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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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fc2349 (토론 | 기여)님의 2014년 1월 21일 (화) 03:53 판

틀:야구 팀 정보2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틀:Ja-y, 영어: Tokyo Yakult Swallows)는 일본의 프로 야구 구단이며, 센트럴 리그 소속 구단이다. 모기업은 식품 기업인 야쿠르트이며 대한민국한국야쿠르트를 합작 투자, 설립한 기업이다.

1950년고쿠테쓰 스왈로스(国鉄スワローズ)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었으며, 1978년에는 팀의 센트럴 리그 첫 우승과 같은 해 일본 시리즈 우승을 시작으로 1990년대에 들어서 4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제패하여 팀의 황금기를 장식하기도 하는 등 통산 6번의 리그 우승, 5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같은 연고지인 도쿄 도에 속하고 있으며 메이지 진구 야구장을 전용 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구단의 역사

고쿠테쓰·산케이 시대

1949년 시즌 후 리그 확장 방침에 수반한 구단 난립의 여파로 각지의 고쿠테쓰 철도국(당시) 야구부는 다수의 선수가 유출되게 된다. 고쿠테쓰는 같은해 대폭적인 합리화 정책으로 노사 관계가 악화되었고 고쿠테쓰 직원들의 단결과 의지 함양을 위해 프로 구단 설립을 발안했다. 당시 총재였던 가가야마 유키오 총재가 야구를 대단히 좋아해서 구단 설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는 일본 국유철도법을 저촉하게 되어 고쿠테쓰는 직접 모회사가 될 수 없었고 고쿠테쓰의 하위단체인 재단법인 교통 협력회가 주체가 되어 1950년 1월 12일 재단법인 철도홍제회, 닛폰 통운, 일본 교통공사(현재의 JTB) 등의 기업을 통해 주식회사 고쿠테쓰 구단(株式会社国鉄球団)을 설립, 구단명을 고쿠테쓰 스왈로스(国鉄スワローズ)로 정했다. 고쿠테쓰 참가 직전 센트럴, 퍼시픽 리그는 7개 구단이었고 양리그는 8번째 구단을 환영하고 있었다. 대기업인 고쿠테쓰의 프로 참가로 센트럴 리그 관계자들은 활기를 띄고있었고, 퍼시픽 리그과 벌일 리그 참가 권유 전쟁을 우려한 센트럴 리그와 고쿠테쓰는 이를 극비로 진행했다. 항간에서도 고쿠테쓰의 리그 참가의 소문이 나고 있었지만, 퍼시픽 리그는 “고쿠테쓰가 프로 구단 등을 만들 리가 없다”며 얕잡아 보고 있었기에 리그 참가에 순조롭게 성공했다. 본거지는 전 체신성 총재였던 마쓰마에 시게요시의 노력으로 무사시사카이 역 경계에 위치한 구 나카지마 비행기 공장 철거지에 새로운 야구장 ‘무사시노 그린파크 야구장’를 건설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여러가지 사정에 의해 1956년에 폐쇄되면서 실질적으로 7경기 밖에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신규구단에 비해서 리그 참가가 늦었기 때문에 선수 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자가 부담의 철도국 야구부를 중심으로 다른 사회인 야구단이나 대학 등의 아마추어 야구에서 남아 있는 인재들을 수급하려 했지만 프로 야구 경험자는 전쟁 전 한큐에서 일시적으로 뛴 나카무라 사카에 1명 뿐이었다. 아마추어 야구의 강호였던 철도국 야구부 선수들조차 프로 야구에선 쉽게 통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쇼치쿠 로빈스의 2군 감독이었던 모리야 료헤이와 일찍이 심양만주철도 클럽에 재직하고 있던 우사미 가즈오를 추가로 보강, 클린업을 강화시켰지만 그 후에도 빈공에 시달리며 1950년 8월에는 고등학교를 중퇴하여 입단해 팀의 에이스가 된 가네다 마사이치의 투구에 의해 팀 성적이 좌우되었다. 1951년 ~ 1964년, 총 14년 동안 연속 20승을 준 가네다의 활약으로 최하위는 그닥 기록하지 않았지만, 항상 4위·5위에 성적이 멈춰 추가적인 순위상승은 없었다.

