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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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전체 명칭Liverpool Football Club
별칭The Kops
리그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창단1892년 3월 15일
소유주미국 존 헨리
회장미국 톰 워너
감독북아일랜드 브랜든 로저스
경기장안필드
수용 인원45,362명
2014-156위
원정
서드

리버풀 축구 클럽(Liverpool Football Club)은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을 연고로 하는 프리미어리그 축구 클럽이다.

리버풀은 현재 총 18회의 리그 우승을 한 바 있으며, 8번의 리그 컵 우승, 7번의 FA컵우승, 그리고 5번의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한 바 있는데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잉글랜드 내에서는 역대 최다 우승 기록으로 기록되어 있다. 리버풀은 1892년에 창단되었으며, 그 후 비약적인 상승세를 보여 1900 ~ 1947년도까지 5번의 리그 우승을 거두기도 했었다. 하지만 1950년대에는 주로 2부리그에 머물러 있었고 1959년 빌 샹클리가 감독을 맡기 전까지 리버풀은 1부리그 승격을 하지 못했다.

샹클리가 감독을 맡은 지 두 시즌 만에 리버풀은 다시 1부리그로 승격하게 되었고 또다시 리버풀은 세 번의 리그 우승과 두 번의 FA컵 우승과 한번의 UEFA컵 우승을 일궈내게 된다. 과거 30년전의 리버풀은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유럽축구에서 최강의 클럽 중 하나로 군림하였으며 1977 ~ 1984년까지 8시즌 동안 무려 4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 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1990년대에 약간의 침체기가 있었지만 2001년 UEFA컵 우승을 하였으며, 2005년도에는 다섯 번째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해 잉글랜드 축구팀으로는 최초이자 유일한 빅이어 영구소장 팀이 되었다. 특히 1984년과 2001년도에는 세 개의 트로피를 차지한 팀에게 주어지는 트레블의 자격도 있었지만 우승한 대회의 기준에 부합하지 미니 트레블로 불린다.

리버풀의 홈 유니폼 색깔은 원래 레드 앤 화이트였으나 1960년대에는 올 레드로 바뀌었다. 리버풀의 엠블럼은 창단후 변화가 거의 없었지만 1989년 힐즈브러 참사를 기리기 위해 엠블럼의 좌우에 불꽃을 집어넣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리버풀은 현재 45,362명을 수용하는 안필드를 홈 경기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59,000석까지 증축 예정이다. 리버풀은 광대하고 다양한 팬층을 보유하고 있으며, 몇몇 클럽 등과는 오랜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이중에 현재 리버풀의 가장 큰 라이벌이라 볼 수 있는 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노스웨스트 더비)와 이른바 머지사이드 더비라고 불리는 에버턴 등이 있다.

역사

에버턴과 리버풀

안필드 경기장. 리버풀 축구클럽의 홈 구장이다.

리버풀 축구 클럽의 역사는 18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필드 경기장의 임대인이었던, 존 호울딩 (John Houlding)은 1891년 안필드구장의 전지분을 매입하고서는 임대료를 연간 100파운드에서 250파운드로 인상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1] 다음 해인 1892년, 안필드 경기장에는 존 호울딩에 의해 1892년 3월 15일, 새로운 축구 클럽이 리버풀 시에 탄생하게 되며 8년간 안필드 경기장을 임대해 쓰던 에버턴은 바로 구디슨 파크로 구장을 옮겼다.

존 호울딩은 그의 독자적인 축구 클럽을 신설하기로 하였고, 마침내 1892년 3월 15일 리버풀 축구 클럽이 탄생하게 되었다. 구단의 최초의 이름은 "에버턴 F.C & 애슬레틱 그라운즈"(Everton F.C. and Athletic Grounds, Ltd.), 또는 줄여서 에버턴 애슬레틱이었다. 하지만 잉글랜드 축구 협회가 이미 존재하던 에버턴 팀과 이름이 헷갈릴 수 있다고 이 이름을 기각하였다. 그래서 이름이 리버풀 축구 클럽(Liverpool F.C.)이 되었다. W.E. 바클레이존 맥케나가 초대 공동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스코틀랜드 출신의 프로 축구 선수들을 영입하였다.

영광과 오랜 좌절

리버풀은 첫 시즌에는 랭커셔 리그에 머물렀으나 우승을 차지하여, 1893–94 시즌에는 당시 2부 리그(Second Division)로 승격되었다. 전승 무패로 그 시즌에서 우승하였고,[2] 바로 1부리그(First Division)로 승격하였다. 그리고 1901년에는 클럽 사상 최초로 리그 챔피언쉽을 거머쥐게 되었고 1906년에도 또 한 번 우승하였다. 1914년에는 처음으로 FA 컵 결승에 올랐으나, 번리에 1-0으로 지고 말았다. [3]

리버풀은 1921 - 22, 22 - 23 두시즌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 하였지만 그 이후 1947년 5번째 리그 우승을 할 때까지 단 한번도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1950년에는 FA컵 결승전까지 오르게 되지만 아스널에게 패하게 되었다. 이후 리버풀은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며 1954년 다시 2부리그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 [4]

전설 빌 샹클리와 밥 페이즐리 그리고 리버풀의 다이너스티

안필드 밖에 있는 빌 샹클리 동상

1959년 빌 샹클리가 감독을 맡을 때까지 리버풀은 1부리그로 승격하지 못했고 샹클리가 처음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그는 무려 24명이나 되는 기존의 선수들을 모조리 방출시키고 팀을 재정비하게 되었다.[5] 그 결과 1961년, 리버풀은 샹클리 감독이 부임한 지 두 시즌 만에 다시 1부리그로 승격하게 되었다. 2부리그로 강등된 이후 7년 만의 일이었다.

1961 - 62시즌 다시 1부리그로 올라온 빌 생클리의 리버풀은 승격후 3시즌만인 1963 - 64시즌에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리버풀 통산 6번 리그 우승이었으며 1947년 마지막 우승 이후 17년 만의 일이었다. 이듬해 1965년에는 리버풀 통산 첫 FA컵 우승을 차지하였고, 65 - 66시즌에는 다시 한번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고 UEFA 컵 위너스 컵에도 우승을 하면서 처음으로 더블을 일궈냈다. 위너스 컵 우승은 리버풀의 첫 국제대회 우승이기도 했다.

