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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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통일
1876년 7월 1일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이 프로이센 왕국에게 합병되었을 당시의 독일 제국의 구성국들을 나타낸 지도.
원어명Deutsche Einigung
날짜1866년 8월 18일1871년 1월 18일
위치북독일 연방 북독일 연방
참여자
결과

독일의 통일(독일어: Deutsche Einigung, 독일어: [ˈdɔʏtʃə ˈʔaɪnɪɡʊŋ] ( ))은 소독일주의[c]의 개념에 기초한 독일인들의 연방제를 갖춘 최초의 국민 국가 독일을 건설하는 과정을 말한다. 1866년 8월 18일 북독일 연방 조약이 체결되면서 북독일 연방이 성립되었는데, 이 북독일 연방은 사실상 프로이센이 지배하던 군사동맹이었고 이는 북독일 연방 헌법이 채택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북독일 연방은 1871년 1월 18일 대부분의 독일 남부 국가들이 독일 제국의 선포와 함께 제국에 가입하면서 호엔촐레른가프로이센 왕국이 주도하는 25개의 소속 국가들로 이루어진 연방 독일국이 성립되면서 끝났다. 독일의 통일과 관련된 법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은 1871년 1월 1일의 독일 남부 국가의 가입과 '독일 제국'이라는 국명의 헌법적 채택과 1871년 5월 4일의 독일 제국 영구헌법의 발효가 있으며, 이 사건은 이후 독일 제국 건국의 관례적인 날로 기념되었다.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로 인한 법률적, 행정적,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옛 제국의 독일어권의 사람들은 공통적인 언어적, 문화적, 법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은 왕조 중심적이고 절대주의적인 사회와 정치 조직의 체제에 도전함으로써 독일의 통일을 위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이들은 독일의 전통, 교육, 언어적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경제적으로, 1818년 프로이센 주도로 관세동맹(Zollverein)이 성립된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이 주도하는 독일 연방의 다른 국가들로의 확대로 국가 간의 경쟁이 감소했다. 새로운 교통 수단은 사업적, 여가 여행을 쉽게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중앙 유럽 전역의 독일어권 사람들 사이에 많은 접촉이 생겼고, 종종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1814년-1815년 빈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을 대체하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외교적 영향권 체제인 독일 연방은 합스부르크의 지도력을 통해 중앙 유럽에서의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확고히 했다. 의 외교관들은 프로이센의 힘이 커지고 있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고, 프로이센의 영향을 받는 독일 국가들의 또다른 연합을 만드는 것을 거부했으며, 프로이센 왕국이 독일에서의 지도력을 위해 오스트리아에게 도전하여 일어설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이러한 독일 문제의 이원론은 통일 문제에 2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독일을 주장하는 소독일주의(Kleindeutsche Lösung)였고, 두 번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포함하는 독일어권의 통일 독일, 즉 프라하 평화 협정 이전의 독일을 주장하는 대독일주의(Großdeutsche Lösung)였다.

역사가들은 프로이센의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1866년 북독일 연방을 확장하여 나머지 독립 독일 국가들을 단일 국가로 포함시키려는, 즉 독일을 통일하려는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프로이센 왕국의 을 강화하기 위한 계획이었는지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역사가들은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치 더해 여러 요인들이 19세기 근대 초기 정체의 정치, 경제, 군사, 외교 관계를 재편성하게 했다고 결론짓는다. 덴마크와 프랑스의 민족주의에 대한 반응은 독일 통일의 표현을 제공했다. 3번의 지역 전쟁에서 프로이센의 군사적 성공은 정치인들이 독일의 통일을 촉진하게 만드는 열정과 자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나폴레옹 전쟁, 특히 1813년과 1814년의 나폴레옹으로부터의 해방 전쟁에서 얻은 성취에 대한 기억의 영향을 받았다. 소독일주의의 통일은 다민족인 오스트리아-헝가리나 독일어권 지역 없이 1871년의 정치적, 행정적 독일의 통일은 이원론의 문제를 일시적으로나마 해결했다.

독일이 통일되고 몇 년 동안 이름과 국경이 추가로 변경되고 헌법 체계가 개편되었으며, 제한된 주권, 영토와 정부의 통합이 중단되었다. 이후 연방제의 독일이 해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통일 과정에서 비롯된 정치 경험은 독일연방공화국이라는 현대적인 형태로 오늘날까지도 존속하고 있다.

