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천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21.148.107.42 (토론)님의 2015년 8월 26일 (수) 20:44 판

남천우(南天祐, 1895년 3월 24일 ~ 1969년 6월 30일)는 한국감리교 목사이다. 호는 일포(一抱).

생애

강원도 홍천 출신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부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였고, 1919년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에 되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홍천 지역의 시위를 조직한 것을 시작으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해 활동했다. 임시정부의 연통제 실시로 강원도 책임자가 되었고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해 양구군 조직을 담당했다.

한편, 1920년부터 전도 생활을 시작하여 1925년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가 되었다. 1928년 협성신학교를 제14회로 졸업한 뒤 양구교회와 인제군의 인제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인제에서는 인제 정의여학교 교감도 겸직했다.

이 무렵 강원도에는 남궁억이 내려와 민족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남천우는 남궁억과 교분을 갖게 되었다. 1932년 남궁억을 중심으로 홍천교회 목사 유자훈, 남천우 등이 참가한 기독교 비밀결사 십자가당이 조직되었다. 십자가당은 유자훈의 영향으로 계급과 민족의식을 배격하는 기독교사회주의적 성격을 품고 있었으며, 기독교 기반의 이상적인 농촌 공동체, 즉 ‘공존공영의 지상천국 건설’이 목표였다. 그러나 1933년 십자가당 조직이 적발되어 관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남천우도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옥한 후 행적에 친일 혐의가 있다. 만주로 건너가 만주감리교신학교 교수로 재직한 뒤, 1939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고 원산부의 중청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원산지방 감리사로 임명되었고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함경교구장을 역임했다. 당시 감리교회는 정춘수의 주도로 기독교 교파 중 가장 먼저 신사참배 강요에 공식적으로 동조하고 교회 황민화에 앞장서던 시기였다.

1943년 대전으로 이동하여 대전제일감리교회를 맡았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이 조선의 양대 기독교 교단인 감리교와 장로교는 물론 군소 교파까지 일원화하여 일본 기독교 산하에 통합시키고자 교단합동추진위원회를 출범시켰고, 결국 1945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발족되었다. 남천우는 이 교단의 충남교구장에 임명되었다.[1]

광복 후에는 정치에 관심을 보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청남도 지부장, 미군정 충남 고문 등을 지냈다. 1947년 대전중앙교회를 설립해 담임하기도 했다. 1958년 민주당 중앙위원에 피선된 것을 끝으로 1960년 정계에서 은퇴하여 농장을 경영하며 노후를 보냈다.

사후

3·1 운동 참가와 십자가당 결사 공적으로1977년 대통령표창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으나,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종교 부문에도 포함되어 있다.

아들 남기철도 감리교 목사가 되어 목원대학교 학장과 이사장을 지냈다.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대 총선 국회의원(대전부) 초대 대독촉국회 17.12% 6,628표 4위 낙선

상훈

같이 보기

참고자료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