1972 - 73시즌에는 리그 우승과 동시에 첫 UEFA컵 우승을 거머쥐게 되는데 이 UEFA컵 우승은 리버풀의 두 번째 더블이 되었다. 이듬해 74년에는 두 번째 FA컵 우승을 차지하지만 이후 빌 샹클리는 명예롭게 은퇴하게 되었고, 어시스턴트 코치인 밥 파이즐리가 새로운 리버풀의 감독이 되었다.[6]

파이즐리 감독은 전 감독인 빌 샹클리보다 더 성공적으로 팀을 이끌었고, 파이즐리가 팀을 맡은 지 두 시즌 만인 75 - 76시즌에 리그와 UEFA컵을 우승, 또 다시 더블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다음 시즌에는 2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고, 처음으로 유러피언 컵(챔피언스리그의 전신)우승에도 성공하고 FA컵 결승전에도 진출하여 잉글랜드 축구 사상 최초의 트레블 달성을 목전에 뒀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하면서 트레블 달성에 실패하게 되었다.

다음 시즌에 리버풀은 3연속 리그 우승과 2연속 유러피언 컵 우승에 성공해 다섯 번째 더블을 차지했다. 이 시즌 리그 우승 당시에는 총 42경기에서 16골만을 실점하여 기록을 세웠던 말 그대로 철벽의 수비를 자랑하던 리버풀이었다.[7] 파이즐리 감독은 1973 - 74시즌부터 1982 - 83시즌까지 총 9시즌 동안 리버풀을 이끌었는데 그동안 리버풀이 차지한 우승 트로피는 총 20개였다.(6번 리그 우승, 3번의 유러피언 컵 우승, 한 번의 UEFA컵 우승 그리고 3번의 리그 컵 우승, 6번의 채러티 실드 우승, 한 번의 UEFA 슈퍼 컵 우승) 그가 감독 재임시절에 들지 못한 트로피는 FA컵 하나뿐이었다.[8] 파이즐리는 1983년 섕클리가 그랬던것처럼 명예롭게 은퇴를 하였고 그 자리에는 그의 어시스턴트 코치인 조 페이건이 맡게 되었다.

헤이젤 참사

과거 19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리버풀의 코칭 스태프들이 작전 구상을 하고 또 진이라고 하는 술을 팔기도 했었던 안필드 붓 룸에서 성공적인 감독들이 많이 나왔다.[9] 조 페이건 감독 또한 샹클리와 파이즐리 감독이 해낸 것을 물려받아 첫 시즌인 83 - 84시즌에 리그와 리그 컵, 유로피언 컵을 우승을 석권하게 되었다.[10] 트레블이라 불릴 수도 있겠지만 리그 컵은 FA컵에 비해 권위가 떨어지는 대회라 여겼기 때문에 사실상 트레블이라 불리지 못했다.

84 - 85시즌에는 리그 우승은 못했지만 유러피언 컵 결승에 또다시 진출해 통산 5번째 우승에 도전하게 되었다. 1985년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의 리버풀의 상대는 이탈리아의 명문클럽 유벤투스였다. 벨기에헤이젤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 결승전에서 킥오프가 되기 전부터 이미 재앙은 시작되고 있었다. 양팀 서포터들이 서로를 향해 이것저것 던지고 있었고 그것이 심화되어 리버풀 훌리건들이 양팀 서포터들을 분리시켜놓은 펜스를 넘어 유벤투스 서포터들을 마구 공격하였다. 성난 리버풀 훌리건들에게 겁을 먹은 유벤투스 서포터들은 코너쪽의 벽으로 도망갔고 일부는 벽을 타고 경기장 밖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벽이 낡고 오래되어 무게를 이기지 못해 그대로 무너져 버려 39명이 사망하고, 600여 명이 부상을 입는 대참사가 발생하게 되었다. 사망자중 대부분은 유벤투스 서포터의 이탈리아 팬들이었다.

이에 개의치 않고 경기는 지속 되었으며 리버풀은 결국 유벤투스에게 패하게 되었다. 결국 경기에서 져 우승도 놓치고 응원문화에 있어서도 비극을 불러 일으키게 된 셈이었다.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해서 UEFA가 직접 나서 '잉글랜드의 모든 클럽은 향후 5년간 모든 유럽대회에 참가할 수 없으며, 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인 리버풀에 대해서만 10년으로 늘린다'는 내용의 중징계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이후 6년으로 줄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난동을 일으킨 리버풀 훌리건들 중 14명에 대해서는 유죄가 선고되었고 [11] 페이건 감독은 대참사 후 사임을 하게 되었다.[12]

고난과 극복

페이건의 사임후 리버풀의 감독직은 당시 리버풀의 스트라이커 였던 케니 달글리시가 선수겸 감독으로 리버풀을 맡게 되었다.[13] 그가 선수겸 감독을 맡을동안 리버풀은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85 - 86시즌 더블을 포함해 세 번의 리그 우승과 두 번의 FA컵 우승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역경속에서의 우승은 곧 힐스보로 참사라는 또 다른 참사에 의해 파뭍히게 되었다.

힐스브로 참사

1989년 4월 15일, 리버풀은 FA컵 준결승전에 진출해 노팅엄 포레스트와 결승진출을 놓고 한판승부를 벌이게 되었다. 준결승전이 열리는 장소는 중립 경기장인 힐스버러 스타디움(셰필드 웬즈데이의 홈구장)였다. 리버풀 원정 팬들이 너무나 많이 몰려오는 바람에 뒷쪽의 리버풀 팬들이 앞쪽에 이미 많은 팬들이 들어차 있는지도 모르고 앞쪽의 팬들을 계속 밀었고(이 당시에는 모든 구장들이 거의 입석이었음)이에 지나치게 붐비는 것을 우려한 앞쪽의 일부 팬들이 펜스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14]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펜스 쪽으로 몰렸고 결국 펜스가 무너져버려 당시에만 94명이 숨지고 75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경기는 중단이 되었고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4일 후에 부상자중 소년 한명이 사망해 총 사망자수는 95명이 되었고, 4년후 의식 불명 상태에 있던 한 남자가 사망해 결국 사망자는 총 96명이 되었다.

