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쿠스 4세 인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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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khwong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7월 6일 (월) 07:14 판
루트비히
Ludwig
동 프랑크 왕
로트링겐의 왕
재위 899년 ~ 911년
900년 ~ 911년
전임 아르눌프
츠벤티볼트
후임 콘라트 1세
샤를 단순왕
이름
별호 유아왕
신상정보
가문 카롤링거 왕조

루트비히 4세(Ludwig IV, Louis IV) 또는 루트비히 유아왕(Ludwig the Child, Louos the Child, 893년 7월/9월911년 9월 24일)은 동 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카롤링거 가문국왕이다. 또한 로트링겐의 군주이기도 했다. 황제 아르눌프의 적자이다.

899년 12월 부왕이 죽자 7세에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900년 로트링겐의 폭동으로 서출 이복 형 츠벤티볼트가 암살되자 로트링겐의 왕도 겸임하였으나 911년에 사망하였다. 루트비히의 치세기간 중 마자르 족의 계속된 약탈과 침입으로 국경은 황폐화되었고, 루트비히는 907년이 되어서야 왕국의 군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그는 후계자른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동프랑크카롤링거 왕조는 단절되었으며, 로트링겐서프랑크 왕국샤를 단순왕에게로 넘어갔다.

생애

초기 삶

루트비히는 황제 아르눌프의 유일한 적자로 어머니는 네우스트리아의 오타이며, 893년 7월 또는 9월동프랑크 왕국 바이에른의 알퇴팅(Altötting)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893년 10월 생이라고도 한다. 그는 동프랑크 왕국의 초대 군주 루트비히 독일인의 증손이 된다. 그에게는 알려진 형제만 해도 두 명의 서출 이복 형 츠벤티볼트라톨드가 있었으며, 츠벤티볼트는 로타링기아를 다스렸고, 라톨드는 부왕 아르눌프의 대리인으로 북이탈리아에 있었다. 어머니 네우스트리아의 오타콘라디안 왕가 사람이었다.

899년 12월 아버지가 죽자 6살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 받았는데 사실상 당시 왕국은 마자르족의 침입으로 황폐화되어 있었고, 지방 귀족들의 발호로 왕국은 거의 해체되어 있었다. 그의 재위기간 내내 마자르족의 습격으로 혼란에 빠졌다. 루트비히는 어리고 심약하여 자주 병에 걸려 건강이 안 좋았기 때문에 그의 치세내내 권력은 귀족들과 주교들의 손에 좌지우지 되었다. 그는 잦은 병치레를 하였으므로 한때 독에 중독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루트비히를 대신하여 섭정을 한 주요 자문은 마인츠 주교 하토(Hatto von Mainz)와 콘스탄츠의 주교이자 성 갈렌 수도원장 솔로몬 3세(Bischof Salomo III. von Konstanz), 아우구스부르크의 주교 아달베롱(Adalberon) 등이었다.

903년에는 어머니인 네우스트리아의 오타 역시 사망하고 그는 고아가 되었다. 일찍이 콘라디안 집안에서는 바벤부르크의 패권을 장악하려 하여 다른 귀족들과 말썽을 빚었다. 이때 루트비히는 자신의 외척이자 이런저런 혈연관계가 있던 콘라디안 집안의 손을 들어주었다. 루트비히는 자신의 외조카이자 연상이었던 콘라트 1세프랑켄 공작에 임명했다.

치세 기간

아르눌프와 그의 아들 유아왕 루트비히, 요한네스 야고보 융 작품 (독일, 19세기 초)

900년 2월 4일 바이에른포히하임(Forchheim)에서 정식 국왕으로 선언되고, 대관식을 하였다. 900년 8월 그의 이복 형이자 서출인 츠벤티볼트가 폭동에 휘말려 암살되자 어린 조카들을 제치고 로타링기아도 물려받았다. 그러나 로렌의 귀족들은 프랑켄의 게버하르트를 로트링겐 공으로 임명해 그를 대신하여 로렌을 통치하게 했다. 유약한 루트비히를 대신해 두 명의 주교들이 권력을 행사했는데 그들은 콘라트 1세를 프랑코니아의 공작으로 임명했다.

