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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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anna (토론 | 기여)님의 2014년 2월 18일 (화) 13:06 판 (→‎참고자료: 사형이 아니라 유배지에서 노사했음. 노론 추가)

민정중(閔鼎重, 1628년 ~ 1692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여흥으로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이다. 민유중의 형으로 인현왕후의 백부이다. 당색은 서인(西人)이다. 산림 학자들의 중용과 민회빈 강씨의 복권 등의 여론을 주도하였다.

남인 온건파 영수 허적은 외외종숙으로[1], 이때문에 윤휴, 허목 등을 적극 추천하여 정계입문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송 논쟁을 거치면서 남인에게도 열린 자세를 견지했던 그의 포용력은 사라졌고, 경신대출척을 전후하여 남인을 척결하는데 앞장 선다. 흥선대원군의 외할아버지 민경혁은 그의 4대손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다.

생애

생애 초반

관찰사를 지낸 민광훈과 부인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학자 민시중이고 동생은 후일 인현왕후의 아버지가 되는 국구 민유중이었다. 아버지 민광훈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동생 민유중과 함께 송준길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관료생활 초반

1649년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으로 벼슬을 시작해 예조좌랑,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 사간원정언·사간, 홍문관수찬·교리·응교, 사헌부집의, 동래부사,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1652년(효종 3년) 봄 부교리로 있을 때 상소하여 인재를 발굴하여 등용할 것을 적극 건의한다.

현재 윤휴·윤선거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유학(儒學)으로 당대의 촉망을 받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특명으로 백의(白衣)를 소견하시기를 고사(古事)처럼 하시어 제각기 갖고 있는 생각을 진달하게 하여 그들의 재주가 쓸만하면 채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돌려보내는 것이 가합니다. 윤휴와 윤선거는 모두 세신(世臣)인데, 만약 그들의 인품을 논한다면 윤휴는 재주와 식견이 탁월하고 윤선거는 국량이 견고하고 확실합니다.[2]

그의 주청으로 윤휴, 윤선거 등의 학자들이 당색을 초월하여 조정에 등용되었다. 또, 송시열송준길이 조정에 뜻을 두지 않고 관작을 사퇴하려 했을 때도 여러번 만류하거나 그들을 불러들이게 한다. 남인 온건파 영수 허적은 외외종숙이었던 탓에 야당인 남인에 속한 윤휴, 허목 등을 적극 추천하여 정계입문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송논쟁으로 스승인 송시열송준길남인의 힐난을 받자 남인과 영구히 절연하고 남인을 정계에서 제거하는데 앞장 선다.

관료 생활

1659년 새로 즉위한 현종에게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에 대해 상소를 올렸고 병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아버지 민광훈의 상을 치르고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으며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이조참판·함경도관찰사·홍문관부제학·사헌부대사헌을 거쳐, 1670년(현종 11) 이조·호조·공조의 판서, 한성부윤(漢城府尹)·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등을 역임하였다.

거듭된 유배와 사망

1675년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남인이 집권하면서 1679년 장흥(長興)으로 귀양갔다. 1년 뒤, 경신환국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으며 1685년부터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판사(判事)직에 있었다. 이때 윤증박세채남인과 화해하려면 남인을 먼저 용서하고 한직에는 등용하자고 그에게 권고하였으나 스승인 송시열이나 서인의 영수 김수항 등이 반대하므로 입장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득세하자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득세하자 신원, 관직을 회복하였다.

사후

현종의 묘정(廟庭)과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충주 누암서원(樓巖書院), 장흥 연곡서원(淵谷書院), 함흥 운전서원(雲田書院), 벽동 구봉서원(九峯書院), 정평 망덕서원(望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 및 글씨

  • 저서
    • 《노봉집》
    • 《노봉연중설화 老峯筵中說話》
    • 《임진유문(壬辰遺聞)》
  • 글씨
    • 〈우상이완비 右相李浣碑〉
    • 〈개성부유수민심언표 開城副留守閔審言表〉
    • 〈개심사대웅전편액 開心寺大雄殿扁額〉

가족관계

(처족)

관련 작품

드라마

주석

  1. 외할머니의 조카로 어머니의 외종형제이다.
  2. 효종실록 8권, 효종 3년(1652년) 4월 26일자 기사
  3. 한성우의 장인
  4. 계실 남양홍씨의 소생이다.
  5. 민회빈 강씨의 오빠로 장인 신승의 고모부이다.
  6. 민회빈 강씨의 오빠로 전실 신씨의 고모부이자 신승의 자형 혹은 매제이다. 강문성강문두는 형제이지만 강문성신흠의 딸과 혼인하고 강문두가 신흠의 손녀와 혼인함으로서 처계로는 3촌 처고모부와 처질서 사이가 되었다.
  7. 전실 신씨의 고모가 김좌명(명성왕후의 백부)에게 출가하여 낳은 아들인 내종오빠(4촌)이다. 김석주의 아들로 신씨에겐 내종질이 되는 김도연숙정공주의 사위이다.
  8. 전실 신씨의 고모부이다. 홍명하의 아들 홍택보김수흥의 사위이다.
  9. 전실 신씨의 내종조부로 신승의 고종형(내종형)이다.
  10. 전실 신씨의 종고모부로 신승의 고모 부부의 사위이며 인렬왕후의 이질이자 소현세자의 이종아우이다.
  11. 장인 신승의 숙부로, 장렬왕후의 형부이자 인조의 윗동서이다. 신익전의 딸이 인조의 서장자 숭선군과 혼인하여 동평군을 낳았고, 신익전의 아들 신정이 낳은 신석화는 민정중의 질서(조카사위)로 민유중의 셋째사위이다.
  12. 신승의 고종형제이다. 조사석의 종손녀(둘째형 조구석의 손녀)는 민정중의 종손녀(형 민시중의 손자)와 혼인하고, 조사석의 종손자인 조규빈(둘째형 조희석의 손자)은 민정중의 종손녀(민유중의 손녀. 민진후의 장녀)와 혼인하였다.
  13. 재취부인인 홍씨의 사촌형부로, 한성우의 장인인 홍처윤은 홍씨의 숙부이다. 또한, 한성우의 처남 홍수헌인현왕후의 형부 이만창의 자형이자 명안공주의 시동생 오이주의 동서이다. 인현왕후의 정적인 희빈 장씨가 후궁으로 임명되자 한성우송 인종의 고사를 들어 즉시 폐출할 것을 요구한 상소에 그제껏 관원(모두 인현왕후와 영빈 김씨의 친인척)의 장씨에 대한 모든 공격에 대해 무시로 일관해왔던 숙종이 궁인(인현왕후영빈 김씨)이 왕족(숙안공주 등)과 체결하고 사대부(한성우, 김창협 등)와 결탁하여 아첨과 날조를 일삼는 작태를 최초로 공개 비판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오태주를 비롯한 의빈의 정치간여가 엄금되었다. 출처: 조선왕조실록 숙종 17권,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4일(갑자) 2번째 기사~4번째 기사, 6번째~7번째 기사
  14. 김만기·김만중 형제의 아버지로 숙종의 초비 인원왕후의 조부이다. 민정중의 두 번째 장인인 홍처윤의 누이가 선조인빈 김씨의 외손자인 윤지(정혜옹주의 장자)와 혼인하여 낳은 딸이 김익겸에게 출가하여 김만기김만중을 낳았다.

관련 항목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