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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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케 몽골 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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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년~1264년
 

 

 

칭기스 칸 붕어 직후인 1227년의 지도.
칭기스 칸 붕어 직후인 1227년의 지도.
수도카라코룸
정치
정치체제선거군주제
카간(대칸)
1206년 ~ 1227년
1229년 ~ 1241년
1246년 ~ 1248년
1251년 ~ 1259년
1260년 ~ 1294년

징기스 칸
오고타이 칸
구유크 칸
몽케 칸
쿠빌라이 칸
입법부쿠릴타이
역사
 • 징기스 칸 초원 통일
 • 징기스 칸 붕어
 • 팍스 몽골리카
 • 제국 4분할
1206년
1227년
1210년 ~ 1350년
1260년 ~ 1264년
경제
통화은화, 지폐 등
종교
종교텐구리교, 불교, 유교, 이슬람교, 경교 등 공존
이전 국가
다음 국가
카마그 몽골
타타르 연맹
화레즘 샤 왕조
서요
금나라
남송
서하
키예프 공국
볼가 불가르
쿠만-킵차크 연합
알라니아 왕국
대리국
키메크 칸국
차가타이 칸국
킵차크 칸국
일 칸국
원 제국

몽골 제국(ᠶᠡᠬ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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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케 몽골 울스, 한국 한자: 大蒙古國 대몽고국)는 칭기즈 칸1206년에 세운 제국이며,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제국 중 하나이다.

역사

칭기즈 칸의 치세

1206년 테무진몽골 지방의 동부를 흐르는 아무르 강의 지류인 오논 강변에서 부족연합의 군장인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면서 통일제국의 성립을 보았다.

통일 이전 칭기즈 칸은 바이칼 호의 남쪽과 동남쪽의 초원지대에서 패권을 다투던 여러 부족장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으나 몽골 제국의 건국과 함께 그의 권위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의 호전적인 성격이 주변 여러 부족들을 향한 정복전쟁으로 이어졌다.

최초의 공격목표는 중국


1219년부터는 서아시아에 원정해 호라즘 왕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한편, 카프카스를 함락해 남러시아의 스텝 지대를 빼앗고 1225년 귀환했다. 아시아 내륙지방을 중심으로 몽골 제국의 판도를 현저히 확대시킨 칭기즈 칸은 다시 서하를 정벌하던 중 1227년 진중에서 병사했다. 칭기즈 칸 사후 당시 몽골 제국의 판도는 서쪽으로는 카스피 해에서 동쪽으로는 동중국해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파미르·티베트 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중앙평야에 접해 있었다. 또한 제국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민족과 문화를 포함하고 있었다.

오고타이(몽골식 발음) 칸의 치세

칭기즈 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窩闊台) 칸(영어로 '우구데이'라고도 한다)은 금나라의 잔존 세력과 대규모의 전쟁을 재개하여 금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1236년에는 서방을 향한 새로운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그것은 러시아와 중앙유럽의 점령을 위한 시도였는데, 볼가·부르갈인들의 제국은 1~2년 만에 멸망했으며, 그 승리는 러시아 본토로 향하는 길을 연 셈이었다. 그무렵 러시아 중부와 북부는 도시국가와 독립제후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은 몽골군에 차례로 함락되어갔다.

발트 해까지 진격했던 몽골군이 겨울 추위로 인해 진격을 멈춤에 따라 러시아의 무역도시인 노브고로트를 비롯한 몇몇 도시가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몽골군은 더 나아가 폴란드의 일부를 토벌했으며 전위부대는 슐레지엔 지방에까지 손을 뻗쳤다. 독일과 폴란드의 기사 연합군은 슐레지엔의 헨리크 2세공의 지휘 아래 레그니차 근처 발슈타트에서 수부타이의 몽골군에게 1242년 4월 9일 궤멸에 가까운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몽골군은 독일 중앙부를 침입하는 대신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헝가리에서 작전중인 부대에 합류했고, 1241년 4월 헝가리군을 사조 강 유역에서 완파한 몽골군은 헝가리에서의 몽골 지배의 기초를 구축했다. 이로써 헝가리는 국토가 황폐화되고, 대다수의 주민들이 죽임을 당했다.(→헝가리의 역사, 헝가리의 대외 관계)

한편 그에 앞서 몽골군은 이란·그루지아·아르메니아에서 장기간에 걸친 작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유럽과 서아시아에서의 몽골의 진격은 1241년 12월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중지되었다.

