주의 사관(自由主義史観)은 그때까지 일본내에서 주류적인 역사관이었던 “한국은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자이며, 피해자”라고 보는 풍조에 대한 반발을 보였으며, 한국에 대한 강한 반감·경멸심을 가지는 일본인을 증가시키는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한국인의 반일 감정도 동반 상승시키는 효과도 가져다 주었다. 즉 혐한과 반일이 상호 영향을 주는 관계가 된 것이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일본인 납치 사건을 통하여 많은 일본인들은 한일관계에서 한민족은 피해자이고, 일본인은 가해자라는 종래의 인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민족을 가해자, 일본인을 피해자로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납치 피해자 중 요코타 메구미가 언론에 집중적으로 부각되어 일본인들의 공분을 자아내게 했고, 이후 종래의 수세적인 입장에서의 혐한에서 공격적인 혐한으로 전환되었다.

최근에는 오랫동안 진전이 없던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하여 일본내 우익 단체를 중심으로 혐한 분위기를 이끌어 내려는 시도가 잦아지고 있으며, 일부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역사 왜곡 문제가 대두되어 대한민국을 위시한 주변 국가들을 폄훼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일본에서 “혐한”이라고 하는 감정과 행동은 그 말과 함께 인터넷의 보급을 계기로 크게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오프라인 미디어에서는 제한적으로밖에 접할 수 없었던 대한민국·한국인·한국 문화에 대한 혐오감을 담은 정보를 인터넷과 익명성이라는 도구와 조건을 통해 자유롭게 가공하고 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익명성을 특징으로 하는 일본 최대의 사이트인 2채널은 그런 정보들을 대량 생산·유통시키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일본인의 혐한 배설구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한류 열풍이 일어나자 이에 반발하는 시각이 생겨났으며, 한류를 깎아내리려는 언론의 시도가 간혹 있었다. 이러한 한류 열풍 속에서 일어난 행위를 의문시하거나 비판하는 일본내 지식인·탤런트가 있기도 하다. 혐한류와 같은 만화에서도 반한 감정이 드러나기도 한다. 일본의 혐한들은 유튜브에서 한국을 모욕하는 비디오를 제작해 타국에 반한 감정을 퍼뜨리거나 한국의 특정한 선수를 지목해 왜곡 동영상을 퍼트리고 있다.

중국에서의 반한 감정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에서의 반한 감정은 대체적으로 1990년대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이후에 심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중국의 반한 감정은 스포츠나 문화 분야의 이해 갈등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공한증은 중국 내 반한 감정에 도화선이 되었다. 2002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2002년 FIFA 월드컵 4강에 진출하자 아무런 관련이 없었음에도 관영 CCTV에서 공개적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4강은 심판의 도움이라고 폄훼하였으며, 이에 따른 반한감정이 잠시 득세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이 개최한 2008년 하계 올림픽의 개막 행사는 언론에게만 비공식적으로 공개하였는데, 대한민국의 SBS(서울방송)가 이를 뉴스에 미리 보도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내 반한 감정이 들끓기도 하였다.

2005년 대한민국이 강릉 단오제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시키는 것을 계기로 중국에서는 이를 자문화에 대한 침탈로 간주하면서 반한(反韓)감정이 들끓게 되었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에서는 강릉 단오제 자체만을 등재 하였을 뿐 단오 자체를 한국의 세계무형유산으로 등록시킨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중화권내 언론사의 보도와 근거없는 한국 원조론이 국내 여론에 널리 퍼지면서 반한 감정이 매우 격화되었다.

중화민국

중화민국의 반한 감정은 1960년대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이 말은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이 단교하였기 때문에 반한 감정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국에 대한 루머는 반한 감정의 원인 중 하나이다. 공자가 한국인이라는 루머와 한국이 강릉 단오제를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하면서 한국이 단오절을 자신들의 명절이라고 세계에 알리고 있다는 오해와 함께 타이완에 반한 감정이 널리 퍼졌다.

대만과 한국은 경제 모델 자체가 다르다. 비교기준 자체가 다름에도 대만은 한국을 경제적인 라이벌로 생각해왔다. 그 결과 양국 간의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가 한국에 대한 열등감을 불러 일으켜 반한 감정에 영향을 미쳤다.

중화민국은 선거철마다 한국에 대한 근거없는 비난을 하며 한국을 따라 잡을 것이라 선거 운동을 한다. 이러한 선거 풍토가 반한 감정에 더욱 불을 붙였다.

또한 2010년 아시안 게임에서 중화민국태권도 선수인 양수쥔이 한국계 필리핀인 심판에 의해 실격패를 당하자 근거도 없이 한국의 책임이라며 반한 시위가 발생하였다. 마잉주(馬英九) 총통까지 나서서 AG주최 측에 비난을 했다. 이를 통해 반한 감정이 매우 격화되었다.[2]

미국에서의 반한 감정

미국내의 반한 감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 개발 논란에서 비롯되었다. 2002년 1월 29일, 미국의 대통령 조지 워커 부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이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인종 차별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에서 미국 흑인들이 한인을 습격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기타 국가에서의 반한 감정

그 밖의 국가들의 경우 한국과 역사적인 이유나 정치적인 이유로 마찰을 빚은 경우가 적기 때문에 대한민국만을 특정하여 반한 감정을 갖는 경우는 드물며, 대부분 백인 우월주의에 의해 아시아인 또는 동양인에 대한 차별의 범주에 한국인도 함께 엮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남아시아권에서는 한국인 사업주들이 한국에 취업한 자국 국민들에게 불법체류자라는 것을 빌미로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일을 시키거나, 급여를 횡령하는 등의 횡포로 인한 반한 감정이 나타나기도 한다.

러시아의 경우에서도 큰 상황은 아니기는 하나, 한국 전쟁등으로 인한 감정이 조금은 남아있는 정도이다.

반한 감정에서 비롯된 멸칭

중국

일본

  • (チョン)
  • 조센징 (조센진) (朝鮮人) - 의미 자체로 비하 명칭은 아니나 한국인에 대한 비칭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 도진 (土人) - 토인, 토착민, 미개인이라는 뜻으로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본에 의해 침략을 당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조선)의 후진성을 비꼬는 욕설이다.
  • 도쿠아진 (特亞人) - 한국인과 중국인을 뭉뚱그려 지칭하는 욕설이다.

참고자료 및 문헌

  1. 日本 네티즌 世界에 나타난 對韓觀 硏究 세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일본어교육전공 교육학석사학위논문 정용목 2006
  2. "너네 잘못이야" 태권도 반한감정, 우리 국민들 '뿔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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