그렇지만 1954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트레이드 되어 온 우노 미쓰오가 팀에 합류하여 맹활약을 펼치면서 같은 해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는 8연승을 거두었다. 거기다가 1956년 우노가 감독으로 취임하여 요미우리를 철저하게 마크하여 11승(13패)을 기록하는 등 대 요미우리전에서 호각의 시합을 펼쳐 고라쿠엔의 고쿠테쓰와 요미우리의 경기는 당시 간토 지방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경기였다고 한다. 1955년에는 마치다 유키히코가 홈런 31개를 쳐내며 팀내 최초의 타격부문 타이틀을 획득했고 1957년에는 가네다가 28승과 평균자책점 1.63을 기록하며 최다승과 최고 평균자책점, 사토 다카오가 홈런 22개를 기록하면서 홈런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1961년 처음으로 리그 3위를 기록하며 A클래스(리그 1위 ~ 3위)를 기록했다. 이듬해인 1962년에는 해마다 기하급수로 증가하는 구단 경영비를 위해 경영 주체를 교통 협력회에서 철도 홍제회로 옮겼으나 공공 기업인 고쿠테쓰의 구단이라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긴축 재정으로 팀을 꾸려갔다. 신인 선수의 계약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상승해 만족할만한 보강을 하지 못하였고 같은 해에 일어난 미카와시마 사고에 대한 비판은 구단에 대해서도 비화되고 있었다. 결국 1963년 8월, 구단 양도를 전제로 산케이 신문, 후지 TV 등과 묶어 후지산케이 그룹으로 사실상 구단 경영 주체가 바뀌었다.

1964년 경영 주체가 된 후지 TV를 통해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서 홈구장을 고라쿠엔 구장에서 메이지 진구 야구장으로 이전했다. 같은 해 오프 시즌 하야시 기이치 감독의 경질과 유임을 둘러싸고 산케이 신문과 국철이 격렬하게 대립했다. 에이스 투수인 가네다가 “하야시 감독이 유임될 경우에는 이적하겠지만, 해임당한다면 잔류하겠다”라는 내용의 성명을 낸 것으로부터 고쿠테쓰는 완강히 하야시의 경질을 주장했다. 한편 산케이 측에서는 타사 매스컴(요미우리 신문,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에 의해 ‘하야시 감독 경질’이라는 기사가 퍼져나가고 있었고 논의는 평행선을 걷다가 최종적으로는 경영 주체의 산케이 측이 유임을 강행했다. 결국 하야시 감독은 유임되었고 가네다는 특권을 행사해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가네다를 잃고 고쿠테쓰는 경영 의욕을 완전히 상실했고, 후지산케이 그룹에 경영권을 모두 양도함으로써 구단경영에 손을 때기로 결정했다. 원래 고쿠테쓰 구단은 업무가 제휴된 이후 후지산케이 그룹의 자금력에 의존하고 있어 이양은 시간의 문제라고 보였지만 결국 갈등 끝에 결별과 구단 양도라는 결과로 끝나고 말았다.

구단 이양으로 1965년 5월 10일, 산케이 신문과 후지 TV 등이 모회사가 되어 산케이 스왈로스(サンケイスワローズ)로 팀 이름을 개칭했다. 게다가 1966년 데즈카 오사무가 당시 구단 후원회 부회장이었고, 어린이 야구팬을 늘린다는 목적이 맞아 떨어지면서 아톰을 팀 마스코트로 이용, 팀명을 산케이 아톰스(サンケイアトムズ)로 변경, 운영회사명을 주식회사 산케이 아톰스(株式会社サンケイアトムズ)로 개칭했다. 같은 해 야쿠르트 본사가 주식을 취득해 구단 경영에 참여했다.

1969년 산케이 신문 본사의 실적 부진 때문에 산케이는 가지고 있던 구단 주식의 일부를 야쿠르트에 매각했다. 구단 경영에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던 미즈노 시게오가 갑작스런 병으로 쓰러면서 뒤를 이은 시카나이 노부다카가 후지산케이 그룹의 사업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에 들어가, 프로 야구 구단 경영에선 물러나고 자본 관계만 이어가기를 결정했다. 야쿠르트 본사는 표면상 공동경영을 표방하며 구단명을 아톰스(アトムズ)로 바꾸고 운영 회사명을 주식회사 아톰스 구단(株式会社アトムズ球団)으로 바꿨지만, 실질 경영권은 야쿠르트 본사가 쥐게 되었다. 1970년 1월 7일에는 야쿠르트 본사가 공식으로 단독 경영권을 가지게 되어 구단명을 야쿠르트 아톰스(ヤクルトアトムズ)로, 운영 회사명을 주식회사 야쿠르트 아톰스(株式会社ヤクルトアトムズ)로 개칭했다.