이후 이 사건에 대해 당시 현장에 있었던 경찰들과 안전요원들에 대한 문제, 힐스보로 경기장에 대한 안전성 문제가 도마위에 올랐고 당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수석 재판관이었던 피터 테일러라는 재판관이 이번 사건의 원인중 하나가 '경찰의 통제 실패와 힐스보로의 입석형태에 따라 관중이 많이 몰렸다' 라고 판단하여 앞으로 반드시 상위권 리그 팀들은 홈경기장을 모두 좌석제로 개조해야 한다는 주된 내용의 골자를 다룬 이른바 테일러 리포트가 발표되기에 이른다.[15][16] 달글리시는 1990년에 선수로서 은퇴하고 감독직에 전념하지만 이듬해인 1991년 사임을 하게 되는데 아마도 이 힐스보로 참사가 간접적인 이유라고 보고 있다. 이렇게 달글리시가 사임한 뒤에는 그레이엄 수네스가 리버풀의 새 감독이 되었다.

몰락의 시대

수네스는 92년도에 리버풀에게 5번째 FA컵을 안겨주지만 과거 감독들에 비해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고 이후에는 과거 빌 생클리 시절부터 쭉 코치생활을 해왔던 로이 에반스가 드디어 감독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에반스도 95년도 리그 컵 우승밖에는 리버풀에 별다른 트로피를 갖다주지 못했고 급기야 98 - 99시즌에는 프랑스 출신의 제라르 울리에와 함께 공동 감독직(co-manager)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제라르 울리에는 비영어권 출신 감독으로서는 처음이었다.(존 맥케나는 아일랜드 출신이었지만 아일랜드는 영어권 국가이다.)

하지만 공동 감독직도 얼마 못가 98년 11월 로이 에반스가 물러나게 되고 [17] 결국 울리에 감독 1인 체제로 리버풀을 이끌어 나갔다. 그가 단독으로 감독이 된 지 두 시즌 만인 2000 - 01시즌 리버풀은 FA컵, 리그 컵, UEFA컵 우승을 석권해 형식적으로는 트레블 같았지만 83 - 84시즌처럼 우승 대회의 기준에 맞지 않아 트레블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18] 제라르 울리에 감독은 수네스와 에반스와는 달리 예전 감독들처럼 성공하는 듯해 보였지만 곧바로 다음 시즌에 심장수술 이란 위기가 찾아오게 되었고 그 시즌에는 아스널에 이어 2위로 마감하게 되었다.[19] 건강이 안 좋았던 것치고는 성적이 괜찮았지만 그 다음 시즌부터는 계속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으로 팬들을 실망시키게 되었고 결국 04 - 05 시즌에 리버풀의 감독은 스페인 출신의 라파엘 베니테스로 바뀌게 되었다.

베니테스 시대

베니테스 감독이 부임한 첫 시즌에는 리그에서 지역 라이벌인 에버턴에 밀려 5위로 마감해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도 못하게 되어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2005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해 21년 만에 이탈리아의 강호인 AC 밀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이른바 이스탄불의 기적을 일궈내어 팬들의 비난을 불식시켰다. [20]

원칙적으로 리버풀은 리그에서 5위를 차지해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할 수 없었지만, UEFA는 디펜딩 챔피언이 다음 챔피언스리그에 참여할 수 있다는 규정 하에 차기 시즌에도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위와 비슷한 경우는 1999-2000 시즌의 리그를 5위로 마감한 뒤 UEFA 챔피언스리그 1999-2000의 우승을 차지한 레알 마드리드 CF가 있었다. 그러나 차기 시즌에 조별 1라운드에서 시작한 레알 마드리드 CF의 경우와는 다르게 리버풀은 차기 시즌에 예선 1라운드부터 참가하였다.

05-06시즌에는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를 꺾고 7번째 FA컵 우승을 차지하였다. 다음 시즌인 06 - 07 시즌에는 미국인인 조지 질레트톰 힉스가 팀을 인수해 리버풀 구단주가 미국인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 시즌부터 프리미어리그에서의 경쟁력 강화와 우승을 위해 현재까지 많은 돈을 들여 이적시장에서 많은 선수들을 데려오고 있다.[21]

06-07시즌 리버풀은 다시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해 05년과 똑같이 AC 밀란을 상대하게 되지만 이번엔 패하게 되었다.[22]

07-08시즌을 거쳐 08-09시즌에는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아스널 FC, 첼시 FC 등 당시 빅4에 속한 강팀들과의 경기에서 4승 2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약팀과의 경기에서 무승부가 속출해 아쉽게 19년만의 우승 기회를 놓치고 준우승에 그쳤고 09-10 시즌에도 7위로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실패하였다.

2011-12 시즌

2011-12 시즌은 지난 시즌 로이 호지슨 감독이 경질된 후 남은기간 동안 임시 감독으로 활동하였던 리버풀의 레전드 케니 달글리시가 정식 감독이 되면서 팬들이 많은 기대를 하였다. 칼링컵에서 우승을 하며 5년의 무관 세월은 끝을 냈지만 리그 성적이 좋지 못하여 기대에 부응하지는 못하였다. 시즌 초중반 많은 무승부를 기록하며 상위권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으며 19라운드 이후 큰 부진에 빠졌으며 약팀들에게도 많이 지면서 비난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2004-05 시즌 이후 7년 만에 지역 라이벌인 에버턴 FC에게 리그 순위에서 밀리는 굴욕을 맛보기도 하였다. 이번 시즌은 8위로 마감을 하였다.(에버턴은 7위) 리그 성적은 좋지 않지만 FA컵은 결승까지 진출하였다. 결승에서 만난 첼시 FC에게 패배를 하면서 준우승을 하였다. 결국 케니 달글리시 감독은 리버풀의 정식 감독이 된지 1시즌 만에 성적 부진으로 2012년 5월 17일자로 리버풀에서 경질되었다. 그 후 브랜든 로저스 가 감독으로 취임했다.

