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 폐지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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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 폐지운동(奴隸制廢止運動, Abolitionism)은 19세기서유럽미국에서 노예 제도의 폐지를 목적으로 전개된 인도주의적 개혁 운동이다.

유럽에서의 역사

영국에서의 노예제 반대운동

15세기포르투갈아프리카 서해안에서 최초의 노예 무역을 시작한 이래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노예 시장화시켰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성공회 평신도이자 국회의원윌리엄 윌버포스감리교창시자이자 성공회 신부존 웨슬리 신부의 지지에 힘입어 노예 제도의 폐지를 추진함으로써 1807년 노예 무역이 폐지되었으며, 1833년에는 대영 제국 전체에서 노예 제도가 없어졌다. 하지만 영국의 노예제 반대 운동은 국익 차원이라서 순수한 인도주의적 운동으로 보기는 어렵다고도 한다.[1]

유럽에서의 노예제 반대운동

노예 제도 반대 투쟁은 근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교도소 재소자들의 인권 향상, 주일학교 운동, 아동 노동 반대 등과 더불어 실천하던 기독교사상에 따른 사회개혁 중 하나였다. 기독교인들의 사회 개혁에 대한 열정은 기독교 근본주의의 등장으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사회 참여를 통해 드러내기보다는 개인에 한정지어서 이해하는 개인주의적인 신앙과 정치사회에 관심을 갖지 않음으로써 기존 질서가 아무런 변혁이 없이 그대로 유지되도록 하는 종교적 보수주의인 탈(脫)정치, 사회적인 신앙을 갖게 되면서 침체되는듯 하였으나[2] 교황 레오 13세가 노동자 헌장을 반포하면서 부흥의 조짐도 나타났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1840년대 ~ 1850년대에 대부분 노예 제도를 없앴다.

미국에서의 역사

노예제 논쟁과 남북전쟁

미국에서는 국내(주로 남부)에서 목화 농사 중심의 농업에 필요한 인력으로 흑인 노예들을 이용했기 때문에 노예 제도는 민감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목화농사가 지역경제의 중심이라 노예가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남부에서는 1831년 흑인 내트 터너백인지주의 억압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내트 터너 봉기 이후 노예 단속을 더욱 강화하고, 북부에서는 흑인들을 저임금 공장 노동자로 흡수하려는 자본가들에 의해 미 노예 제도 폐지 협회(대표 윌리엄 개리슨)가 중심이 되어 노예 제도 폐지를 외치면서, 노예 제도 폐지 논쟁은 자본주의가 발달한 북부와 농업 경제가 발전한 남부 간의 심각한 지역 감정으로 치달아 남북전쟁이라는 내전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미국 개신교의 논쟁

미국 개신교에서도 노예제를 둘러싼 남부와 북부 논쟁이 일어나, 기독교 근본주의 전통의 남부 개신교 신자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노예제에 찬성하고, 진보적 신학전통을 가진 북부 개신교 신자들은 성서를 역사적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는 상황적 해석을 함으로써 노예제에 반대하였다. 또한 19세기 미국교회에서 소수였지만, 퀘이커, 메노나이트등의 소수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은 당신이 대접받으려는대로 이웃에게 대접하라는 황금률에 근거하여 노예제에 반대했다.[3]

흑인 해방 그리고 그림자

초기의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은 대중적 지지 기반의 결여로 1837년 러브조이 암살 사건 등 에러도 적지 않았으나 1852년 헤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대 인기를 얻음으로써 비로소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였다. 1860년의 대통령 선거 결과 국회위원 시절에 노예제도를 악의 제도라고 비난한 경력이 있는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당선되고 이에 반발한 남부 11개 주의 잇단 연방 탈퇴로 1861년 ~ 1865년 남북 전쟁이 벌어졌다. 1863년 공포된 노예 해방 선언은 1865년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발효되어, 미국 내의 흑인들은 해방과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은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자본가(부르주아)들이 흑인들을 저임금 노동자로 흡수하기 위해 노예해방을 주장한 북부에만 있었다. 남부에서는 과격 비밀 결사 단체 쿠 클럭스 클랜 (Ku Klux Klan; KKK) 등의 보수반동적인 남부잔당들이 흑인들을 탄압하였다. 그나마 북부의 흑인들도 신분은 해방되었으나, 상당수가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노동력 착취를 당하는 등 북부의 자본가들에게 종속되는 경향을 보였다. 일하는 장소만 달라졌을 뿐이지 노예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거리 상인으로 종사하는 흑인들은 영업을 해서 번 만큼 가지는 벌어먹기로써 먹고 살던 사람들이라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4]

참조

  1. 《폭력의 시대》/에릭 홉스봄 지음/민음사[쪽 번호 필요]
  2. 《최신 신학의 흐름》. 복음주의/박만 지음/나눔사.[쪽 번호 필요]
  3. 《두 얼굴을 한 하나님》-성서로 보는 노예제/김형인 지음/살림[쪽 번호 필요]
  4. 《상식밖의 세계사》/안효상 지음/새길[쪽 번호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