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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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Россійская Имперія

1721년~1917년
표어"Съ нами Богъ!"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노라!)
국가"Боже, Царя храни!"
(하느님, 차르를 지켜 주소서!)
     1914년 러시아 제국      1914년 이전에 양도된 영토      보호국 또는 점령지
     1914년 러시아 제국
     1914년 이전에 양도된 영토
     보호국 또는 점령지
수도상트페테르부르크
정치
정치체제전제군주제
황제
1721년 ~ 1725년
1762년 ~ 1796년
1801년 ~ 1825년
1894년 ~ 1917년

표트르 1세 (초대)
예카테리나 2세
알렉산드르 1세
니콜라이 2세 (말대)
내각총리대신
1905년 ~ 1906년
1917년

세르게이 비테 (초대)
니콜라이 골리친 (말대)
왕조로마노프 왕조
입법부두마
역사
 • 표트르 1세 즉위1682년 5월 7일 (구력1 4월 27일)
 • 제국 선언1721년 10월 22일 (구력 10월 11일)
 • 데카브리스트의 난1825년 12월 26일 (구력 12월 14일)
 • 봉건제도의 폐지1861년 3월 3일 (구력 2월 19일)
 • 피의 일요일1905년 1월-12월
 • 헌법 채택1906년 4월 23일 (구력 5월 6일)
 • 2월 혁명1917년 3월 15일 (구력 3월 2일)
 • 10월 혁명1917년 11월 7일 (구력 10월 25일)
지리
위치유라시아
1866년 어림 면적22,800,000 km²
(8,416,959 sq mi) (2위)
인문
공용어러시아어
지역어핀란드어, 폴란드어
데모님러시아인
인구
1916년 어림181,537,800명
인구 밀도8.3 (21.6/sq mi)
경제
통화루블 (руб)
종교
국교러시아 정교회
기타
기년법율리우스력
현재 국가

러시아 제국(러시아어: Российская империя 로시스카야 임페리야(Rossiyskaya Imperiya)[*], 문자 개혁 이전: Pоссiйская Имперiя) 혹은 제정 러시아표트르 1세가 1721년에 세운 군주제 국가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도중인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에 의해서 붕괴될 때까지 존재했다.

제국 멸망 이후 케렌스키 주도의 임시 정부는 1917년 10월 혁명 이전까지 존속했고, 이후로는 1991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이 러시아 땅을 통치했다. 러시아 제국은 옛 소련의 영토를 비롯해 핀란드, 폴란드의 영토를 차지하였고, 19세기 중반까지 알래스카를 통치한 바 있으며, 제국주의 시기에는 만주, 신장, 랴오둥 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과 이란 및 오스만 제국의 통치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역사

러시아 제국의 성립

러시아 제국의 시초는 루스 지역에 존재했던 군소국가 가운데 하나였던 모스크바 대공국이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타타르족이나 주변의 루스 국가들과 싸우면서 세력을 확대, 이반 3세 때 처음으로 스스로를 차르라고 자처했다.

차르는 러시아어로, 루스 사회에서는 원래 비잔티움 제국황제에 한해서만 사용되었던 칭호다. 1453년비잔티움 제국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후,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황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차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또한 모스크바에 있던 동방정교회의 주교좌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모스크바는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뒤를 잇는 제3의 로마라는 인식이 생겨나는 등 모스크바 대공국 내에서는 제국을 자부하는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547년에는 이반 3세의 손자 이반 4세가 자신을 전 러시아의 차르라고 하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의 군주는 곧 전 러시아의 군주이며 로마 황제의 계승자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칭호는 단지 국내용에만 머물렀으며,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오랫동안 루스의 군주를 황제는 커녕 왕도 아닌, 단순히 모스크바 대공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반 4세가 죽은 후, 국내가 혼란스러워지면서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다(동란 시대). 1606년 이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코사크, 스웨덴 등이 러시아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대동란은 정점에 다다랐다. 1610년에는 당시 선진국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의해 수도 모스크바가 점령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모스크바인들은 로마노프 왕조 등을 중심으로 국민군을 결성하여 외세에 대해 맹렬히 저항했다. 1612년, 10만에 이른 국민군 병사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을 물리치고 모스크바를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오랫동안 혼란 상태였던 모스크바는 그동안 유럽으로의 진출이 정체되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로부터 국제적인 지위는 높지 않았다. 1613년, 류리크 왕조의 외척인 미하일 로마노프가 원로원에 의해 차르로 즉위했으나, 아직 서구는 로마노프 가를 러시아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17세기 중반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침공, 대홍수 시대(Potop)로 불리는 내전에 개입하여 동구권에서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지만, 그럼에도 대외적으로는 큰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17세기 말, 차르로 즉위한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모스크바는 간신히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표트르 대제가 로마 황제의 정식 칭호인 임페라토르를 러시아 황제의 칭호로 채용하고, 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이라는 국호를 제정한 것도 이 때다.

러시아 제국의 흥망

표트르 대제 시절에 러시아는 급격한 서유럽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정작 근대화가 필요한 농촌에는 개혁의 바람이 불지 않아 농노제는 폐지되지 않았고, 예카테리나 대제 시기에는 농노제가 확장되기까지 했다. 그럼에 따라 농민들은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에 언급될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았다.