초기 역사[편집]

1789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주도한 신성 로마 제국의 지도.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을 차지한 가장 큰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독일어권 지역(주황색)과 프로이센의 독일어권 지역(파란색)이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작은 국가들이 존재했다.[d]

독일인은 중세 시대에 라인강엘베강 사이의 서독 지역에서 로마화된 게르만족, 특히 프랑크인, 프리슬란트인, 색슨인, 튀링겐인, 알레만니인, 바이에른인들의 후손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다.[1] 5세기에 갈리아를 로마화하고, 프랑크인들을 통합하며 라인강 동쪽의 민족들을 정복했던 클로도베쿠스 1세를 시작으로 서부 프랑크인들의 지배 하에서 프랑크라는 민족적 명칭을 기반으로 한 채로 독일 지역은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부족공국'으로 나뉘어졌다. 이후 몇 세기 동안 프랑크인들의 세력은 상당히 성장했다.[2] 이후 9세기 초까지 서유럽의 대부분은 프랑크족의 지도자 카롤루스의 통치 하에 통합되었고, 그는 라인강 동쪽을 포함해 여러 방향으로 프랑크 왕국을 확장하여 색슨족과 프리슬란트족을 정복했다.[3] 독일 군주들의 연합 왕국은 일부 인접 영토를 유지한 채로 1000년 이상 존재했다. 이 연합 왕국은 843년 라인강 동쪽에 있는 동프랑크 왕국이 서부의 프랑크 제국으로부터 분리된 베르됭 조약 이후, 오토 왕조가 919년 동프랑크 왕국을 통치하면서부터 시작된다. 962년 후반부터 이 연합 왕국은 1000개 이상의 독립국가를 포함했으며 1512년 쾰른 제국의회에서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으로 정식 명칭이 정해진[e] 신성 로마 제국의 핵심을 구성했다. 신성 로마 제국 내의 국가들의 규모는 호엔을로에(Hohenlohe) 가문의 작고 복잡한 영토부터, 바이에른 선제후국,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보헤미아 왕국과 같이 크고 명확한 영토를 가진 국가들까지 다양했다. 이들의 국가 형태는 매우 다양했는데, 여기에는 거대한 아우크스부르크, 소규모의 바일데어슈타트와 같이 다양한 크기의 자유제국도시와, 부유한 라이헤나우 수도원과 강력한 쾰른 선제후국과 같은 교회 영토(주교령), 그리고 뷔르템베르크와 같은 왕조 국가 등이 포함된다. 독일어권 국가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행정적, 법적 구조는 국가 간, 국가 내의 농민과 지주와 같은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했다. 제국관구(Reichskreise)의 조직을 통해 국가들은 자원, 경제, 군사적 통합과 협력을 통해 이익을 얻었다.

근대 초기와 18세기[편집]

15세기 이후로, 거의 대부분의 제국 선제후들은 오스트리아 공국합스부르크가의 수장을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하는 것에 지지했다. 합스부르크가는 처음에 중앙 집권의 제국을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약하고 분열된 제국이 보존되는 것이 프랑스와 스웨덴에게 큰 이익이었기 때문에 중앙 집권 시도는 이들의 개입으로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며 실패했다. 이 조약은 수세기 동안 제국의 중앙 집권을 강화하려는 모든 시도를 차단하고 제국을 파편화시켰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나폴레옹 전쟁 직전까지 대부분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독일어권 지역을 300개 이상의 정치 체제로 구성된 영토로 나누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군주국[f]이나 호엔촐레른가프로이센 왕국[g]의 일부와,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지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국경 밖에 위치했다. 이러한 파편화는 독일의 지역 국가들이 매우 독립적이거나 자치적인 성격을 가지는 현상으로 이어졌으며, 이 상황은 클라인슈타터라이(Kleinstaaterei)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19세기 후반까지 독일의 국가 정체성은 발전하지 못했다. 신성 로마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영토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성 로마 제국의 주민들은 제국의 국가 전체보다는 주로 군주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정체성을 가졌다. 19세기 이후에 이르러서야 독일의 지역들은 통신과 교통이 발전하면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4]

구 제국의 해체[편집]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1789-1802)에서 프랑스 제1제국이 신성 로마 제국을 침공하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제국의 연합군을 무너뜨렸다. 1801년 뤼네빌 조약과 1803년의 독일의 재구조화는 여러 교회 공국들을 세속화하고 대부분의 자유제국도시를 폐지했으며 이 영토와 주민들은 왕조 국가에 흡수시켰다. 이 재구조화로 인해 특히 뷔르템베르크바덴의 영토가 크게 넓어졌다. 1806년,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프랑스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과 동맹군을 격파하고 프로이센을 항복시키는 데에 성공시키면서, 나폴레옹은 신성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해체와 명목상의 황제 프란츠 2세의 퇴위를 포함하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지시했다. 나폴레옹은 신성 로마 제국을 대체하는 프랑스의 종속국 라인 동맹을 설립했는데, 이 동맹은 100명이 넘는 왕자와 백작, 자유제국기사들과 이들의 영토를 동맹의 회원국으로서 흡수했다. 이 과정에서 바이에른, 작센, 하노버와 같은 몇몇 국가들은 왕국으로 승격되었다.[5] 대부분의 독일 국가들이 제국을 공식적으로 탈퇴한 이후, 프란츠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을 공식적으로 해체했다.[6] 그는 스스로 신성 로마 황제 직위를 포기하고 제국 내 모든 국가들에 대한 의무로부터 해방시켰으며, 1804년에 선언하여 만든 '오스트리아의 황제'라는 칭호만을 유지했다.[7]

나폴레옹 치하의 독일 민족주의 발흥[편집]