구유크 칸의 치세

오고타이의 사후, 새로운 칸의 선출은 의견일치를 얻기 어려웠다. 당분간 섭정을 하던 오고타이의 부인은 아들 구유크가 칸위에 오르기를 희망했으나, 칭기즈 칸의 장손으로서 자신이 적임자라고 자부하고 있던 바투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1246년 오고타이의 아들 구유크는 칸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으나 3년 만에 죽었고, 다시 그 어머니에 의한 섭정이 계속되었다.

몽케 칸의 치세

이처럼 칸위의 공백기가 계속된 것은 오고타이 일가와 툴루이 일가와의 대립이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툴루이 측의 승리로 돌아갔고, 툴루이의 큰아들 몽케가 제4대 칸이 되었다. 그 후 몽골 제국에서 원나라(元)에 이르기까지 칸위는 툴루이 자손에 의해 독점되었다.

몽케는 이미 서정(西征)에 참여하여 명성을 얻었고 전장에서도 공적을 쌓았다. 몽케는 1252년 훌라구로 하여금 아바스 왕조를 멸하게 하고 이라크·이란 방면을 영토에 편입시켰으며, 1257년 남송 정벌을 노렸으나 1259년에 죽었다. 그리고 그의 동생인 쿠빌라이가 뒤를 이었고, 쿠빌라이남송을 정벌하고, 고려를 제후국으로 편입시켰다.

제국의 분열과 원나라

몽케칸이 죽자, 수도 카라코룸에서 몽케칸의 부재 중 대리로 일을 맡고 있던 막내동생인 아리크 부케는, 그의 부하와 오고타이계 제왕(諸王)의 지지를 얻어 대칸위에 오르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시적인 화평조치를 취하고 급히 귀환하여, 그의 심복들로 구성된 쿠릴타이의 추대를 받아 제5대 대칸에 올랐다. 그 후 아리크부카의 반란을 진압하고 71년 국호를 (元)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쿠빌라이에게 불만을 품은 일파는 오고타이의 손자인 하이두를 칸으로 추대하여 쿠빌라이칸과 대립함으로써 이때부터 30년에 걸친 국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을 계기로 킵차크 칸국차가타이 칸국은 하이두의 편에 서고, 일 칸국은 쿠빌라이측에 가담함으로써 몽골 제국은 사실상 분열되었다.

결국 쿠빌라이 칸의 일파가 승리하였지만(1303년), 이 때에는 이미 쿠빌라이나 하이두가 모두 죽은 뒤였다. 그러나 그 후 원조와 대립하였던 여러 한국도 점차 개화됨으로써 원나라와 화의를 맺게 되어, 몽골제국의 상호 연대성이 부활되었다.

제국의 소멸

원나라는 몽골 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종주국(宗主國)이 되었고, 1310년 멸망한 오고타이 한국을 제외한 다른 킵차크·차가타이· 등 3한국이 서로 연합함으로써 그로부터 거의 60년간 유라시아 대륙은 이른바 ‘타타르의 평화’(팍스 몽골리카)를 누리게 되었다. 또 아시아와 유럽 세계 사이의 동서 문화 교류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이때의 몽골 제국은 몽케칸의 치세(治世)까지 몽골고원의 대칸의 권력과 혈연적 연관에 의해 보존하고 있던 통일성을 잃고, 다만 원나라를 종주국으로 하여 그 정권 밖에서 독립국을 형성한 3한국으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그러나 이 체제는 원나라의 패주(1368년)와 함께 붕괴하였다.

사회 제도

몽골 제국은 흉노 이래의 몽골리안 유목국가의 전통을 따라 지배하던 유목민을 병정일치의 사회 제도로 편성하였다. 몽골에 있어 유목집단의 기본 단위는 천호(千戸)라고도 불린 천명 부대라고 할 수 있는데, 1000인 정도의 병사를 차출할 수 있는 유목집단을 다스리는 장군이나 부족장을 그 수장, 즉 천호장(千戸長, 천인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천호 가운데 100인 정도의 병사를 차출할 수 있는 백호(백인 부대), 백호 안에는 10인 정도의 병사를 차출할 수 있는 십호(십인 부대)가 설치되어, 각각의 장에는 그 소속 천호장의 근친 가운데 유력한 자가 지명되어 십호 이상의 유목 전사가 몽골 제국의 지배층이었던 유목 귀족(노얀)을 형성하였다. 천호 가운데 가장 유력한 자는 다수의 천호를 거느린 만호(萬戶, 만인 대장)가 되어, 전시에는 군사령관직을 지냈다.