유니폼과 앰블럼

리버풀의 홈 유니폼은 전통적으로 레드 앤 화이트였지만 1960년대 중반에 올 레드로 바뀌었다. 하지만 초창기 시절에는 계속 빨간색을 사용해 왔던 것은 아니었는데 에버턴이 안필드를 떠나고 리버풀이 창단 되고나서 두 시즌 동안은 홈 유니폼 저지를 에버턴과 똑같은 블루 앤 화이트색을 사용했었고 당시에는 에버턴 팀이 입었던 것과 거의 똑같았었다. 1894 - 95시즌부터 리버풀은 빨간색을 택했고 1901년에는 리버풀 시의 상징인 리버 버드 모양을 엠블럼에 집어넣었다.[23] 향후 60년간 리버풀의 홈 유니폼은 빨간색 상의에 흰색 하의였다. 양말은 빨간색에서 검정색, 검정색에서 흰색, 흰색에서 다시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1964년, 당시 감독이었던 빌 생클리는 안더레흐트전에 처음으로 유니폼을 빨간색으로 통일시키고 경기에 나설것을 결심한다. 당시 리버풀 선수였던 이안 세인트존은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는 그 색깔 계획안이 강한 심리적 충격을 가져다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 빨간색은 위험하고 힘이 있는 색깔이었죠. 그가 어느날 드레싱 룸으로 들어와서 로니 예츠에게 빨간색 하의 한 벌을 던져 주었어요. 그는 "이거 한번 입어보고 어떤지 좀 보자" 라고 했어요. "크리스트, 로니, 멋져 보이는군. 놀라워. 키가 7ft 정도는 돼 보이는군.""감독님, 왜 전부 다 돌리지 않은 거죠?" 나는, "왜 우리는 빨간 양말을 신지 않는 거죠? 모두 빨간색으로 하고 나가요."라고 제안했어요. 섕클리는 찬성했고 상징적인 유니폼이 탄생했죠.[24]

리버풀의 원정 유니폼은 전통적으로 흰색 상의에 검정색 하의이거나 모두 노란색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1987년, 상·하의 모두 회색의 유니폼이 소개되었고, 1991 - 92시즌까지 사용되었다. 가끔 녹색 상의와 흰색 하의 유니폼도 입었었다. 1990년대에 금색과 짙은 감색, 밝은 노란색, 검정색과 회색, 베이지색 등등 여러가지 색상 조합이 있었고 2009년에 이르기까지 회색 유니폼과 노란색, 흰색 유니폼을 번갈아가며 사용하고 있다.[25] 현재 리버풀의 유니폼은 [워리어]가 디자인 하고 있으며 과거 85년부터 96년까지 리버풀 유니폼을 디자인 하기도 했었다. 다른 회사들은 엄브로가 85년까지 였고 리복이 96년부터 10년 동안 리버풀의 유니폼을 제작한 바 있다.[26] 제3의 유니폼인 청록색 상의와 검정색 하의는 원래 챔피언스리그 원정 경기를 위해 제작되었다. 하지만 현재 자국에서 벌어지는 경기는 거의 빨간색과 회색 유니폼을 입고 있다.[27]

한편 유니폼에 기업 스폰서를 새겨넣은 팀은 리버풀이 최초였다.[28] 1979년, 히타치와 계약을 맺은 뒤, 크라운 페인트와 캔디 그리고 칼스버그가 뒤를 이었다. 특히 칼스버그와는 1992년 처음 계약을 맺고 2010년까지 이어져 왔고 지금은 금융그룹인 스탠다드 차타드와 계약을 맺고 있다.[29] 현재 리버풀의 앰블럼은 방패안에 시의 상징 리버 버드가 있는 것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방패위에는 섕클리 게이츠에 써 있는 리버풀의 유명한 응원가인 You'll Never Walk Alone문구가 표현되어 있다. 또한 양쪽의 불꽃은 안필드 밖에 있는 힐스보로 참사 기념비에 있는 성화를 표현한 것이며, 그 타오르는 성화는 힐스보로 참사때 사망한 이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30]

경기장

2006년 8월에 열린 마카비 하이파와의 경기. 1994년에 재개조한 이후의 스피온 콥 스탠드의 모습이다.

안필드 스타디움은 1884년 영국 리버풀 스탠리 파크 근처에 지어졌다. 당시에는 에버턴 축구 클럽이 사용하였다.[31] 1892년 경기장 임대료 문제 때문에 에버턴 축구 클럽은 안필드 경기장을 떠났다. 안필드 구장의 소유주였던 존 호울딩이 새로이 팀을 창단했는데, 그것이 바로 리버풀 축구 클럽이다. 당시에는 안필드 수용규모가 2만 명 정도였지만, 리버풀 팀 창단후 첫 안필드 홈 경기에서 들어온 관중수는 고작 100명이었다.[32]

스피온 콥 스탠드의 밖이다.

1906년, 경기장 한 쪽의 스탠드가 공식적으로 스피온 콥(Spion Kop)이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되었다.[33] 이 스피온 콥은 원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역 명칭이기도 한데 제2차 보어 전쟁당시 스피온 콥 전투에서 랭커셔 연대소속 약 300여명의 군인들이 그곳에서 전사하였는데 그중에 많은 수가 리버풀 출신자들이었다.[34] 스피온 콥 스탠드가 가장 컸을 때는 무려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이는 단일 스탠드 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스탠드중 하나였다. 많은 잉글랜드 경기장들이 특정 스탠드 이름을 스피온 콥이라고 지었지만, 안필드의 스피온 콥은 당시 영국에서 가장 큰 스탠드 였고, 심지어 안필드의 축구장 규모보다 더 많은 수의 서포터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34] 이후 스피온 콥 스탠드는 힐스보로 참사 이후 안전 문제와 테일러 리포트로 인해 수용규모 축소를 검토하게 되었다. 1994년 안필드는 모든 좌석제 개조를 마치게 되며, 스피온 콥 스탠드은 12,390명 규모로 줄게 되었다.[32]

안필드 로드 스탠드는 스피온 콥 스탠드의 맞은편 골대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정 팀 서포터가 자리하고 있는 스탠드이다. 1998년에 재개조하여 2008년 수용규모는 9,074명이고, 안필드 스탠드 로드는 안필드에서 가장 최신의 스탠드이다. 이 두 스탠드 사이에 12,227명 규모의 메인 스탠드(TV 카메라가 있는 쪽)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11,762명 규모의 센테너리 스탠드가 있다. 메인 스탠드는 안필드에서 가장 오래된 스탠드이며, 1973년 재개조 이후 거의 손댄 적이 없는 스탠드이다. 메인 스탠드에는 선수 대기석과 감독석등이 있다. 센테너리 스탠드는 과거에는 켐린 로드 스탠드로 알려졌었으나 구단 창단 후 100년째인 1992년에 재개조하여 센테너리 스탠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시 켐린 로드 스탠드는 철거되었고 주소에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2008년 총 경기장 수용 인원은 4만 5362명이며, UEFA 경기장 등급에서 4성급 등급을 받았다.[35][36]