야쿠르트 시대

  • 1970년 시즌 동안 무려 92패를 기록하며 리그 최하위에 그쳤다. 8월에는 1936년 다이토쿄군과 타이를 이루는 16연패를 기록, 양대 리그 분열 이후 당시 최악의 기록이었고 현재도 센트럴 리그 사이에서는 무승부가 없는 최다 연패 기록을 세웠다(퍼시픽 리그에선 지바 롯데 마린스의 18연패(무승부 1회 포함)을 당했다). 덧붙여 센트럴 리그에서는 2003년에 요코하마 베이스타스가 94패를 기록하기 전까지는 시즌 90패 달성 구단이 추가로 나오지 않았다.
  • 1971년 미하라 오사무를 신임 감독으로 초빙했으나 3년 연속 B클래스에 머물렀다. 1972년에는 나카니시 후토시 타격 코치의 지도를 받은 와카마쓰 쓰토무가 수위 타자에 올랐고, 야스다 다케시가 1972년과 1973년 2년 연속으로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하며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다.
  • 1973년 11월 26일, 해당 프로덕션의 도산에 수반하여 아톰 캐릭터의 사용을 멈추고 팀명을 ‘야쿠르트 스왈로스’(ヤクルトスワローズ)로 바꿨다.
  • 1976년 5월 13일부터는 아라카와 히로시를 대신해 히로오카 다쓰로가 감독으로 취임했다. 1977년에는 구단 창단 이래 처음으로 2위를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고쿠테쓰 시대였던 1962년부터 그 해까지 15년 연속 시즌 우승 실패를 기록, 센트럴 리그 사상 최악의 기록이 된다. 일본 기록은 난카이 호크스 시대였던 1978년부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시대의 1993년에 걸쳐 기록한 16년 연속 우승 실패 기록이다.
  • 1978년에는 와카마쓰, 오스기 가쓰오, 찰리 매뉴엘, 스기우라 도루, 마쓰오카 히로무, 스즈키 야스지로, 야스다 등의 활약에 힘입어 리그 3연패를 노리던 요미우리를 누르고 구단 창립 29년 만에 첫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하다는 평가를 뒤집고 한큐 브레이브스를 4승 3패로 힘겹게 누르고 첫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 다음해인 1979년, 매뉴엘을 방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제대로 된 보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개막 8연패와 함께 순탄찮은 개막을 맞이했고, 5월 하순 승률을 5할까지 돌려놓는데는 성공했으나 이후에는 다시 최하위로 떨어졌다. 8월에는 수석 코치의 모리 마사히코가 해임되었고 이에 격노한 히로오카가 도중 휴양을 이유로 사임했다.
  • 1980년 다케가미 시로가 후임 감독으로 취임,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제외한 다른 구단들에게 15승 이상을 거두며 선전했으나 히로시마한테 시즌 내내 거의 패배를 반복하며 히로시마에 뒤를 이은 2위를 기록했다.
  • 1981년 찰리 매뉴엘이 복귀하면서 두 번째 리그 우승에 대한 기대를 높였지만 매뉴엘은 노화에 따른 부진으로 12개의 홈런을 때리는데 그친데다가 와카마쓰와 존 스콧 등이 연달아 부상을 당하며 외야진이 붕괴돼 아오키 미노루가 도루왕을 따내는 등 홀로 활약했으나 결국 리그 4위에 그쳤다. 그 후 2년간 최하위를 기록하며 팀 성적이 침체에 빠졌다. 1983년 요미우리와 추첨 경쟁 끝에 입단 교섭권을 획득한 아라키 다이스케가 입단했지만, 시즌이 끝난 후 오스기가 현역에서 은퇴했다.
  • 1984년 다케가미 시로 감독이 시즌 도중 휴양을 이유로 사임, 나카니시가 임시 감독을 맡았다가 또 다시 사임, 투수 코치였던 도바시 마사유키가 신임 감독으로 취임하여 리그를 5위로 마쳤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5년1986년에는 2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끝내 도바시마저 물러났다. 1985년 시즌 종료 후 1978년 우승의 주역이었던 배터리 마쓰오카와 오야 아키히코가 함께 은퇴했다.
  • 1986년 세키네 준조를 감독으로 초빙, 1987년에는 시즌 도중에 입단한 밥 호너가 ‘호너 선풍’을 일으키며 팀은 4위로 뛰어올랐다.
  • 1987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다이요 웨일스와 추첨 끝에 나가시마 가즈시게가 교섭권을 얻었다. 1988년은 시즌 5위에 그쳤지만 히로사와 가쓰미이케야마 다카히로가 30홈런 이상을 때려내며, 대 요미우리전에서 8년 만에 상대 전적에서 앞섰다.
  • 1989년 래리 패리쉬가 홈런왕 타이틀을 따냈으나 팀은 리그 4위에 그쳤다. 시즌 종료 후 세키네 감독이 물러나고 와카마쓰가 현역에서 은퇴했다.
  • 1990년 노무라 가쓰야가 신임 감독으로 취임, 신인 포수 후루타 아쓰야를 주전 포수로 기용한데 이어 이이다 데쓰야야나다 고이치를 주전 멤버로 발탁했다.
  • 1991년 6월에 12연승을 기록하며 한때 리그 선두에 올라섰으나, 이후 힘을 잃어가면서 결국 선두 자리를 놓쳤다. 그러나 리그 최종전에서 승리하는 등 11년 만에 A클래스를 기록하였고, 후루타는 노무라 이후 26년 만에 포수 출신 수위 타자에 올랐다.
