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나헴 베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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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나헴 베긴
מנחם בגין
메나헴 볼포비치 베긴
Менахем Вольфович Бегин
이스라엘제7대 총리
임기 1977년 6월 20일~1983년 10월 10일
대통령 이츠하크 나본
전임: 이츠하크 라빈(제6대)
후임: 이츠하크 샤미르(제8대)

신상정보
출생일 1913년 8월 16일
출생지 러시아 제국 브레스트
사망일 1992년 3월 9일(1992-03-09) (향년 78세)
사망지 이스라엘 텔아비브
정당 리쿠드
배우자 알리자 아르놀드(1939-1982;사망)
종교 유대교
서명

메나헴 베긴(히브리어: מְנַחֵם בְּגִין, 폴란드어: Mieczysław Biegun 미에치스와프 비에군[*], 러시아어: Менахем Вольфович Бегин 메나헴 볼포비치 베긴[*], 1913년 8월 16일~1992년 3월 9일)은 이스라엘의 정치인이다. 1949년부터 1984년까지 크네세트(이스라엘 국회)에 근무하였으며, 자유당 당수·무임소 장관 등을 거쳐 보수 정당 리쿠드의 당수로서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1981년 베긴 정부는 시리아와 국경 지역에 있는 골란고원에 대한 법률상, 정치적인 권위를 요청하였으나 시리아와 다른 나라들은 이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집트와의 관계가 개선됨에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다른 아랍 국가들 사이는 적대 관계가 계속되었다.

1978년 9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개로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체결한 중동 평화 협상인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잘 알려졌다. 이 공로로 베긴은 사다트와 함께 197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초기 생애[편집]

현재 벨라루스에 속하는 폴란드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태어났다. 2차례의 세계 대전 동안에 지방의 공식적 규칙은 가끔 유동의 지위에 있었다.

시오니즘 운동[편집]

내무인민위원회에 의하여 체포된 베긴의 얼굴 사진

베긴은 목재 상인과 독실한 시온주의자 하시아와 제예프 도프 베긴의 3명의 자식들 중 막내였다. 시오니즘 운동에서 그의 초기 학교 생활은 10세에 자신의 첫 연설을 만드는 데 그를 몰아냈다. 10대로서 시온주의 수정론자의 청소년 운동 단체 베타르에 가입하고,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한 후 25세에 그 우두머리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에 그는 바르샤바로 달아나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데 비자를 얻었다. 그러나 자신이 더욱 어려움을 가지리라 생각된 친구에게 비자를 주었다. 부인 알리자는 팔레스타인으로 계속 나갔으나 베긴은 소련군에 의하여 체포되고 시온주의자와 아마 간첩으로서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는 1941년 1.5 백만명의 폴란드인들을 해방시킨 소련폴란드 망명 정부 사이의 협정에 의하여 석방되었다. 부친은 나치스에 의하여 살해되었으나 베긴은 자신의 누나를 배치시킬 수 있었고, 거기서 자신을 팔레스타인으로 데려간 폴란드 자유 육군에 입대하였다. 거기서 한번 그는 통역으로서 영국 육군에 의하여 징집되어 BBC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영어를 배웠다.

그러나 1943년 후에 그는 이르군 지하 운동의 사령관이 되어 요르단강의 양쪽에 유대인들의 고국을 설립하기로 결심하였다.

부인 알리자와 아들 베냐민과 함께 (1946년)

정치 생활[편집]

1948년 8월의 베긴

투쟁 단체의 목적은 자신들의 독립을 얻는 것이었고, 가끔 아랍인들로부터 무기와 폭발물들을 매입하였다. 이 일은 영국의 권위자들이 "험상스러운 얼굴에 안경을 쓴 베긴"에 5만 달러의 장려금을 놓는 데 이끌었다. 1948년 베긴은 자신의 단체를 국회의원 선거에서 거의 마지막 자리를 보유한 자유당(헤루트)으로 변형시켰다. 그러나 1956년 이집트와 전쟁에 의하여 베긴의 당은 2위였다.

1967년으로 봐서 베긴은 국립 연합당에 입당하여 리쿠드 연합의 합동 의장이 되었다.

총리 재임[편집]

앤드루스 공군 기지에 도착한 베긴 총리와 모셰 다얀
캠프데이비드 협정 조인식에서 (좌로부터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베긴 총리) (1978년)

리쿠드당이 1977년 5월 선거를 이길 때 베긴은 정부를 형성하였다. 그는 영유된 영토들의 유지를 위하여 완고하였다.

자신의 총리직을 투쟁 자세와 시작하였어도 베긴은 모셰 다얀 같은 야당인들을 자신의 내각으로 임명한 것을 포함하여 타협으로 배웠다. 당시 그는 이집트와 화평을 위하여 시나이반도와 다른 유대인 정착지들을 포기하여 성서에 나온 이스라엘과 시나이 같은 그 외부 안에 있는 영토들 사이에 수훈을 만들었다.

베긴은 아마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에 의하여 중개된 캠프데이비드 협정에서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중동 평화를 협상하기로 가장 잘 알려졌다. 1979년 3월 26일 백악관에서 체결된 조약의 조건들은 1967년 전쟁 이래 영유되어 온 시나이반도를 이집트로 할양을 위한 반환에서 이스라엘이 완전한 외교적 인정을 얻은 것을 포함하였다. 이 공로로 베긴과 사다트는 197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81년 총선에서 베긴은 다른 연정을 형성하였다. 그의 영토적 항복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지만 요르단강 서안 지구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 국가의 설립에 그의 믿음은 의문 밖으로 나갔다. 1982년 6월 레바논 침공은 거기에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군사적 권력을 깨는 데 표면상이 다수의 팔레스타인 시민들의 사망으로 이끌었다. 추가로 그의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의 기본적 목적은 베이루트에 우익 친이스라엘 체제를 놓는 것이었다. 이 일은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세계의 평판으로 전환되었다.

그 일과 자신이 워싱턴 D. C.로 외교적 여행을 떠날 때 그해 11월 자신의 부인의 사망이 1983년 10월 베긴이 총리직에서 물러나는 원인을 가져왔다.

사망과 영예[편집]

고향 브레스트에 있는 베긴의 회고에 새겨진 각판

베긴은 당뇨병심장병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왔다. 추가로 부인의 사망과 레바논 사건들에 죄스러움을 느낀 후, 엄격한 우울증은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그를 조용히 살도록 이끌어 부인의 묘지 방문을 제외하고 드물게 자신의 텔아비브 아파트를 떠났다.

1992년 3월 3일 자신의 회복하지 못한 심근 경색에 걸려 6일 후,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자신의 1명의 아들, 2명의 딸과 8명의 손자, 손녀들에 의하여 살아남았으며, 사후 예루살렘올리브 산 유태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베긴은 2개의 저서들을 펴냈는 데 1944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군에 대항한 분투에 관한 〈폭동〉과 〈하얀 밤:러시아에서 죄인의 이야기〉가 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전임
페레츠 번스타인
제5대 이스라엘의 야당 당수
1955년 11월 3일 ~ 1967년 6월 5일
후임
메이르 야아리
전임
이츠하크메이어레빈
제8대 이스라엘의 야당 당수
1970년 8월 6일 ~ 1977년 6월 20일
후임
시몬 페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