칭기즈 칸과 그 형제의 자손은 「황금씨족」(알탄 우룩)이라 불리며, 영지 백성(우르스)으로 나뉜 천호・백호・십호 집단의 위에 상급 영주 계급으로써 군림했고, 몽골 황제 즉 대칸은 크고 작은 우르스의 가장 큰 부분을 가진 맹주였다. 대칸이나 왕족들의 막영(幕営)은 오르도라 하여, 유력한 후비(后妃)마다 오르도를 갖고 있었다. 각각의 오르도에는 게린 코우(게르 백성)라 불리는 영민(領民)이 있었는데 그 관리는 오르도의 수장인 황후가 관리하였다.

행정 제도

몽골 제국과 지배 땅

몽골 황제(대칸)의 궁정에는 케시크라는 측근 관료가 있었는데, 이들은 황제의 친위대를 맡는 동시에 케시크테이라 불리는 가정기관을 형성하였다. 케시크는 코르치(화살통지기), 우르두치(큰칼잡이), 시바우치(매부리), 비치크치(서기), 바르가치(문지기), 바울치(요리사), 다라치(술 담당), 우라치(수레몰이), 모리치(말치기), 스쿨치(옷 담당), 테메치(낙타치기), 코니치(양치기) 등 다양한 직제로 나뉘어 노얀(귀족)의 자녀와 대칸에게 개인적으로 기용된 자들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가정제도는 다른 주치 가문이나 툴루이 가문에도 존재하였으며, 이들 직종을 맡았던 케시크들은 각 왕가의 당주격인 칸을 가까이서 섬기며 우르스의 여러 일들을 맡았다.

몽골 제국은 유목민 연합 국가였지만 중앙정부와 점령지 통치 기관은 황제 직할지배 아래 두는 것으로 이들은 케시크 출신에 의해 형성된. 중앙에서는 케시크 내의 몽골 귀족이 임명한 쟈르구치(단사관)이 놓여 행정 실무와 소송을 담당했다. 그 정점에 서는 것이 대단사관(예케・쟈루그치)으로 최초의 대단사관은 칭기즈 칸의 아내 보르테의 양자가 되었던 시기 쿠툭이 맡았다. 지방에서는 대부분이 몽골인으로 임명되는 다루가치(감독관)이 도시마다 놓여 점령지 통치를 관장했다.

그리고 실무에서 쟈르구치나 다루가치를 도와 말단 문서 및 재무 행정을 맡아보는 중요한 직책이 비치크치(서기)였다. 비치크치는 현지 점령지의 언어에 통달한 자로 한족이나 서하, 거란, 여진, 고려 등은 한인, 위구르인, 무슬림(이슬람교도) 등의 색목인 출신자가 다수 참가하였다.

몽골 황제인 칸을 섬기는 비치크치들은 케시크의 일원으로서 군주의 측근에서 피지배자에게 내리는 명령인 칙지(쟐리그)를 기록하고 번역하여 문서로 발급하였다. 중앙에서 나온 명령은 쟈무치라 불리는 역참제도에 따라 하루에 100km 이상의 속도로 제국의 간선로를 따라 신속하게 제국 구석구석에 미칠 수 있었다.

이어 몽골 제국은 황제뿐 아니라왕족과 귀족, 황후의 오르도에도 케시크에 준하는 조직이 있어서 그 장교와 영민, 출입하는 상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속해 있었다. 그들의 소(小)궁정에도 황제와 같은 행정기관이 생겨나고, 우게(말)라 불리는 명령을 내릴 권력을 지녔다. 14세기 초까지 왕족들은 자신의 영지로 분할된 정주지대의 도시나 농촌에 자신의 궁정에서 다루가치와 징세관을 보내 그 지방의 행정에 관여하고 있었다.

군사 제도

13세기 초의 유라시아 대륙 지도

몽골 제국의 군대는 십진법 단위로 편성된 만호(토우만)・천호(민한)・백호(쟈간)・십호(아르반)을 토대로 형성되었다. 천호는 유목민의 사회 단위이기도 했는데, 일상에서 각 부대는 장의 장막(게르)를 중심으로 부하 게르가 모여서 둥근 모양의 진을 짠 쿠리엔이라는 사회 형태로 유목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함께 유목생활을 하고 때로는 집단으로 사냥 시합을 하여 단결과 규율을 강화하였다.