  • 1992년 히로시마, 요미우리, 한신과 치열한 우승 쟁탈 4파전을 벌인다. 니시무라 다쓰지오카바야시 요이치를 제외하곤 전반적으로 허술했던 선발진은 4월 다카노 히카루, 5월 이토 아키미쓰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던 베테랑들이 부활하면서 리그 전반기를 3위로 마쳤다. 리그 후반기에 들어가면서 전반기 8홈런에 그쳤던 잭 하웰이 홈런을 양산해내며 선두로 치고 나선다. 그러나 팀은 9월에 9연패를 기록하는 등 선두에서 다시 한차례 내려오게 되며 리그 막판 위기를 맞이했지만 이 상황에서 4년간 등판 기록이 없었던 아라키가 부활 피칭을 선보이며 팀을 위기에서 건져냈고 10월 10일 한신의 홈구장인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의 직접 맞대결에서 잭 하웰의 2연타석 홈런과 아라키의 호투, 이토의 마무리로 14년 만에 정규 리그를 제패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도 오카바야시의 열투로 세이부 라이온스를 상대로 혈투를 펼치지만 끝내 3승 4패로 물러나며 일본시리즈 제패에는 실패했다.
  • 1993년 다카쓰 신고가 마무리 투수 자리에 자리잡았고, 이토 도모히토도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7승, 평균자책점 0.91로 활약했으며 타선에서도 히로사와가 타점왕을 차지한데 이어 하웰이 끝내기 홈런 5방을 포함해 승부처 상황에서 맹활약하며 정규 리그 2연패에 성공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도 세이부를 4승 3패로 꺾고 전년도의 패배를 설욕하며 15년 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 1994년 후루타가 오른손 부상을 당해 전력에서 제외되는 등 이 영향으로 리그 4위에 그쳤다.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했던 히로사와가 요미우리로 입단했고, 자유 계약으로 풀린 상태였던 잭 하웰도 요미우리로 이적하였다.
  • 1995년 히로사와와 하웰이 요미우리로 이적하면서 요미우리를 상대로 불리한 개막전이 점쳐졌지만 개막 2차전에서 구와타 마스미가 위협구로 퇴장당한 것을 계기로 역전승에 성공하며 흐름을 끌어왔다. 한신에서 방출당했던 토머스 오말리가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은 진구 구장에서 홈런을 양산했고, 새로 입단한 외국인 선수 테리 브로스9월 9일 요미우리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등의 맹활약, 9월 30일에는 요미우리를 끌어내리고 2년 만에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일본 시리즈에서 이치로가 이끄는 오릭스 블루웨이브를 상대하게 되었는데 오말리의 맹활약과 함께 후루타를 중심으로 한 배터리 조합이 이치로를 봉쇄하면서 4승 1패로 2년 만에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라섰다.
  • 1996년 다바타 가즈야가 이적 첫 해에 12승을 올리는 등 ‘노무라 재생공장의 최고 걸작’이라 불리며 선전했으나, 팀은 리그 4위에 그쳤다.
  • 1997년 히로시마로부터 자유 계약 입단한 고바야카와 다케히코가 요미우리와의 개막전에서 사이토 마사키를 상대로 3연타석 홈런을 뽑아내며 활약하는 등 팀의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개막 전까지는 저평가되던 드웨인 호지가 요미우리의 마쓰이 히데키를 누르고 홈런왕 자리에 올랐으며 투수진에선 다바타가 15승, 이토가 다카쓰와 더블 스토퍼 자리를 맡으며 부활했다. 리그 막판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게 3.5경기차까지 쫓기며 위기를 맞았으나 9월 2일 맞대결에서 이시이 가즈히사가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며 요코하마를 물리치고 2년 만에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일본 시리즈에서 세이부를 4승 1패로 누르며 4번째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 1998년 개막 직전에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맞트레이드로 노구치 도시히로를 보내고 후에 선수협 회장이 되는 시로이시 노리유키를 영입했다. 그리고 고졸 신인의 이가라시 료타 영입에 성공하며 구단 사상 최초로 팜 일본 시리즈를 제패하였으나 1군은 리그 4위에 그쳤고, 노무라 감독이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용퇴하며 와카마쓰 쓰토무가 신임 감독으로 취임했다.
  • 2001년 요미우리를 누르고 4년 만에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도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를 4승 1패로 누르고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라섰으며, 그 후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위 이상을 유지하는 등 4년 연속 A클래스 안에 포함되었는데 4년 연속으로 A클래스를 확보한 것은 구단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그러나 2003년에는 요미우리와 공동 3위를 차지했으나 전년도 순위에서는 요미우리가 우세했기 때문에 홈 개막권은 얻지 못했고, 2005년 개막전은 원정으로 치르게 되었다.
  • 2004년에는 시즌 총 점수 득실차가 -73을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72승 2무 64패를 기록하며 시즌을 2위로 끝마쳤다.