샹클리 게이트

2004년 7월 30일, 리버풀 시 의회는 안필드로부터 약 270m 거리에 위치해 있는 스탠리 파크에 6만 명 수용규모의 새 구장 건립계획안을 승인하게 되고 [37] 또한 2006년 9월 8일, 리버풀 시의회는 리버풀이 그 대지를 999년간 임대하는 것을 승인하였다.[38] 2007년 2월, 조지 질레트와 탐 힉스가 구단을 인수한 이후, 새 구장 건설은 재설계가 되었다. 2007년 11월, 새 구장 재설계가 시 의회로부터 동의를 얻게 되었고, 2008년 6월부터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39][40] 미국의 건설업체인 HKS, inc가 2011년 완공을 예상으로 새 구장을 건설하고 있었으나, 경제 상황등의 여파로 개장 시기가 늦춰지고 있던 중에[41]2012년 10월,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여 기존의 홈 구장인 안필드를 활용하는 방안으로 선회하였다. 이를 위해 구장 인근의 주택 90채를 철거하고, 1억 5천만 파운드의 액수를 투자해 안필드를 확장하고 있다.[42] 리버풀 시의 웨스트 더비에 있는 멜우드는 리버풀이 1950년대부터 훈련장으로 이용된 곳이다. 커크비에 있는 리버풀 2군과 유소년 아카데미 훈련장과는 연관되지 않는 곳이다. 멜우드 훈련장은 이전에는 세인트 프랜시스 재비어라는 지역 학교의 소유지였다.[43]

서포터

리버풀은 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모든 홈 경기들은 거의 매진이 되기도 한다. 현재 시즌 평균 43,398명으로 리그 5위를 기록하고 있고, 95.6%의 관중 동원율을 기록하고 있다.[44] 리버풀 팬들은 종종 그들만의 언어로써 스피온 캅 스탠드를 코파이트(kopites)라고 언급하고 있다.[45]

리버풀 축구 클럽의 주 응원가(anthem)인 You'll Never Walk Alone은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의 뮤지컬 커로젤에서 따왔다. 리버풀 출신의 가수 게리 & 더 페이스메이커스가 불렀다. 이 노래는 1960년대부터 리버풀 축구 클럽의 주 응원가(anthem)으로서 불리고 있다. 다른 축구단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축구 팬들에게 인기가 높다. 1982년 8월 2일 前 감독 빌 생클리를 기리기 위한 섕클리 게이츠의 제막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때 섕클리 게이츠의 꼭대기에 이 노래이자 응원가가 장식되었다. 그리고 이 You'll Never Walk Alone은 리버풀의 엠블럼에도 들어가게 된다.

리버풀의 가장 오랜 라이벌 관계에 있는 팀은 같은 리버풀을 연고로 하고 있는 에버턴이며, 이들 간의 경기는 리버풀 시가 속해 있는 머지사이드 주를 따온 머지사이드 더비라고 불린다. 이러한 라이벌 관계의 유래는 리버풀 구단의 창단자이자 안필드의 소유자 였던 존 호울딩과 본래 안필드를 쓰고 있었던 에버턴 구단과의 마찰에서부터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종교가 다른 것도 예를 들 수가 있는데 리버풀 팬들은 개신교 신자들이 많다고 하며, 에버턴 팬들은 가톨릭교 신자들이 많다고 한다.[46] 머지사이드 더비는 보통 매진이 되곤 하고 프리미어리그에서 다른 경기들보다 많은 선수들이 퇴장 되기도 한다.[47] 또한 머지사이드 더비는 서포터들을 억지로 격리 시키지 않는 지역 더비중 하나 이기도 하다.[48] 리버풀의 다른 큰 라이벌은 맨체스터를 연고지로 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다. 이들 팀들이 라이벌인 주된 이유는 이들 팀들이 연고를 하고 있는 리버풀과 맨체스터가 가까운 도시이고 양 도시를 대표하는 팀들이기 때문이다.[49] 양 팀간 마지막으로 이적한 선수가 1964년 필 치스널이란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리버풀로 이적한 것이 마지막이었을정도로 양 팀의 라이벌 관계는 꽤 치열하다.[50]

리버풀의 서포터들은 두 번의 큰 비극적 사건을 겪기도 했었다. 첫 번째는 39명의 유벤투스 팬들이 사망했던 헤이젤 대참사 대죄이다. 유벤투스 팬들은 리버풀 훌리건들의 공격으로 인해 궁지에 몰려 벽으로 도망쳤고, 벽타고 도망치려다 무너져 버린 것이었다. 이후 UEFA는 리버풀 팬들을 비난하였고,[51] 잉글랜드의 모든 팀들에게 5년간 모든 유럽 대회에 출전금지를 명령하고, 리버풀에게는 별도로 10년으로 명령 하였으나 차후에 6년으로 줄게 되었다.[52] 두 번째 사건은 1989년 FA컵 준결승전, 대 노팅엄 포레스트 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당시 경기장 과다밀집으로 96명의 리버풀 팬들이 사망했었고 이는 힐스보로 참사라고 명명되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인 더 선은 당시 'The Truth(진실)'란 제목으로 리버풀 팬들이 사망자의 소지품을 빼앗고, 시체에 소변을 보고, 경찰들을 폭행했다고 주장하였다.[53] 그러나 이후 조사 결과 증거가 없는 거짓 정보임이 드러났고, 이는 곧 리버풀 시 전체적인 불매운동에 이르게 된다.[54] 많은 단체들이 힐스보로 참사에 대한 결과를 올바르게 세웠고, 당시의 유족들과 생존자들, 그리고 서포터들이 대표가 되어 '힐스보로 재판 운동'을 벌여 1989년 4월 15일, 셰필드에서 죽어간 96명의 리버풀 팬들을 위해 재판 운동을 벌였다.[55]

경영권과 재정

미국인 조지 질레트와 탐 힉스는 2007년 2월 6일, 前 구단주 데이빗 무어스로부터 팀을 인수해 새 구단주가 되었다. 총 2억1890만 파운드(한화 약 4천억원)를 지불하고, 인수하였다. 질레트와 힉스 구단주는 1억7410만파운드의 팀 지분과 4480만 파운드의 팀의 기존 채무를 떠안은 것이다.[56] 현재 질레트와 힉스 구단주 사이에 불화가 나돌아 팬들의 지지가 부족한 상태이며, 두 구단주가 리버풀을 인수하기 전에 역시 관심을 보이고 있었던 두바이 인터내셔널 캐피탈(DIC)과의 매각 루머가 현재 나오고 있다.[57] 또한 리버풀 서포터즈 그룹도 구단 인수에 관심을 표명한 상태이다. 그들은 10만 명의 팬들이 주주가 되어 1인당 5천 파운드씩 총 5억 파운드를 팀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제안한 상태이다. 그러나 리버풀 서포터즈 그룹이 제시한 금액은 팀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58]