전투를 기념하는 기념비, 높은 정사각형 모양의 블록, 상단의 군인 조각상과 기념비 주변의 군인 그림.
나폴레옹과의 전투 100주년을 기념해 1913년 세워진 전승기념비의 모습. 이 기념비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 노력을 기울인 독일인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프랑스 제1제국의 지배 하 유럽(1804-1814)의 독일에서는 대중적인 독일 민족주의가 발흥했다. 독일 국가들은 부분적으로 비슷한 일을 겪어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이들은 '독일'을 잠재적인 미래의 단일 국가로 정당화하는 여러 시도가 나타났다. 독일의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초이자 독창적이고 진정한 자연적 국가의 경계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내부의 경계로부터 만들어진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예술이 시작되기보다 엄청나게 오래 전부터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유대감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는 개념을 스스로 명확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함께 속해 있으며 본질적으로 하나이고 분리할 수 없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8]

공통의 언어가 단일 국가의 기초로 적용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19세기 독일의 현대 역사가들이 지적했듯이 수백 개의 독일 정치 체제들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언어적 유사성 그 이상의 어떠한 동질감이 필요했다.[9] 프랑스의 유럽 지배를 통해 독일어를 사용하는 중부 유럽의 사람들은 프랑스의 침략자들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땅의 재배권을 다시 되찾으려는 공통된 목적 의식을 얻을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 원정(1806-1807)에서 프로이센의 폴란드 점령 영토를 단일 국가 형태로 독립시키기 결정했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같은 목적으로 원정을 벌였으며, 서독일에서와 1812년 그의 마지막 러시아를 향한 원정은 많은 독일인, 군주, 농민들 모두를 환멸에 빠뜨리는 동시에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은 중앙 유럽의 경제를 완전히 파멸시켰다. 러시아 침공을 위해 독일 지역에서 거의 125,000명에 달하는 수의 병력을 징집했으며, 이 병력의 손실은 상류층과 하류층을 막론하고 나폴레옹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중앙 유럽을 생각해보도록 만들었다.[10] 뤼초 자유군단과 같은 지원병의 창설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예시이다.[11]

러시아 원정의 대실패는 독일 군주들에 대한 나폴레옹의 영향력을 심각하게 악화시켰으며, 1813년 나폴레옹은 독일 국가들의 영향력 회복을 위해 여러 캠페인 벌였다. 그러나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통한 해방전쟁은 1813년 10월 50만 명 이상의 병력이 3일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인 라이프치히 전투를 통해 절정에 달했다. 이 전투는 19세기 최대 규모의 지상전으로 기록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전쟁에서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작센, 스웨덴의 대프랑스 동맹의 승리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라인 동맹은 해체되었으며, 프랑스의 독일 지배는 끝이 났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승리한 동맹군은 라인강을 건너 나폴레옹을 추격하여 그의 정부와 군대를 해산시키고 그를 엘바섬에 투옥시켰다. 1815년 백일천하로 알려진 짧은 나폴레옹의 복고 기간 동안, 웰링턴 공작이 지위하는 영국군과 게프하르트 폰 블뤼허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을 포함한 제7차 대프랑스 동맹군은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를 얻었다.[h] 특히 리니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해야만 했던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이 수행한 중요한 역할은 동맹군과 프랑스군과의 전투의 흐름을 변화시키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프로이센 기병대는 6월 18일 저녁 패배한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동맹군의 승리를 확정지었다. 독일의 관점에서 볼 때, 워털루 전투에서의 블뤼허의 군대의 역할과 라이프치히에서의 독일 국가들의 합동 전투는 독일인들의 자부심과 열정의 집결지를 제공했다.[13] 이러한 해석은 19세기 후반 친프로이센 민족주의 역사가들에 의해 주장된 보루시아 신화의 핵심 구성 요소가 되었다.[14]

빈 체제와 독일 이원론의 등장[편집]

금색 바탕에 검은색 쌍두독수리 문장
독일 연방의 국장(Deutscher Bund).
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인구와 오스트리아의 다민족 영토를 보여주는 유럽의 지도
독일 연방의 국경. 프로이센은 푸른색, 오스트리아는 노란색, 그 외의 독일 국가는 회색으로 표시된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빈 회의세력균형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유럽의 정치외교 체제를 확립했다. 이 체제는 유럽을 영향력 있는 국가들의 지배 하로 재조직했으며, 어떤 경우에서는 독일인과 이탈리아인 등의 다양한 민족들의 열망을 억압했다.[15]

일반적으로, 확장된 프로이센과 1803년 중재된 영토에서 통합된 다른 38개의 국가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향력 하에 연합되었다. 빈 의회는 오스트리아가 이끄는 느슨한 독일 연방(1815-1866)을 설립하고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연방 의회'[i]를 설립했다. 독일 연방의 국경은 이전의 신성 로마 제국의 국경과 큰 차이[j] 없이 유사했는데, 이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상당 영토가 연방 외부에 남겨졌음을 뜻했다. 또한 전통적으로 합스부르크가가 차지했던 신성 로마 황제의 지위를 인정하여, 오스트리아 황제가 명목상으로 독일 연방의 의장을 맡았다. '의회'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 기관은 결코 광범위하고 대중적인 방법으로 선출된 대표 집단이 아니었으며, 당시 독일의 많은 국가들에는 헌법이 없었고, 헌법이 있었더라도 바덴 대공국과 같이 재산에 기반한 선거권을 부여해 소수에게만 참정권을 주었다.[16]