도쿄 야쿠르트 시대

  • 2006년 시즌부터 후루타 아쓰야가 선수 겸 감독으로 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2005년 12월 19일 프로 야구 실행위원회에서 현지민에게 더욱 더 밀착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東京ヤクルトスワローズ)로 팀명을 바꾸겠다는 의견이 승인되어 유니폼에 고쿠테쓰 시절 이후 처음으로 ‘Tokyo’의 문자가 다시 새겨졌다.
  • 2006년에는 전년도 시즌과 같이 릭 거톰슨이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등의 활약으로 교류전 2위에 올랐으나 교류전 종료 후 승률이 5할 부근에서 정체되어 결국 리그 3위를 기록하는 등 우승 쟁탈전에 합류하지는 못했으나 2년 만에 A클래스에 진입했다.
  • 2007년은 부상 악령에 시달린 한 해였다. 이가라시와 이시이 히로토시로 구성된 ‘로켓 보이즈’가 수술의 영향으로 최악의 시즌을 지낸 것과 함께 디키 곤잘레스, 애덤 릭스, 다카쓰 신고 등 주력 선수들이 부상에 의한 라인업에서 연달아 이탈하면서 시즌 내내 제대로 된 전력을 갖출 수 없었다. 결국 수위 타자에 아오키 노리치카, 타점왕에 알렉스 라미레스, 다승왕에 세스 그레이싱어 등 투수와 타자 부문에서의 타이틀을 석권했음에도 불구하고 21년 만에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다. 9월에는 후루타 선수 겸 감독이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했고, 이토 아키미쓰도 사의를 표명하면서 경험 많은 코치였던 야에가시 유키오가 수석 코치 대리를 겸임했다. 10월 25일 닛폰햄의 제너럴 매니저에서 물러난 다카다 시게루가 감독으로 취임했으며 세이부 투수코치에서 물러났던 아라키가 야쿠르트의 1군 투수코치로 복귀했다. 그러나 다승왕을 차지했던 세스 그레이싱어가 요미우리로 이적한데 이어 이시이 가즈히사가 FA로 세이부로 이적했다. 연초 후지이 슈고를 대상으로 한 3대3 트레이드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 진행했지만 후지이의 방출로 팀내 선발 투수가 부족해져 버렸다.
  • 2008년 시즌, 요미우리를 상대로 개막 3연승을 거두는 등 4월 막판에 3위로 올라섰으나 이시카와 마사노리, 다테야마 쇼헤이의 뒤를 받쳐주며 상승세를 이어갈 선발 투수 자원이 부족했고, 야수진에선 후쿠치 가즈키, 이이하라 야스시를 중심으로 분투했으나 애런 가이엘이 부상때문에 이탈하는 등 클린업 타선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이후 베이징 올림픽 도중 아오키와 미야모토가 부상으로 1군 라인업에서 제외되는 등 악재가 겹쳤고 시즌 막판 8연패(그중 2경기는 끝내기 패배)를 당하며 3위 싸움을 벌이던 주니치와 요코하마와의 경기차가 벌어지며 5위에 그쳤다. 그러나, 작년까지 완전히 무너졌던 구원투수진이 부상으로 시름하던 중 입단한 임창용과 전년도의 등판이 없었던 이가라시 료타의 부활, 오시모토 다케히코의 영입, 선발로 별다른 성적을 내지못하던 마쓰오카 겐이치가 불펜으로 전향 하고 주목할만한 결과를 남기며 불펜진이 완전히 정비된데다가 요시노리의 등장이나 새롭게 주전이 된 젊은 야수의 대두 등 2009년 이후의 발판을 잡은 1년이었다.
  • 2009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로부터 포수 아이카와 료지을 자유계약 영입하는 동시에 장타력을 보강하기 위해 제이미 댄토나를 영입했다.
  • 2009년 시즌, 초반 2위에 오른 이후 쭉 2위 자리를 지키며 전반기 최대 승차(+14)를 기록하며 질주했지만 후반기인 8월에는 1971년 이후 최악의 기록인 월간 18패(7승), 9월에도 1992년 이후 처음으로 9연패를 당하는 등 팀 분위기가 급격히 흔들렸다. 거기다 팀을 이끌어온 다나카 히로야스, 가와시마 게이조, 이이하라 등이 부상으로 팀 전력에서 이탈하는 것을 비롯해 미야모토가 부상에도 불구하고 경기 출전을 강행하는 등 난조가 계속됐다. 