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구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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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근구수왕
百濟 近仇首王
백제의 14대 국왕
재위 375년 ~ 384년
전임 근초고왕
후임 침류왕
부왕 근초고왕
이름
부여수(扶餘須)
신상정보
부친 근초고왕
모친 왕후진씨(王后眞氏)
배우자 아이부인(阿爾夫人)

근구수왕(近仇首王, ?~384년, 재위: 375년~384년)은 백제의 제14대 국왕이다. 근초고왕의 맏아들로, 《삼국사기》,《양서(梁書)》에는 이름이 수(須)로, 《신찬성씨록》에는 귀수(貴首) 또는 근귀수(近貴首)로, 《속일본기》(續日本紀)에는 귀류(貴流) 또는 구소(久素)로 기록되어 있다.

생애

즉위 전

369년, 태자 수(須)는 부왕 근초고왕과 함께 남방을 정벌하여 마한 54개국 가운데 4개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틈을 이용해 고구려 고국원왕(재위:331~371)이 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치양성(雉壤城, 황해도 배천, 구 모로성) 부근을 약탈하자 태자 수(須)가 군사를 이끌고 맞섰다. 이때, 근초고왕의 말 말굽을 상하게 한 죄로 고구려로 달아났던 사기(斯紀)가 다시 백제에 투항하여 '고구려 군사는 머리수만 채운 허세(疑兵)이며,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직 붉은 깃발의 부대(赤旗部隊)뿐'이라고 고구려의 군사정보를 태자 수(須)에게 알려줌으로써 백제는 사기의 말대로 고구려의 적기부대(赤旗部隊)를 먼저 공격하여 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르고, 그 기세를 몰아 백제 수곡성까지 함락하였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태자 수(須)는 여세를 몰아 진격을 계속하고자했다. 그러나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조언하기를 “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에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기필코 더 많은 것을 구합니까?"라고 《노자 도덕경》의 내용을 인용하여 간하니 태자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추격을 멈추고 그곳에 돌을 쌓아 표지(標識)를 만들었다. 태자는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보며 "지금 이후 누가 다시 여기에 이를 수 있을까?"라고 말하였다. 그곳에는 말발굽처럼 틈이 생긴 바위가 있어 '태자의 말발굽'이라 불리기까지 하였다. 371년 고구려가 또 다시 침입하자 태자 수(須)는 부왕 근초고왕과 함께 군사를 패수에 매복시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기세를 몰아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치세

375년 11월 근초고왕의 붕이로 왕위에 오른 근구수왕은 이듬해 376년) 장인 진고도(眞高道)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진(眞)씨가가 최고의 권세를 가지게되었으며. 내정이 주로 진씨에게 맡겨졌다.

고구려와의 전쟁

377년 고구려 소수림왕이 공세를 강화하여 11월 백제 변경을 공격해왔다. 근구수왕은 대노하여 다음 해 377년 10월 3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재차 공격하였으나, 소수림왕의 방어를 뚫지 못하였고, 그 해 11월 고구려의 보복 공격이 있었다. 전쟁은 치열했지만, 양측다 이상기후가 겹치면서 제1차 여제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

내정

다음은 근구수왕대에 일어난 자연재해의 기록이다.

379년 4월에 하루 종일 흙이 비처럼 내렸다[雨土].

380년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여름 5월에 큰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져 깊이 다섯 장, 너비 세 장이나 되었는데 삼일만에 합쳐졌다.

382년 봄에 가뭄이 들어 6월까지 계속되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자식을 파는 자까지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해 왕은 국가창고의 곡식을 풀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동진과의 관계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기에는, 379년 3월 동진에 조공하려 했으나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 되돌아 왔다고 하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고, 양서(梁書) 백제전에서는 '동진 태원(太元)년간(376년~396년) 백제왕 수(須)가, …중략… 생구(生口, 노예)를 헌상(獻上)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사망

재위 10년째 되던 384년 4월에 붕어하였다.

가계

관련 작품

드라마

참고

전 대
근초고왕
제14대 백제 국왕
375년 ~ 384년
후 대
침류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