900년 마자르 족바이에른을 침공하여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후작 리우트폴트파사우의 주교 리샤르에 의해 격퇴되었다. 901년에는 마자르 족케른텐을 침공하여 황폐화시켰다. 904년 루트비히는 마자르 족의 지도자 쿠르산(Kurszán)에게 사자를 보내 협상을 요청했지만, 쿠르산은 루트비히가 보낸 사자들을 살해하였다. 쿠르산 사후 906년907년 마자르 족은 다시 작센으로 쳐들어와 황폐화시켰다.(브라티슬라바 전투) 이는 후작 리우트폴트에게 바이에른에서 패한 데 대한 보복으로 리우트폴트를 비롯한 많은 귀족들을 사살했다. 이 전투에서 바이에른의 리우트폴트, 잘츠부르크의 주교 테오도마르 등을 잃었다. 908년에는 튀링겐에 침략한 마자르 족에 의해 후작 부르하르트 폰 튀링겐뷔르츠부르크 주교 루돌프 등을 일었다.

906년 친히 군사를 이끌고 작센을 침략한 마자르 족과 교전했다. 907년 초 루트비히는 마자르 족이 국경지대를 넘어오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맞섰지만 프레센부르크 전투에서 병사를 잃고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루트비히는 성장하면서 군권을 장악하고, 마자르족에 대한 군사원정을 벌였는데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907년 그가 군사 통제권을 쥐었을 때는 이미 에르네스부르크 등의 도시들은 파괴된 상태였다. 909년 작센튀링겐마자르 족이 나타나자 루트비히는 바이에른불쾌공 아르눌프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르눌프는 로트 강변에서 마자르 족과 싸워서 격퇴했고, 910년 루트비히는 친히 동프랑크 왕국육군을 이끌고 아우구스부르크 근처에서 마자르 족을 격파했다. 이어 레흐 강 근처 레흐펠트 전투에서 마자르 족을 상대했지만, 루트비히의 군사가 패했다. 마자르 족은 다시 발길을 돌려 슈바벤프랑켄을 약탈한 뒤 라인 강을 넘어 부르고뉴까지 쳐들어가 황폐화시키고 약탈을 감행하였다.

911년 9월 24일 루트비히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18살의 나이로 죽었다.

사후

후사가 없이 사망했으므로 동프랑크의 귀족들은 서프랑크단순왕 샤를 3세 생쁠프랑켄 공작 젊은 콘라트를 후보자로 세웠다. 결국 투표 결과, 그의 근친이자 프랑켄의 공작인 콘라트 1세를 왕으로 선출되었다. 루트비히의 시신은 부왕 아르눌프의 석관이 안치된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성 에메람 수도원(St. Emmeram)에 안치되었다.

유아왕 루트비히의 사후 동프랑크 왕국은 사실상 단절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동프랑크의 국왕(rex francorum orientalium) 또는 프랑크인의 국왕(rex francorum)이라는 칭호는 콘라트 2세까지 사용하게 된다.

그가 자식 없이 죽자 동프랑크는 귀족들의 선출로 국왕을 선출하였다. 동프랑크에서는 마인츠, 쾰른대주교작센, 프랑켄, 슈바벤, 바이에른 공작이 국왕을 선출하였다. 이는 2백년간 유지되다가 1198년부터는 마인츠, 쾰른의 대주교 및 작센, 팔츠, 브란덴부르크의 공작과 왕이 독일 군주를 선발하는 제도로 명문화되어 정착된다.[1] 이들 국왕 선거인들 중 왕과 공작 등은 선제후라는 칭호를 부여받게 된다.

기타

그가 죽자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레니에 1세를 공작으로 선출한다. 로렌의 귀족들은 다른 왕을 선출하는 대신 카롤링거 왕조 출신의 군주를 받들기로 하고 서프랑크의 샤를 3세에게 충성서약을 하고 그를 왕으로 받들었다. 이후 1150년대까지 독일과 프랑스는 로렌의 영유권을 놓고 갈등을 벌이게 되었지만, 로렌은 점차적으로 프랑스의 영향력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의 죽음과 동시에 슈바벤바이에른, 작센은 거의 반 독립화되어 스스로 자립하였다.

그 외에도 13세기에 루트비히 4세가 있는데 이는 이탈리아의 루트비히 2세, 프로방스 출신으로 900년에 황제가 된 루트비히 3세에 이은 루트비히 4세이다. 루트비히 4세독일의 군주로는 루트비히 5세가 된다.

관련 항목

전임
아르눌프
동프랑크의 왕
899년 - 911년
후임
콘라트 1세
전임
츠벤티볼트
로타링기아의 왕
900년 - 911년
후임
샤를 단순왕
전임
동프랑크의 아르눌프
바이에른 공작
899년 - 907년
후임
리우트폴트의 아르눌프
  1. 13세기에 가서 보헤미아의 왕도 국왕 선거인에 추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