2008년 4월, 미국의 경제 미디어 포브스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알 마드리드, 아스널에 이어 리버풀을 세계에서 가장 가치있는 축구 클럽중 4위로 올려놓았다. 리버풀은 채무를 포함해 1억 달러(6억 5백 유로)가치를 평가 받았다.[59] 미국의 회계법인 회사 델로이트는 세계 축구클럽들의 수입을 환산해 평가하는 2008 델로이트 풋볼 머니 리그에서 리버풀을 8위에 올려놓았다. 2006 - 07 시즌, 1339천만 유로 수입으로 10위를 기록했던 것과 비교해 오른 것이었다.[60]

대중 문화에서의 리버풀

잉글랜드 축구에서 가장 성공적인 팀 중 하나인 리버풀은 영국 문화에서 축구를 묘사할 때 종종 특징적으로 삼기도 했었고 미디어에 처음으로 나오기도 했었다. 리버풀은 BBC매치 오브 더 데이의 첫 방송에서 1964년 8월 22일, 안필드에서 벌어진 아스널과의 경기가 하이라이트로 방송이 되었다. 또한 리버풀은 웨스트 햄과의 경기에서 컬러 TV 방송으로 처음 생중계가 되기도 하였다.[61]

영국의 밴드인 핑크 플로이드가 부른 피어리스(Fearless)에는 리버풀 팬들의 응원가인 You'll Never Walk Alone을 부르는 리버풀 팬들이 나오기도 한다.[62] 리버풀은 1988년, '안필드 랩(Anfield Rap)'이란 랩을 발표하게 된다. 이 랩은 1988년 FA컵 결승전, 윔블던 FC와의 경기에서 존 반스가 다른 선수들과 같이 부르게 되었다.[63]

1996년, 리버풀 출신의 텔레비전 작가인 지미 맥고번에 의해 힐스보로 참사가 다큐멘터리 드라마로 제작되게 된다. 각본에 짜여진 이야기긴 하지만 드라마 닥터 후의 아홉 번째 닥터로 출연하기도 했었던 크리스토퍼 에클레스턴이 트레버 힉스역으로 출연을 하였는데, 힉스는 그때의 참사로 십대의 두 딸을 잃게 되고, 안전한 경기장을 위한 운동을 벌이면서 힐스보로 유족 지원 모임에 도움을 주는 인물로 묘사된다.[64] 또한 리버풀은 리버풀 시를 주 배경으로 찍은 새뮤얼 잭슨의 영화 51번째 주(The 51st State)에도 나온다. 전 암살자인 펠릭스 드수자(로버트 칼라일)가 욕심 많은 리버풀의 팬으로 나오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리버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 때 찍게 된다.[65]

또한 리버풀은 스컬리라는 어린이 쇼에도 나오게 되는데, 프랜시스 스컬리라는 어린 소년을 중심으로 '어떤 팀이 리버풀을 이기려 하는가?'라고 하는 토론이 벌어졌었다. 이 방송에는 당시 리버풀의 걸출한 스타였던 케니 달글리시가 나왔었다.[66](이 방송은 1984년 방영되었던 쇼로서 달글리시가 선수겸 감독직을 맡았던 것은 85년도 헤이젤 참사 뒤부터였다.)

통계와 기록들

리버풀의 랭커셔 리그에서의 첫 상대는 하이어 월턴(Higher Walton)이란 팀이었는데 무려 8-0의 대승을 거두게 된다.[67] 리버풀 통산 최다 출장 경기는 1958 - 78 시즌 동안 무려 857경기나 출장한 이언 캘러건이란 선수가 갖고 있으며,[68] 리그 출장 횟수도 640경기로 역시 기록을 갖고 있다.[69] 현재 리버풀에서 가장 많은 출장 경기수를 보유한 선수는 제이미 캐러거이며 그는 2008년 초에 500경기 달성을 기록한 바 있다.[70]

리버풀의 통산 최다 골 득점자는 이언 러시인데 1980년부터 87년, 88년부터 96년까지 346골을 기록하고 있다.[69] 이 이언 러시라는 선수는 1983 - 84시즌 47골로 한 시즌 최다 골 득점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리버풀 선수생활 동안 러시는 로저 헌트가 기록한 245개 리그 골을 1970년 이후에는 넘어서지 못했다.[68] 1961 - 62시즌, 로저 헌트는 41개의 리그 골로 리버풀의 한 시즌 리그 최다 득점자로 기록되어 있다.[71] 고든 호지슨은 240골로 통산 3위 랭크되어 있고,[72] 17개의 해트 트릭으로써 리버풀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69] 한 경기에서 가장 많은 골을 기록한 갯수는 5골이며 이언 러시, 존 밀러, 앤디 맥귀건, 존 에반스 그리고 로비 파울러가 이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73] 또한 파울러는 1994 -95시즌, 아스널 전에서 4분 32초 만에 해트 트릭을 기록해 리버풀과 분데스리그의 기록을 갖고 있다.[74] 스티븐 제라드는 리버풀 통산 유럽 대회에서 30골을 기록하고 있어 이 부문에 팀내 기록을 갖고 있다.[69]

리버풀의 가장 큰 점수차 승리는 1974년, 노르웨이스트롬스고젯 IF이란 팀에게 거둔 11-0의 스코어다.[69] 리그에서 가장 큰 점수차 승리는 1896년, 로더럼 타운과의 10-1 스코어 이다.[71] 이런 9점차의 승리는 1989년, 안필드에서 크리스탈 팰리스에게 거둔 9-0 스코어도 있다.[75] 리버풀의 가장 큰 점수차 패배는 1954년, 버밍엄 시티에게 당한 1-9 스코어 이다.[69] 한편, 챔피언스리그에서 거둔 가장 큰 점수차 승리는 8-0 스코어의 베식타스 JK전이다.[76][77]

리버풀은 1부리그 통산 18번의 우승을 기록했으며, 8번의 리그 컵 우승, 7번의 FA컵 우승이 있다. 리버풀은 1984년과 2001년, 정식 트레블이라 불리기엔 좀 특이한 트레블 경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리버풀은 챔피언스리그에서 5번 우승하여 잉글랜드 클럽 중 최다 기록을 갖고 있다.그러나 프리미어리그에서는 우승이 한번도 없다.