원정이 결정되면 천호 단위로 일정한 병사 수 공출이 배정되고, 각 병사는 본인 부담으로 말과 무기, 식량, 군수물자 및 일용품 일체를 자비로 준비했다. 군단은 엄격한 상하관계에 따라 병사는 소속 십호장에게, 십호장은 소속 백호장에게, 백호장은 소속 천호장에게 절대적 복종이 요구되었고, 천호장 또한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칸이나 왕족, 만호의 지배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었다. 군율 위반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처벌했고, 가죽 부대에 넣어져 말이 그 위에서 죽을 때까지 뛰어다니게 한다거나 산채로 가마솥에 삶겨지기도 했다(반역한 여러 무장이 참수되는 사례도 있는 등 일률적인 처형법은 채택되지 않았다).

이렇듯 몽골군 주력은 본래 유목민으로 유목 생활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고 방목에 적합하지 않은 남쪽의 다습한 지대나 서아시아의 사막, 수상 전투에서는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러시아나 아나톨리아, 이라크, 이란, 중앙아시아, 킵차크 초원, 중국 등 피지배 정착민들을 적절하게 징모하는 비율이 그만큼 늘어났다. 이들 피지배 민족의 군대는 동아시아의 원의 경우는 세습 농지와 면세 특권을 받은 군호에 속한 자들로 징모됐다. 그 군제는 유목민들에 의해 천호제 구조를 정착민에 맞춘 것으로 군호은 백호소, 천호소로 불리는 집단 단위로 만들어져 한 지방에 존재하는 천호소는 만호부에 총괄되었다. 병사의 군역은 군호 몇 가구마다 1명이 배정돼 병사를 내지 않은 호에서 아우루크(奥魯, 후방대)가 되어 그 무기와 식량을 충당했다.

편성

원군은 우익(바르운 갈)・중군(코르)・좌익(쥬운 갈)의 3군단으로 나뉘어 중군 가운데서도 각각의 우익과 좌익이 존재했다. 이는 몽골의 평소 유목 형태를 기본으로 한 것이었고 중앙의 칸이 남쪽을 향한 상태에서 서부의 유목집단을 우익, 동부의 유목집단을 좌익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각자의 군단은 아르긴치(선봉대), 코르(중군), 아우루크(후방 보급대)의 세 부대로 나뉘었다.

선봉대는 기동력이 뛰어난 경기병 중심으로 편성되며 전선에서 조우한 적군의 분쇄를 목적으로 한다. 중군은 선봉대가 전력을 무력화한 뒤 전투 지역에 들어가 거점의 제압과 잔존 세력의 소탕, 그리고 전리품 약탈을 맡았다. 전군의 끝에는 후방대가 가축 방목을 하면서 천천히 뒤를 이어 전선을 뒤에서 밀었다. 후방대는 사병들의 가족 등 비전투원을 거느리고 정복이 진행되면 제압이 완료된 지역 후방 거점에 대기하고 몽골 본토에 있던 때와 거의 변하지 않는 유목 생활을 보낸다. 전선의 부대는 일정한 군사 활동이 된다고 일단 후방대의 대기 후방에서 보급 받을 수 있었다. 부대 사이에는 기마의 전령이 오가고 왕족, 귀족이라도 전령을 만나면 길을 양보하도록 규정됐다.

병사들은 모두 기마병이며 속도가 빠르고 사정거리가 긴 복합궁을 주무기로 했다. 유목민은 어렸을 때부터 말 위에서 활을 쏘는 데에 익숙하여 강력한 궁기병이 되었다. 병사는 원정에서 1인당 7, 8마리의 말을 데리고 자주 갈아타는 방법으로 경이적인 행군 속도를 자랑하였으며, 경기병이라면 하루 70km를 주파할 수 있었다(중세 유럽의 보병의 행군 속도는 하루 20km). 또 쇠약해진 말을 잡아 식량(고기, 내장, 피), 무기(뼈, 힘줄), 의류(모피)로 철저히 이용하는 등 편성과 식량 조달에 오랜 시간을 할애할 걱정이 적었다.

관련 항목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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