체제 개편의 문제점[편집]

빈 체제의 문제점은, 체제가 오스트리아의 독일 지배에서 18세기 프로이센의 등장을 고려하지 못하고, 프로이센의 새로운 지위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프로이센군은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심각한 패배를 했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으며, 이 결과로 프로이센의 정치인들은 프로이센이 독일의 정치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17] 브란덴부르크선제후가 프로이센의 왕이 된 이후, 이들의 영토는 상속과 전쟁을 통해 꾸준히 확장되었으며, 프로이센의 힘은 폴란드 분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프리드리히 2세 치하에서의 7년 전쟁에서 특히 확인할 수 있었다.[18]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의 남편 요제프 2세가 합스부르크가의 패권을 회복하려고 시도했을 때, 프로이센은 '제후 연합'(Fürstenbund)의 창설로 반격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이원론은 옛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세력 균형 전략은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 혹은 일반 대중 사이에서의 '감자 전쟁'으로 대표된다.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도 이러한 경쟁은 19세기 독일 민족주의 운동의 성장과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19]

통일의 조짐[편집]

3월 전기[편집]

깃발을 들고 언덕 위를 향해 행진하는 학생들의 모습.
1817년 10월, 약 500명의 학생들이 국가의 통일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기 위해 300년 전 마르틴 루터가 머물었던 바르트부르크성에 집결했다. 바르트부르크성은 현대적인 색상의 나무를 가졌으며 독일 민족주의와의 상징적 연관성을 가졌다.[20]

경찰국가로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시기였던 빈 회의부터 1848년 혁명 이전까지의 광범위한 검열 기간은 '3월 전기'(Vormärz)[k]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자유주의는 추진력을 얻었으며, 자유주의의 주요 의제는 경제, 사회, 정치적 문제를 포함했다. 3월 전기의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민족주의의 원칙 하의 통일과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추구하였고, 그 무엇보다도 남성의 참정권 확대를 주장했다. 이들의 '급진성'은 남성 참정권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갖고 있는지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더 넓은 참정권을 주장할수록 더욱 급진적이었다.[21]

나폴레옹 시대에 독일인들의 경험으로 자극되어 처음에 자유주의와 동맹을 맺은 독일의 민족주의 정서의 급증은 독일 국가들 간의 정치, 사회, 문화적 관계를 변화시켰다.[22]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의 민족주의는 나폴레옹 시기의 독일인들의 경험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23] 1813년 독일 전역에서 이루어진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국민 주권에 대한 약속들은 정치 과정에 대한 광범위한 시민들의 참여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으나,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다.[24]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의 출현과 보수적 대응[편집]

테이블 주위에 대부분 입마개를 한 남자들이 앉아 있다. 재갈을 문 사람도, 눈이나 귀를 가린 사람들도 표현되어 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카를스바트 결의를 조롱하는 독일의 그림.

보수적 대응에도 불구하고, 독일어권 국가들에서는 통합 사상이 국민 주권의 개념과 결합했다. 부르셴샤프트(Burschenschaft) 학생 조직과 1817년 10월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열린 대중 시위는 중앙유럽의 독일어권 시민들 사이에 통일감을 키우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25]

1817년 바르트부르크 축제에서 학생들 사이에서 최초의 부르셴샤프트와 같은 학생 단체들이 등장했으며, 흑적금 3색은 이를 상징했다. 학생 단체의 선동으로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후작과 같은 보수 지도자들은 국민 정서의 고조를 두려워하게 되었다.[24]

언덕 맨 위에 있는 폐허가 된 성으로 행진하는 사람들.
1832년 민족주의 시위의 참가자들이 함바흐 성 유적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참가자들은 대부분 학생, 일부 전문가들과 배우자들이었다. 나중에 이들은 현대 독일 국기의 시초가 된 '부르펜샤프트'(Burschenschaft)의 깃발을 들고 다녔다.