그 영향으로 시즌 한 때 한신과 히로시마에 밀리며 리그 5위까지 쳐졌으나 위기의 순간에 다카기 히로미쓰, 오니자키 유지가 등장하면서 분위기를 추스렸고 10월 9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하며 3위를 확정지어 3년 만에 A클래스를 기록하는 등 클라이맥스 시리즈 첫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후반기 부진의 영향으로 사상 첫 5할 승률 미만 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출장 기록을 남겼다. 2위였던 주니치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1 스테이지 1차전에선 이시카와의 호투와 댄토나의 홈런, 임창용의 깔끔한 마무리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해 인플루엔자 범유행의 영향으로 주전 선수들이 이탈하면서 1승 뒤 2연패로 포스트 시즌을 마무리지었다.
  • 2010년, 한신에서 FA 자격을 얻고 팀에 합류한 후지모토 아쓰시의 맹활약으로 도쿄 돔에서 치룬 요미우리와의 개막 3연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좋은 시작을 보였으나 4월 이후 교류전 9연패를 포함해 하락세를 보이며 한 때는 리그 최하위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결국 5월 26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다카다 감독이 사임하면서 수석 코치였던 오가와 준지가 감독 대행을 맡아 팀을 이끌었다. 6월 조시 화이트셀을 영입하며 타선을 보강했고 계투진 보강을 위해 와타나베 고키, 야마기시 미노루를 영입했다. 오가와 감독대행 취임 이후 투타의 조화가 맞아떨어지기 시작하면서 팀 상황이 호전되어 가기 시작했고 6월에는 14승 8패, 7월 11승 8패, 8월 10연승을 포함해 18승 8패로 극적인 반전에 성공했다. 8월 24일 요코하마전에서 승리하면서 승률이 5할대로 복귀했고 이후 리그 3위 추격에 대한 불씨를 지폈다. 그러나 전반기의 열세를 결국 뒤집지 못하고 72승 4무 68패를 기록하며 리그 4위에 그쳤다. 그러나 6년 만에 승률이 5할을 넘은 시즌이었고 2011년에 대한 희망을 볼 수 있는 시즌이었다.
    • 특히 2010년 시즌은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했던 주니치와의 전적에서 성적이 좋았다. 센트럴 리그 구단의 골칫거리였던 나고야 돔에서 리그에서 유일하게 좋은 성적을 냈고(시즌 통산 7승 1무 4패, 오가와 체제에 한정하면 5승 1패) 주니치와의 상대 전적도 15승 1무 8패로 유일하게 앞섰다. 특히 오가와 감독대행 체제 이후로는 12승 3패로 압도했다. 다카다 감독 시대에 제대로 풀어내지 못했던 요미우리전에서도 후반기에는 3연승을 포함한 요미우리전 5연승 등도 있었으며 오가와 감독대행 체제에 이후로는 8승 1무 7패로 앞섰다. 그 외에도 젊은 투수진이 크게 성장하면서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한 투수 4명을 배출한데다가 센트럴 리그 2위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등 투수진의 안정감이 눈에 띈 1년이었다.
  • 2011년,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때문에 개막전을 3월 25일에서 4월 12일로 연기했다. 블라디미르 발렌틴하타케야마 가즈히로의 활약으로 4월 하순에 센트럴 리그 1위에 올랐다. 그 후로 계속 1위를 유지했으며 8월에는 한신 타이거스가 선두자리를 추격했지만 9월에 9연승으로 한신의 추격을 따돌렸다. 그러나 1위의 주역이였던 발렌타인과 하타케야마등 주력 타자가 부진에 빠졌다. 그리고 요시노리, 다테야마, 이시카와, 미야모토 등 선발투수들이 부상 또는 폐렴 등의 이유로 전력에 누수가 생김으로 인해서 시즌 후반 스왈로스와 10경기 이상의 차이로 2위였던 주니치에게 막판 추격을 받게된다. 리그 우승을 좌우할 수 있는 나고야 돔에서 맞대결은 9월 이후 1승 8패(5연패)의 성적 등으로 1위 자리를 내주고 리그 2위를 하게된다. 요미우리와의 경기 결과는 12승 4무 8패로서 10년 동안 연패였던 기록을 11년 만에 종결시켰다. 클라이막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3위 요미우리에게 2승 1패를 기록하며 구단 역사상 첫 파이널 스테이지에 올라갔으나 리그 2연패를 달성한 주니치에게 2승 4패(어드밴티지 1승 포함)로 10년만의 일본 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역대 감독

〈 〉은 재임 차수.