유럽 전역을 통틀어서 레알 마드리드 CFAC 밀란만이 리버풀보다 더 많은 우승횟수를 가지고 있다. 리버풀은 5회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UEFA 명예의 뱃지를 받아 잉글랜드 에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고, 리버풀과 함께 뱃지를 받았던 팀은 레알 마드리드, AFC 아약스, FC 바이에른 뮌헨, AC 밀란 네 팀뿐이다. UEFA컵은 통산 3번의 우승으로 유럽 전역을 통틀어 최다 기록이며 유벤투스 FC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와 동률을 기록하고 있다.

현재 선수 명단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2 DF 잉글랜드 나다니엘 클라인
3 DF 스페인 호세 엔리케
4 DF 코트디부아르 콜로 투레
6 DF 크로아티아 데얀 로브렌
7 MF 잉글랜드 제임스 밀너 (부주장)
9 FW 크리스티안 벤테케
10 MF 브라질 필리페 쿠티뉴
11 MF 브라질 호베르투 피르미누
12 DF 잉글랜드 조 고메스
14 MF 잉글랜드 조던 헨더슨 (주장)
15 FW 잉글랜드 다니엘 스터리지
17 DF 마마두 사코
18 DF 스페인 알베르토 모레노
20 MF 잉글랜드 아담 랄라나
21 MF 브라질 루카스 레이바
22 GK 시몽 미뇰레
23 MF 엠레 찬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24 MF 웨일스 조 앨런
27 FW 디보크 오리기
28 FW 잉글랜드 대니 잉스
32 MF 잉글랜드 카메론 브라나간
33 MF 잉글랜드 조던 아이브
34 GK 아담 보그단
36 FW 사메드 예실
37 DF 슬로바키아 마르틴 스크르텔
38 DF 잉글랜드 존 플래너건
43 DF 북아일랜드 라이언 맥러플린
44 DF 브래드 스미스
46 MF 잉글랜드 조던 로시터
48 FW 잉글랜드 제롬 싱클레어
49 MF 웨일스 조던 윌리엄스
52 GK 웨일스 데니 워드

임대 선수 명단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26 DF 티아고 일로리 (지롱댕 드 보르도로 임대)
47 DF 안드레 위즈덤 (노리치 시티 FC로 임대)
51 DF 로이드 존스 (첼튼햄 타운 FC로 임대)
53 DF 주앙 테세이라 (브라이턴 앤 호브 앨비언로 임대)
54 DF 셰이 오조 (첼튼햄 타운 FC로 임대)
FW 루이스 알베르토 (말라가로 임대)
FW 세르비아 라자르 마르코비치 (페네르바체 SK로 임대)
FW 마리오 발로텔리 (AC 밀란로 임대)

유명 선수

역대 감독

아래의 내용은 사커베이스, 리버풀TV, 공식 홈페이지 등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리그 경기만이 아니라 감독이 참여한 모든 공식 경기의 기록입니다. 단 친선전, 프리시즌 등의 경기는 제외합니다. 본문에 사용될 때는 <references/> 태그를 함께 넣어야 합니다.

구분
두명의 감독이 팀을 공동 운영 감독 대행
이름 국적 부임 사임 경기 승률 우승 참고

윌리엄 바클레이
존 맥케나

잉글랜드의 기 잉글랜드
아일랜드의 기 아일랜드
1892년 2월 15일 1896년 8월 16일 127 77 20 30 60.63 3 풋볼 리그 2부 (1893/94, 1895/96)
랭커셔 리그 챔피언쉽 (1892/93)
[78][A]
톰 왓슨 잉글랜드의 기 잉글랜드 1896년 8월 17일 1915년 5월 6일 742 329 141 272 44.34 3 풋볼 리그 1부 (1900/01, 1905/06)
풋볼 리그 2부 (1904/05)
[79]
데이비드 애쉬워스 아일랜드의 기 아일랜드 1919년 12월 18일 1923년 2월 12일 139 70 40 29 50.36 1 풋볼 리그 1부 (1921/22) [80]
맷 맥퀸 스코틀랜드의 기 스코틀랜드 1923년 2월 13일 1928년 2월 15일 229 93 60 76 40.61 1 풋볼 리그 1부 (1922/23) [81]
조지 패터슨 잉글랜드의 기 잉글랜드 1928년 5월 7일 1936년 8월 6일 366 137 85 144 37.43 0 [82]
조지 케이 잉글랜드의 기 잉글랜드 1936년 8월 6일 1951년 1월 357 142 93 122 39.78 1 풋볼 리그 1부 (1946/47) [83]
돈 웰시 잉글랜드의 기 잉글랜드 1951년 3월 23일 1956년 5월 4일 232 81 58 93 34.91 0 [84]
필 테일러 잉글랜드의 기 잉글랜드 1956년 5월 1959년 11월 17일 150 76 32 42 50.67 0 [85]
빌 섕클리 스코틀랜드의 기 스코틀랜드 1959년 12월 1일 1974년 7월 12일 783 407 198 178 51.98 11 풋볼 리그 1부 (1963/64, 1965/66, 1972/73)
풋볼 리그 2부 (1961/62)
FA 컵 (1965, 1974)
FA 커뮤니티 실드 (1964, 1965, 1966, 1974)
UEFA 컵 (1973)
올해의 감독 (1973)
잉글랜드 풋볼 명예의 전당 헌액 (2002)
[86]
밥 페이즐리 잉글랜드의 기 잉글랜드 1974년 8월 26일 1983년 7월 1일 535 308 131 96 57.57 19 풋볼 리그 1부
(1975/76, 1976/77, 1978/79, 1979/80, 1981/82, 1982/83)
리그 컵 (1981, 1982, 1983)
FA 커뮤니티 실드 (1976, 1977, 1979, 1980, 1982)
유러피언 컵 (1977, 1978, 1981)
UEFA 컵 (1976)
UEFA 슈퍼 컵 (1977)
올해의 감독 (1976, 1977, 1979, 1980, 1982, 1983)
잉글랜드 풋볼 명예의 전당 헌액 (2002)
[87]
조 페이건 잉글랜드의 기 잉글랜드 1983년 7월 1일 1985년 5월 28일 131 71 36 24 54.20 3 풋볼 리그 1부 (1983/84)
리그 컵 (1984)
유러피언 컵 (1984)
올해의 감독 (1984)
[88]
케니 달글리시 스코틀랜드의 기 스코틀랜드 1985년 5월 30일 1991년 2월 21일 307 187 78 42 60.91 9 풋볼 리그 1부 (1985/86, 1987/88, 1989/90)
FA 컵 (1986, 1989)
FA 커뮤니티 실드 (1986, 1988, 1989, 1990)
올해의 감독 (1986, 1988, 1990)
[89]
로니 모런 잉글랜드의 기 잉글랜드 1991년 2월 22일 1991년 4월 15일 10 4 1 5 40.00 0 [90]
그레이엄 수네스 스코틀랜드의 기 스코틀랜드 1991년 4월 16일 1994년 1월 28일 157 66 45 46 42.04 1 FA 컵 (1992) [91][B]
로이 에반스 잉글랜드의 기 잉글랜드 1994년 1월 31일 1998년 11월 12일 226 117 56 53 51.77 1 리그 컵 (1995) [92]
로이 에반스
제라르 울리에
잉글랜드의 기 잉글랜드
프랑스의 기 프랑스
1998년 7월 16일 1998년 11월 12일 18 7 6 5 38.89 0 [93]
제라르 울리에 프랑스의 기 프랑스 1998년 7월 16일 2004년 5월 24일 307 160 73 74 52.12 6 FA 컵 (2001)
리그 컵 (2001, 2003)
FA 커뮤니티 실드 (2001)
UEFA 컵 (2001)
UEFA 슈퍼 컵 (2001)
[94][C]
라파엘 베니테즈 스페인의 기 스페인 2004년 6월 16일 2010년 6월 3일 350 194 77 79 55.43 4 FA 컵 (2006)
FA 커뮤니티 실드 (2006)
UEFA 챔피언스 리그 (2005)
UEFA 슈퍼 컵 (2005)
[95]
로이 호지슨 잉글랜드의 기 잉글랜드 2010년 7월 1일 2011년 1월 8일 31 13 8 10 41.94 0 [96]
케니 달글리시 스코틀랜드의 기 스코틀랜드 2011년 1월 8일 2012년 5월 16일 74 35 17 22 47.30 1 리그 컵 (2012) [97]
브랜던 로저스 북아일랜드의 기 북아일랜드 2012년 6월 1일 2015년 10월 4일 166 83 41 42 50.00 0 [98]
위르겐 클로프 독일의 기 독일 2015년 10월 8일 현재 473 295 95 83 62.4 8 프리미어 리그 (2019/20)
FA 컵 (2021/22)
리그 컵 (2021/22, 2023/24)
FA 커뮤니티 실드 (2022)
UEFA 챔피언스 리그 (2018/19)
UEFA 슈퍼컵 (2019)
FIFA 클럽 월드컵 (2019)
FIFA 올해의 감독 (2019, 2020)
[99][D]