1819년 3월 독일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가 급진적 민족주의자 학생에 의해 암살된 이후, 1819년 9월 20일 카를스바트 결의가 선포되어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력을 방해했다.[24] 메테르니히는 언론을 더욱 검열하고 떠오르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운동을 제한하기 위해 이러한 코체부의 암살 사건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분노를 활용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암살 사건은 보수 지도자들이 부르셴샤프트를 지하 조직으로 내몰고 민족주의 서적의 출판을 제한하며 언론과 개인 간의 서신에 대한 검열을 확대하는 동시에 대학 교수가 장려하는 민족주의 토론을 제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카를스바트 결의와 관련된 사건들은 요한 요제프 괴레스의 소책자 《독일과 혁명》(Teutschland [Deutschland] und die Revolution)의 주제가 되었으며, 이 소책자에서 그는 여론의 자유로운 발언을 억압하는 반동적 조치들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25]

1832년 5월 함바흐 축제에는 3만 명 이상의 군중들이 참여했으며,[26] 이 축제는 지역 축제로 홍보되었지만[27] 축제의 참가자들은 형제애, 자유, 국가적 단결을 기념하였다. 참가자들은 마을에 모여서 언덕 위의 함바흐 성의 폐허로 행진했다. 이들은 깃발을 들고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정오에 대부분이 성터에 도착하여 보수파부터 급진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민족주의 연설가들의 연설을 들었다. 연설의 전반적인 내용은 1830년대 독일 민족주의와 7월 혁명 당시 프랑스의 민족주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암시했으며, 참가자들은 이를 통해 독일 대중들에게 필요한 무엇이든 교육한다면 대중들은 그것을 성취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이렇듯이 함바흐의 수사법은 전반적으로 독일 민족주의의 평화로운 성격을 강조했으며, 요점은 프랑스적인 민족주의 형태인 바리케이드가 아니라 계급 간의 감정적 다리를 건설하는 것에 있었다.[28] 1819년 코체부의 암살 이후에 그랬었던 것처럼, 메테르니히는 보수적인 사회 정책들을 추진하기 위해 함바흐 축제를 이용했다. 1832년 6월 28일 '6개 조항'은 주로 군주들의 권위의 원칙을 재확인했으며, 7월 5일 독일 연방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검열에 대한 기존의 규칙을 재확인하고 정치 조직을 제한하며 기타 공공 활동을 제한하는 10개 조항을 추가로 승인했다. 이에 더불어 독일 연방의 회원국들은 불안을 겪는 모든 국가에게 군사적 지원을 보내는 것에 동의했다.[29] 브레데 왕자는 지방의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바이에른 왕국군의 절반을 라인란트팔츠로 이끌었으며, 이로 인해 많은 함바흐의 불운한 연설가들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 그 중 하나였던 부르셴샤프트의 비밀스러운 대표이자 법학도인 카를 하인리히 브뤼게만(1810-1817)은 프로이센에 투옥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사면되었다.[26]

결정적으로, 1817년 바르트부르크 축제와 1832년 함바흐 축제 모두 명확한 통일 계획이 부족했으며, 특히 함바흐에서의 많은 연설가들의 입장은 서로 다른 생각을 확인했다. 통일이라는 이념 하나만으로 뭉친 이들의 생각에는 구체적인 계획 없이 국민들이 교육을 받으면 독일이 스스로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에 기초했다. 웅장한 연설, 깃발, 열정적인 학생들과 피크닉 점심은 새로운 정치, 관료, 행정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헌법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토론에서는 그러한 명확한 문서가 나오지 못했다. 1848년의 민족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했다.[30]

경제와 관세 동맹[편집]

2개의 국경 표지판 사이에 방수포로 덮인 통을 싣고 있는 마차의 운전사가 요금을 지불하고 있는 것을 나타낸 그림. 캡션에는 "1834년 관세 동맹 이전 관습에 대한 독일 만화"라고 쓰여 있다.
이 그림은 1834년경 독일의 많은 국가들에 만연한 국경 통행료에 대한 풍자적인 논평을 제공했다. 어떤 국가들은 너무 작아서 운송업자들이 하루에 두번에서 세번까지 통행료를 내야만 했다.

독일 민족주의의 부상을 어렵게 만드는 여러 다양한 요인들이 존재했다. 인위적인 요인으로는 독일 연방 구성원 간, 특히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정치적 경쟁, 그리고 상업적 이익, 토지 소유와 귀족 간의 사회, 경제적 경쟁 등이 있었다. 자연적인 요인에는 1830년대 광범위한 가뭄과 1840년대 식량 위기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독일의 산업화와 제조업의 변화로 인해 더 많은 문제가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주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작은 마을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는 것이 포함되었다.[31]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혼란, 산업화 기간의 경제적 어려움, 기상 재해들의 압박은 모두 중앙유럽의 문제 증가에 기여했다.[32] 감자역병균[l]과 기상 악화로 인한 1840년대 중반의 식량 위기에 대부분의 국가들이 대처하지 못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부자와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권력자들은 노동계급 사이에 점점 증가하는 불안, 정치·사회적 동요와 지식인들의 불만을 우려했으며, 검열, 벌금, 투옥, 추방과 같은 강압적 방법도 비판을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았다. 이에 더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모두 통일을 주도하기를 원하며 서로 경쟁하고 있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었다.[33]