알렉산드르 2세 황제는 본격적인 러시아의 근대화에 착수했다. 이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 과정에서 영국프랑스와의 충돌로 크림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영국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에 패한 영향이 컸다. 알렉산드르 2세의 대표적인 근대화 작업은 농노 해방령(1861)이었는데, 이는 지주들에게는 물론이고, 지나치게 높은 토지 상환금을 강요받고 지나치게 좁은 토지를 분배받은 농노들에게조차 인기가 없었다. 이 무렵 러시아의 도시들에서는 해방 농노 출신의 빈곤한 노동자들이 등장했다.

그는 농노 해방 이외에도 군비 증강에도 힘을 기울였다. 귀족과 부르주아, 중산층 자제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기 시작했고(국민 개병제), 병역 기간을 25년에서 6년으로 줄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황제는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1881년에 암살당했고,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르 3세는 부황 알렉산드로 2세의 암살에 충격을 받아 그간 부황이 행했던 대학 자치제 등의 자유주의를 일부 제한하고, 전제 정치를 오히려 더욱 강화시켰다.

알렉산드로 3세가 죽고,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하였는데 니콜라이 2세 역시 알렉산드르 3세 못지않게 전제 정치를 행했다. 그는 자신의 제국이 어떠한 변화를 원하지 않았으며, 격동하는 시대에 변화하는 것에 오히려 두려워 했었다. 그는 러일 전쟁의 패배에 대한 질책과 이에 따른 개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기병대에 의해서 살해 당한 사건인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을 맛본 뒤에야 비로소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1906년 4월 24일에 헌법을 제정하고, '두마'라는 의회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것은 1889년에 근대적 헌법을 도입한 일본보다도 늦은 것이었다.

러시아 군은 제1차 세계대전 초반, 프로이센의 동부 지역을 침공하여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자멸적인 대패를 당하고, 이후 동맹국 세력에게 패퇴하여 동부 전선은 프로이센에서 우크라이나로 점차 후퇴했고, 1917년 제국은 전쟁에 따른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혼란 속에서 군대의 사기마저 저하되었다.

1917년 차르 정부는 전쟁을 도저히 부담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자유주의자, 기업가, 장군, 귀족 모두가 차르 정부에 등을 돌렸다. 빈곤한 노동자 계층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차르의 퇴진을 원하였으며, 이는 곧 2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퇴위되었고, 권력은 임시 정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임시 정부

임시정부가 내놓은 정책은 아주 파격적이었다.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언론이 자유롭지 못하였고, 의회는 예산 심의권만 행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케렌스키 내각은 법무장관에 재직할 당시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아주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오래 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게오르기 르보프 공(公)과 7월에 총리로 취임한 케렌스키는 연합국과의 약속을 깨지 말자는 이유로 휴전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 상황은 러시아군에게 매우 불리했다. 러시아군은 여전히 동맹국군에게 계속 패배하고 있었고, 식량은 여전히 부족했기 때문이다. 전쟁 결과 나타난 사망자 170만, 부상자 665만이라는 수치는 아주 끔찍했다.

소비에트(혁명 위원회)는 임시정부가 성립되었음에도 해산하지 않았고, 그 중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파는 인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는 수도인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하고, 소비에트라는 이름으로 집권했다.

1918년, 볼셰비키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Брест-Литов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에서 독일과의 불평등 조약을 맺음으로써, 국내외적인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동시에 제정을 지지하는 세력을 격파하여야만 했다. 볼셰비키는 1920년 1,300만명의 희생자를 내고 내전에서 승리했다. 러시아 제국은 이로써 소비에트 연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군사

군대의 최고 사령관은 차르였으며, 임시 정부 시기에는 총리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전군을 지휘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10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대략 1,200만 명이 군대에 징집되었다.

Императорскiй военно-воздушный флотъ는 1918년에 문자가 개혁되기 이전의 명칭으로써 현재는 'Императорский военно-воздушный флот'로 표기된다.

행정 구역

러시아 제국의 행정 구역 (1914년)

1914년 당시의 러시아 제국은 81개 현(구베르니야), 20개 주, 1개 행정구로 구성되어 있었다. 러시아 제국은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을 보호국으로 삼았으며 1914년에는 투바를 보호국으로 편입시켰다.

11개 현과 17개 주, 사할린 섬에 설치된 1개 행정구는 아시아 러시아에 있었다. 그 밖에 8개 현은 핀란드, 10개 현은 폴란드에 있었다. 나머지 59개 현과 1개 주(돈보이스코 주)는 유럽 러시아에 있었다. 돈보이스코 주는 전쟁부 관할하에 있었으며 나머지 현과 주에는 현지사, 주지사, 부지사(행정 평의회 의장)를 두었다. 또한 여러 개의 현을 관할하고 주둔군의 지휘권을 포함한 광범위한 권한을 가진 총독을 두었다. 1906년 당시에는 핀란드, 바르샤바, 이르쿠츠크, 키예프, 모스크바, 아무르, 투르키스탄, 캅카스 총독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오데사, 세바스토폴, 케르치, 미콜라이우(니콜라예프), 로스토프나도누와 같은 대도시는 현지사로부터 독립한 자체 행정 제도가 있었으며 경찰서장이 장관 역할을 수행했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