연도별 성적

연도 감독 순위 경기 승리 패전 무승부 승률 승차 타율 홈런 평균자책점
1950년 니시가키 도쿠오 7위 138 42 94 2 .309 57.5 .244 66 4.67
1951년 니시가키 도쿠오 5위 107 46 59 2 .438 31.5 .245 36 3.96
1952년 니시가키 도쿠오 5위 120 50 70 0 .417 33 .238 67 3.38
1953년 니시가키 도쿠오 6위 125 45 79 1 .363 42 .235 55 3.36
1954년 후지타 소이치 5위 130 55 73 2 .430 32 .258 61 3.34
1955년 후지타 소이치 5위 130 57 71 2 .445 34.5 .228 93 2.69
1956년 우노 미쓰오 4위 130 61 65 4 .485 21 .218 58 2.64
1957년 우노 미쓰오 4위 130 58 68 4 .462 15.5 .226 83 2.74
1958년 우노 미쓰오 4위 130 58 68 4 .462 17.5 .223 59 3.10
1959년 우노 미쓰오 4위 130 63 65 2 .492 15.5 .230 62 3.19
1960년 우노 미쓰오 6위 130 54 72 4 .431 16 .232 73 3.09
1961년 스나오시 구니노부 3위 130 67 60 3 .527 5.5 .227 58 2.29
1962년 스나오시 구니노부 6위 134 51 79 4 .392 24 .201 60 2.61
1963년 하마사키 신지 4위 140 65 73 2 .471 18 .241 95 3.15
1964년 하야시 기이치 5위 140 61 74 5 .452 18.5 .242 117 3.43
1965년 하야시 기이치·스나오시 구니노부 6위 140 44 91 5 .326 45.5 .221 64 3.42
1966년 이이다 도쿠지 5위 135 52 78 5 .400 37 .214 86 3.16
1967년 이이다 도쿠지 5위 135 58 72 5 .446 26 .240 120 3.68
1968년 벳쇼 다케히코 4위 134 64 66 4 .492 13 .239 130 3.28
1969년 벳쇼 다케히코 5위 130 58 69 3 .457 16.5 .244 139 3.71
1970년 벳쇼 다케히코·오가와 요시하루 6위 130 33 92 5 .264 45.5 .215 69 3.78
1971년 미하라 오사무 6위 130 52 72 6 .419 19 .234 94 3.03
1972년 미하라 오사무 4위 130 60 67 3 .472 14.5 .254 115 3.73
1973년 미하라 오사무 4위 130 62 65 3 .488 4.5 .228 78 2.60
1974년 아라카와 히로시 3위 130 60 63 7 .488 12 .233 111 3.14
1975년 아라카와 히로시 4위 130 57 64 9 .471 16 .245 101 3.31
1976년 아라카와 히로시·히로오카 다쓰로 5위 130 52 68 10 .433 23.5 .260 128 3.88
1977년 히로오카 다쓰로 2위 130 62 58 10 .517 15 .267 170 4.01
1978년 히로오카 다쓰로 1위 130 68 46 16 .596 - .279 157 4.38
1979년 히로오카 다쓰로 6위 130 48 69 13 .410 19 .252 157 4.60
1980년 다케가미 시로 2위 130 68 52 10 .567 6.5 .270 132 3.17
1981년 다케가미 시로 4위 130 56 58 16 .491 13.5 .255 120 4.30
1982년 다케가미 시로 6위 130 45 75 10 .375 23.5 .240 95 3.64
1983년 다케가미 시로 6위 130 53 69 8 .434 19 .266 149 4.52
1984년 다케가미 시로·도바시 마사유키 5위 130 51 71 8 .418 25 .264 101 4.76
1985년 도바시 마사유키 6위 130 46 74 10 .383 26.5 .264 143 4.75
1986년 도바시 마사유키 6위 130 49 77 4 .389 27.5 .252 119 4.27
1987년 세키네 준조 4위 130 58 64 8 .475 19.5 .260 159 4.51
1988년 세키네 준조 5위 130 58 69 3 .457 22 .246 147 3.79
1989년 세키네 준조 4위 130 55 72 3 .433 28.5 .254 140 3.97
1990년 노무라 가쓰야 5위 130 58 72 0 .446 30 .257 123 4.24
1991년 노무라 가쓰야 3위 132 67 63 2 .515 7 .259 140 3.93
1992년 노무라 가쓰야 1위 131 69 61 1 .531 - .261 173 3.79
1993년 노무라 가쓰야 1위 132 80 50 2 .615 - .263 140 3.20
1994년 노무라 가쓰야 4위 130 62 68 0 .477 8 .250 130 4.05
1995년 노무라 가쓰야 1위 130 82 48 0 .631 - .261 147 3.60
1996년 노무라 가쓰야 4위 130 61 69 0 .469 16 .264 103 4.00
1997년 노무라 가쓰야 1위 137 83 52 2 .615 - .276 138 3.26
1998년 노무라 가쓰야 4위 135 66 69 0 .489 13 .253 97 3.69
1999년 와카마쓰 쓰토무 4위 135 66 69 0 .489 15 .264 141 4.23
2000년 와카마쓰 쓰토무 4위 136 66 69 1 .489 12 .264 137 3.62
2001년 와카마쓰 쓰토무 1위 140 76 58 6 .567 .274 148 3.41
2002년 와카마쓰 쓰토무 2위 140 74 62 4 .544 11 .263 142 3.39
2003년 와카마쓰 쓰토무 3위 140 71 66 3 .518 15.5 .283 159 4.12
2004년 와카마쓰 쓰토무 2위 138 72 64 2 .529 7.5 .275 181 4.70
2005년 와카마쓰 쓰토무 4위 146 71 73 2 .493 17.5 .276 128 4.00
2006년 후루타 아쓰야 3위 146 70 73 3 .490 18 .269 161 3.91
2007년 후루타 아쓰야 6위 144 60 84 0 .417 20.5 .269 139 4.07
2008년 다카다 시게루 5위 144 66 74 4 .471 17.5 .266 83 3.75
2009년 다카다 시게루 3위 144 71 72 1 .497 22 .259 116 3.97
2010년 다카다 시게루 4위 144 72 68 4 .514 6.5 .268 124 3.85
2011년 오가와 준지 2위 144 70 59 15 .543 2.5 .244 85 3.36
2012년 오가와 준지 3위 144 68 65 11 .511 20 .260 90 3.35
2013년 오가와 준지 6위 144 57 83 4 .407 28.5 .253 134 4.26
  • 2013년 시즌 종료 기준, 순위에서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 통산 성적 : 3860승 292무 4382패(승률 .468)