경제적 통합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관세동맹'(Zollverein)의 형성은 독일의 국가들의 경제적 통일이라는 큰 의미를 얻어냈다. 1818년 프로이센의 재무장관 한스 폰 뷜로 백작이 처음으로 구상한 프로이센의 관세동맹은 프로이센 본토와 호엔촐레른 영토를 경제적으로 통합했다. 이후 30년에 걸쳐 다른 독일 국가들도 이 관세동맹에 합류했다. 관세동맹은 독일 국가들 간의 보호무역주의의 장벽을 낮추는 것에 기여했으며, 특히 국경을 넘어 운송되는 원자재와 제조품의 운송 비용을 줄여 원자재 구입, 운송과 판매 비용을 효과적으로 낮추었다. 이것은 신흥 산업 중심지인 자르강루르강 유역의 라인란트 지역에서 중요한 요소였다.[34] 내륙 지역의 독일 국가들은 해안 지역의 국가들보다 빨리 관세동맹에 가입했는데, 이는 프로이센 주도의 관세동맹의 국제 시장에 대한 외부 관세로 인해 바다로의 관세 면제의 접근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1836년까지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프로이센 남부의 모든 독일 국가들은 관세동맹에 가입했다.[35]

이와는 대조적으로, 해안가에 접한 독일 국가들은 이미 국제 시장에 대한 관세 면제 접근권을 갖고 있었고, 관세동맹에 속할 경우 무역에 있어 수입관세 부담을 원하지 않았다. 북부의 하노버는 1834년의 브라운슈바이크, 1836년 올덴부르크와 함께 '조세동맹'(Steuerverein)을 결성하여 프로이센의 관세동맹에 비해 낮은 외부 관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후 1842년 브라운슈바이크, 1854년 하노버와 올덴부르크마저 프로이센의 관세동맹에 가입했으며,[36]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에는 슐레스비히, 홀슈타인과 라우엔부르크까지 관세동맹에 참여했다. 그리고 국제 무역에 의존하고 있던 메클렌부르크 1867년, 도시국가였던 함부르크와 브레멘은 1888년에 합류했다.[35]

도로와 철도[편집]

19세기 초 독일의 지역들을 연결하는 여러 도로들은 처참한 상태였으며, 외국인과 여행자들은 이전에 병력 수송을 목적으로 위해 유지된 군사적 도로인 '헤르스트라센'(Heerstraßen)의 상태에 대해 매우 불평했다. 그러나 이후 도로가 병력 수송의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면서 도로 상황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프로이센의 포장된 도로는 1816년 3,800 킬로미터 (2,400 mi)에서 1852년 16,600 킬로미터 (10,300 mi)까지 늘어났는데, 이것은 도로를 건설하는 데에 마카담 방식(Makadam)이 개발된 것이 큰 도움을 주었다. 1835년에 하인리히 폰 가게른 남작은 도로를 "국가에게 있어 정맥과 동맥"이라고 강조했으며, 자유, 독립, 번영을 촉진할 것이라고 예측했다.[37] 도로의 개선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기차, 호텔, 식당, 바덴바덴의 스파 등에서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해상 운송 또한 개선되었다. 라인강의 봉쇄는 이전에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해제되었으며, 강선을 상류로 끌고 가는 번거로운 일은 1820년대 증기 기관이 도입되면서 사라졌다. 1846년까지 180척의 증기선이 독일의 여러 강과 보덴 호수를 운항했으며, 다뉴브강, 베저강, 엘베강의 확장 운하망도 이용했다.[38]

이러한 도로와 해상 운송의 개선도 중요했지만, 철도 도입의 영향과는 결코 비교될 수 없었다.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철도 도입과 독일 관세동맹을 '샴쌍둥이'라고 부르며 서로의 중요한 관계를 강조했으며,[39] 시인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은 관세동맹의 역할을 찬양하는 시에서 정치나 외교에 대한 것보다 독일의 통일에 더 많이 기여한 철도에 대해 언급하였다.[40] 나중에 독일의 역사가들은 철도 도입을 독일 통일의 첫 번째 계기라고 여겼으며, 애국 소설가 빌헬름 라아베는 "독일 제국은 최초의 철도 건설로 건국되었다..."라고 언급했다.[41] 그러나 모든 사람이 철도에 대해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베를린에서 포츠담까지 몇 시간 더 빨리 이동하는 것에 별다른 이점이 없다고 생각했고, 메테르니히는 열차를 타는 것을 거부했다. 또한 시인 니콜라우스 레나우는 1838년 자신의 시 《봄으로》(An den Frühling)에서 열차가 독일의 숲의 원시적 고요함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풍경을 위협하는 '악'으로 생각했다.[42]

