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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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j (토론 | 기여)님의 2014년 5월 6일 (화) 13:33 판 ({{대한성공회}})

대한성공회(大韓聖公會, 영어: Anglican Church of Korea)는 한국성공회관구이다. 1993년 세계성공회공동체에 속하는 자치적인 지역 교회(관구, Province)가 되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세계 성공회 공동체(Anglican Communion)의 일원으로 국제적으로는 잉글랜드 선교부와, 국내적으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 가입되어 있으며, CBS 기독교방송, 대한성서공회 등과 협력중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교회연합에는 가입 안 했지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했다. 신학적으로 진보적이어서 한국 기독교 장로회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계에서 진보적인 교회로 불린다.

교회의 역사

선교사들의 성공회 이식

1890년 영국 성공회의 찰스 존 코프(Bishop Charles John Corfe 한국이름 고요한) 주교가 5명의 사제와 미국 펜실베니아 출신 의사 랜디스와 함께 부산항으로 입국하였다. 첫 교회는 제물포(현 인천 내동교회) 시작했으며, 이 후 서울에 주교좌 교회를 세우며, 성공회는 조선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사회선교

조선에 뿌리를 내린 성공회는 대한제국 개화기에 신교육을 보급하기 위하여 각지에 신명학교를 설립하고, 인천, 여주, 진천 등지에 병원을 설립하였으며, 수원과 안중에는 보육원을 개설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전래된 장로교, 감리교 등과는 달리 적극적인 전도보다는 사회선교로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는 것에 무게를 두었다.

토착화

그리고 성공회는 선교 초기부터 한국 문화의 토양 깊이 뿌리를 내린 교회가 되고자 토착화에 힘썼다. 그래서 한국 건축 양식인 한옥으로 지은 성공회 성당들이 지금도 강화 (강화성당, 온수리성당), 진천 (진천성당), 청주 (수동성당) 등에 남아 있다.

한국전쟁과 성장

대한성공회는 1950년 한국전쟁때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임신부이던 윤달용(모이서) 신부와 성공회대학교교수로 활동하던 조용호(디모데)신부를 비롯한 성공회성직자들이 순교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1965년 이천환(바우로) 주교가 최초의 한국인 성공회 주교로 주교서품을 받는 등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당시 교구도 서울교구대전교구로 분리되었는데, 후에 부산교구대전교구에서 독립하였다. 그리고 교육기관에는 성공회대학교가있다.

2011년 현재 대한성공회 의장주교는 김근상(바우로)주교이다.

연혁

  • 1890년 : 대한성공회 초대주교 존 코프(한국이름 고요한)가 한국 선교 시작.
  • 1897년 : 강화성당 설립.
  • 1900년 : 온수리성당 설립.
  • 1905년 : 2대 주교 터너(한국이름 단아덕) 주교 서품.
  • 1911년 : 3대 주교 트롤로프 (한국이름 조마가) 주교 서품.
  • 1914년 : 성 미카엘 신학교 개교 (현재 성공회대학교)
  • 1931년 : 4대 주교 쿠퍼 (한국이름 구세실) 주교 서품.
  • 1955년 : 5대 주교 존 데일리 (한국이름 김요한) 주교 서품.
  • 1965년 : 서울교구, 대전교구 분리됨, 서울교구 초대 한국인 주교 이천환 주교 서품.
  • 1974년 : 대전교구에서 부산교구 분리됨.
  • 1993년 : 독립 관구가 됨.

대한 성공회 관련 기관

소속 교구

같이 보기

바깥 고리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