구단 기록

경기·승패·승률에 관한 기록

1950년부터 현재까지의 팀 순위, 붉은점은 일본 시리즈 우승을 나타냄
  • 리그 우승 : 6회
(1978년, 1992년, 1993년, 1995년, 1997년, 2001년)
  • 일본 시리즈 우승 : 5회
(1978년, 1993년, 1995년, 1997년, 2001년)
  • A클래스 : 18회
(1961년, 1974년, 1977년 ~ 1978년, 1980년, 1991년 ~ 1993년, 1995년, 1997년, 2001년 ~ 2004년, 2006년, 2009년, 2011년 ~ 2012년)[1]
  • B클래스 : 46회
(1950년 ~ 1960년, 1962년 ~ 1973년, 1975년 ~ 1976년, 1979년, 1981년 ~ 1990년, 1994년, 1996년, 1998년 ~ 2000년, 2005년, 2007년 ~ 2008년, 2010년, 2013년)
  • 연속 A클래스 진입 최장 기록 : 4년(2001년 ~ 2004년)
  • 연속 B클래스 최장 기록 : 12년(1962년 ~ 1973년)
  • 최다 승리 : 83승(1997년)
  • 최다 패전 : 94패(1950년)
  • 최다 무승부 : 16무(1978년, 1981년)
  • 최고 승률 : .631(1995년)
  • 최저 승률 : .264(1970년)
  • 게임 최다 득점 : 22득점(1955년 7월 13일 대 히로시마 카프)
  • 게임 최다 실점 : 22실점(1999년 7월 22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그 외의 기록

  • 연간 최다 병살타 : 140개(1996년, 센트럴 리그 기록)
  • 최소 경기차 : 4.5경기차(1973년)
  • 최대 경기차 : 57.5경기차(1950년)
  • 최다 연승 : 12연승(1991년)
  • 최다 연패 : 16연패(1970년)[2]
  • 최다 홈런 : 181개(2004년)
  • 최소 홈런 : 36개(1951년)
  • 최고 타율 : .283(2003년)
  • 최저 타율 : .201(1962년)
  • 최고 평균자책점 : 2.29(1961년)
  • 최저 평균자책점 : 4.76(1984년)
  • 연속 안타 타석수 : 11타석(2009년, 프로 야구 기록과 기네스 세계 기록)

팀 개인 기록

투수
타자
  • 시즌 200안타 달성
아오키 노리치카(2005년, 2010년)[3]
알렉스 라미레스(2007년)[4]

역대 홈구장

역대 한국인 선수, 코칭스텝 (재일교포 포함)

주석

  1. 2003년은 요미우리와 동률인 3위였으며 2002년은 요미우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야쿠르트가 2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2005년의 홈 경기 개막권을 얻지 못했다.
  2. 무승부를 사이에 두지 않은 연패로서는 프로 야구 최다 기록(무승부를 사이에 두었을 경우의 기록은 1998년 지바 롯데 마린스의 18연패)
  3. 사상 2번째이며, 여러 차례의 달성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기록.
  4. 사상 3번째이며, 우타자로서의 달성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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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