독일 최초의 여객 겸 화물 열차 노선이었던 바이에른 루트비히 철도는 1835년 뉘른베르크퓌르트를 연결했는데, 비록 6 킬로미터 (3.7 mi)에 불과하고 낮에만 운영되었지만 수익성과 인기 모두 입증되었다. 바이에른 루트비히 철도 운영 3년 만에 141 킬로미터 (88 mi)의 철로가, 1840년에는 462 킬로미터 (287 mi), 1860년에는 11,157 킬로미터 (6,933 mi)의 철로가 건설되었다. 지리적으로 중앙에 위치한 수도와 같은 중심지가 없었던 독일에서 철도는 웹 형태로 건설되어 지역 내의 마을과 시장 등 여러 지역을 연결했다. 철도망의 확장에 따라 운송 비용도 획기적으로 감소했는데, 1840년에는 1톤당 18페니히였던 운송비가 같은 양으로 1870년 5페니히로 감소했다. 또한 철도의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는데, 그 예시로 여러 상품들은 철도를 통해 멈춤 없이 루르 계곡을 지날 수 있었다. 철도는 상품 수요를 창출하고 상업을 촉진함으로써 경제 활동은 장려했다. 1850년에는 내륙 해상 운송이 철도보다 3배 많은 양의 화물을 운송했지만, 1870년에는 역전되어 철도가 4배 더 많이 운송했다. 이 영향은 지위가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일부 외곽 지역을 제외하고, 1865년까지 독일 인구의 대다수가 철도를 이용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제조, 생산 중심지가 철도망에 연결되었다.[43]

지리, 애국, 그리고 언어[편집]

주요 지리 정보(푸른색)를 포함한 1841년경의 독일어권 지역(녹색)과 정치적 국경(회색) 비교하는 지도.

여행이 더 쉽고, 빠르고, 저렴해지면서 독일인들은 언어 이외의 요소에서도 통일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림 동화》를 출간한 그림 형제는 서로 다른 지역 간의 민담과 우화의 스토리텔링 유사점을 강조했으며, 독일어의 근원을 추적하고 독일어의 다양한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44] 또한 카를 베데커는 중앙유럽의 여러 도시와 지역에 대한 가이드북을 작성하여 숙박할 곳, 방문할 곳을 표시하고 성, 전쟁터, 유명한 건물과 사람들에 대한 간략한 역사를 소개하면서, 큰 길가, 피해야할 도로, 하이킹 경로 등도 표시했다.[45]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은 독일 국민의 언어적 통일성 뿐만 아니라 지리적 통일성도 가사를 통해 표현했다. 팔러슬레벤이 붙인 가사가 포함된 《독일인의 노래》(Das Lied der Deutschen)에서 그는 독일 전역의 주권자들에게 독일인들의 통일된 특성을 인식할 것을 촉구했다.[46] 라인강이 '자연적인 동부 경계'였다는 프랑스의 주장에 대해 반발하여 막스 슈네켄부르거가 작성한 가사를 바탕으로 한 《라인 강의 파수꾼》와 같은 애국적인 노래들은 '독일성'이 언어적인 특성 뿐만이 아니라 지리적 특성에도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라인 강의 파수꾼》의 "조국이여 두려워 말지어라. / 굳세고 충실한 파수꾼, 라인 강의 파수꾼!"이라는 후렴구와 니콜라우스 베커의 《라인강》(Das Rheinlied)과 같은 애국적인 시에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영토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1807년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민족적 특성이 지리적 영향을 받아 영토와 사람을 연결한다고 주장하였고, 이 주장은 오래된 요새와 유적지를 보존하려는 운동을 나타나게 만들었으며 특히 이 운동은 프랑스, 스페인 등과 수많은 전투를 벌였던 라인란트에 초점이 맞추었다.[47]

1848-1849년 독일 혁명과 폴란드 봉기[편집]

1848-1849년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혁명은 단일 헌법 아래의 독일의 통일을 추구했다. 혁명가들은 헌법 초안을 작성할 의회를 만들기 위해 여러 주 정부, 그 중에서도 특히 라인란트에 많은 압력을 가했다. 많은 좌익 혁명가들은 궁극적으로 새로 만들어질 헌법이 남성에 대한 보통선거와 상설 의회, 그리고 프로이센 왕의 주도 아래 통일된 독일을 확립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이는 좌익 혁명가들이 프로이센이 독일 국가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지리적으로도 가장 큰 국가였기 때문에 통일 독일을 이끌 가장 좋은 적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중도 우파 혁명가들은 자신의 국가들에서 확장된 참정권을 요구하며 느슨한 독일의 통합을 추구했다. 동시에, 프로이센이 점령한 폴란드 영토의 폴란드인들은 자신들만의 해방 계획을 세웠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편집]

깃발이 꽂혀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와 건물로 행진하는 제복을 입은 남자들을 그린 그림.
의회의 예비 의원들이 프랑크푸르트의 파울 교회로 이동하여 국민의회 투표의 토대를 마련했다.[48]

혁명가들의 압력으로 인해, 납부한 세금에 따라 투표권의 가중치를 부여하여 일부 계급[m]에 더 큰 힘을 주는 프로이센 3부 선거제(Preußisches Dreiklassenwahlrecht)와 같이 투표 참여 자격을 제한한 다양한 선거가 실시되었다.[49]