참고

A. ^ 리버풀 FC의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바클레이와 맥케나를 공동 감독으로 인정하고 있다. 바클레이는 총무직을, 맥케나는 코칭을 담당하는 감독이었다고 한다.

B. ^ 그레이엄 수네스는 1992년에 심장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도중에 로니 모런이 감독직을 대행하여 팀을 FA 컵 결승전까지 올려 놓았다. 수네스는 그해 6월에 다시 업무를 재개했다.

C. ^ 울리에는 2001년 10월부터 2002년 2월까지 질병으로 인해 감독직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때 필 톰슨이 임시 감독이 되었는데, 총 33경기를 감독하여 16승 12무 5패의 성적을 거두었다. 이 성적은 필 톰슨이 아닌 울리에의 감독 기록에 포함되어 있다.

D. ^ 현 감독인 위르겐 클로프의 기록은 2024년 2월 첼시 FC와의 풋볼 리그 컵 결승전까지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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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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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은 창단 후 공동 감독이었던 W.E. 바클레이와 존 맥케나 이후 현재까지 21명의 감독과 한명의 감독 대행을 거쳐갔다. 리버풀의 최장수 감독은 톰 왓슨이며, 1896년부터 1915년까지 19년동안 리버풀을 맡았다. 가장 많은 경기를 지휘한 감독은 빌 샹클리이며 783경기를 맡았다. 케니 달글리시는 잉글랜드 축구에서 최초로 선수 겸 감독직을 맡은 인물이며, 밥 페이즐리는 그의 재임기간 동안 19개의 트로피를 차지해 리버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감독으로 기억되고 있다.

라파엘 베니테즈 감독은 리버풀 재임 기간 동안 클럽의 5번째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안겨주는 등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나, 09-10시즌의 부진한 성적(7위)을 이유로 경질되어 이탈리아 전통의 명문 구단인 인터 밀란으로 떠났다. 그의 후임으로 풀럼 FC를 이끌어 UEFA 유로파리그 준우승을 이끌어내는 등 지도력을 인정받은 로이 호지슨 감독이 새로 부임하였으나 시즌 초반 강등권으로 추락하는 등 엄청난 성적 부진을 겪으며 이듬해 1월 결국 경질되었다. 그 후임으로 구단의 레전드인 케니 달글리시가 남은 기간동안 감독대행을 맡아 다시 팀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는데 성공하여 2011년 5월에 정식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감독 대행 때와는 달리 2011-12 시즌의 리버풀의 성적은 다시 강등권에서 머물었으며, 비록 리그 컵의 우승을 차지 하였으나, 첼시 FC와의 FA 컵 결승전 패배 이후 성적 부진을 물어 2012년 5월 17일 경질을 당하였다.

현재는 케니 달글리시의 후임으로 스완지 시티 FC를 성공적으로 지휘한 북아일랜드 출신의 브랜던 로저스가 감독직을 맡고 있다.

스태프

2013년 8월 15일 기준

  • 감독 : 브랜든 로저스
  • 수석코치 : 콜린 파스코
  • 1군팀 코치 : 마이크 마쉬
  • 기술 코치 : 글랜 드리스콜
  • 체력 코치 : 릴랜드 모건스
  • 상대팀 분석 : 크리스 데이비스
  • 1군팀 골키퍼 코치 : 존 아흐터베르크
  • 1군팀 닥터 : 재프 이크발
  • 물리 치료 : 크리스 모건, 파울로 베레이라, 매트 코노핀스키
  • 재활 치료 : 조던 마일슨
  • 근력 및 재활 훈련 보조 : 데이비드 라이딩
  • 마사지 : 폴 스몰, 설리번 리차드슨
  • 상품 매니지먼트 : 그래이엄 카터, 리 라드클리프
  • 스포츠과학 상담가 : 배리 더스트
  • 영양사 : 제임스 머튼

역대 성적

네임드 팬

각주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