1849년 3월 27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파울교회 헌법(Paulskirchenverfassung)을 통과시키고 다음 달에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카이저(Kaiser)라는 황제 칭호를 제공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공개적으로 그는 다른 독일 국가들의 동의 없이는 칭호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으며, 개인적으로는 다른 제후들의 반대와 오스트리아나 러시아의 개입을 두려워했다. 이에 더불어 그는 대중에 의해 선출된 의회로부터 칭호를 받는 것을 근본적으로 싫어했으며, 그는 "찰흙"으로 만든 왕관을 거부했다.[50] 자유주의자들이 극복하기를 원했던 주권과 참정권에 대한 여러 문제들을 유발시키는 선거권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헌법 초안을 작성하고 소독일주의 해결책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 비록 국민의회의 시도와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이 추구하던 통일을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독일의 제후들 간의 협력과 개혁에 합의함으로써 가까스로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51]

1848-1849년의 독일 제국에 대한 분석[편집]

독일의 역사학자들은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성공과 실패가 독일의 국민국가 건설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수십 년 간 논쟁을 벌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등장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력을 얻은 존더베크(Sonderweg, 특수한 길) 이념은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를 통해 실패함으로써 부르주아지가 보수주의자[n]들과 타협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52] 또한 존더베크는 1848년 혁명을 통한 통일이 실패하여 1871년 국민국가가 늦게 성립되어 긍정적인 민족적 가치의 발전이 지연되었다고 주장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대중에게 위대한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을 촉구하였는데, 이는 그의 정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단지 그는 존더베크의 주장과 같이 현대까지도 남아 있는 독일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적 가치를 활용했을 뿐이다.[53] 게다가 이러한 여러 주장은 1848년의 실패가 독일 중산층 사이에 잠재된 귀족적 갈망을 재확인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주장은 의식적인 현대화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54]

보다 최근의 학자들은 독일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특수한 길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존더베크와 같은 예외주의적 주장을 거부했다.[55] 대신 현대의 학자들은 1848년의 자유주의 정치인들이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생각과 주장은 이후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사회 정책[o]의 실행에 크게 기여한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존더베크의 주장은 영국과 다른 국가의 경로가 수용된 표준이라는 기본 가정에 기반했다.[56] 이러한 현대 학자들의 주장은 영국 중심의 발전 모델의 규범에 도전한다. 영국과 프랑스, 미국과 같은 정상 국가라고 생각되는 곳들에서도 19세기 중후반의 현대적 민족 국가의 성립은 고르게 발전하지 못했다.[57] 1990년대 말 이후로, 존더베크의 주장은 생각보다 널리 받아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주로 이러한 주장을 국가 사회주의의 시대를 이해하는 데에 생각했다.[58][59]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1. 이 4개의 국가는 오스트리아, 스위스,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을 뜻한다.
  2. 원어로 각각 독일어: Länder or Lande Lauenburg und Bütow, 폴란드어: starostwo drahimskiedlek.
  3. 소독일주의는 독일어권 합스부르크의 다민족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독일의 통일을 주장하는 개념이다.
  4.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너무 작아서 지도에 표시될 수 없었다.
  5. 새로운 명칭이 채택된 이유에는 부분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15세기 후반에 남부, 서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 영토 대부분을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국 개혁으로 인해 제국을 통치하는 데에 있어 독일의 제국 영지의 새로운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6.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매우 많은 비독일어권 영토를 가졌다. 그 예시로 성 이슈트반 왕관령(헝가리 지역)을 지배한 것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분할에 참여한 것이 있다.
  7.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어권의 이전 프로이센 공국 지역과 비독일어권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분할 지역을 포함한다.
  8. 프로이센군은 7년 전쟁을 통해 큰 명성을 얻었지만,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의 전투에서의 굴욕적인 패배로 인해 많은 프로이센인들이 자신의 군대에 대해 느꼈던 자부심을 잃었다. 이 기간 동안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와 같은 몇몇 장교들은 군대 조직 재편과 새로운 훈련 방법을 고려했다.[12]
  9. 연방 의회는 '분데스탁'(Bundestag) 혹은 '연방회의'(Bundesversammlung)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10. 독일 연방의 국경은 프로이센이 점령한 폴란드의 영토 라우엔부르크와 뷔토브 지역과 스타로스트보 드라헤임,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점령한 폴란드의 오시비엥침 공국자토르 공국까지 확장되었지만, 이전의 신성 로마 제국 국경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1. 여기서 이 '3월'은 1848년 3월을 뜻한다.
  12. 이 감자역병균은 아일랜드 대기근을 일으킨 것과 유사하다.
  13. 이 일부 계급에는 주로 부유하고 많은 토지를 보유한 사람들이 속했다.
  14. 여기서 이 보수주의자들은 주로 융커 지주를 의미한다.
  15. 비스마르크의 사회 정책에는 사회 보험, 교육 프로그램, 더 넓은 정의의 참정권의 실현 등이 있다.

참조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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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이러한 주장의 요약은 다음을 참고하라: Blackbourn & Eley 1984, Part 1.
  55. Blackbourn & Eley 1984, Part 1.
  56. Blackbourn & Eley 1984, Chapter 2.
  57. Blackbourn & Eley 1984, 286–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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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이러한 관점에 대한 대표적인 분석은 다음을 참고하라: Evans 1987.

참고 문헌[편집]

같이 읽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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