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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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기병(弓騎兵, Horse Archer)는 말을 탄 채 활을 쏘는 기사(騎射)를 목적으로 하는 전근대의 기병의 일종이다. 기마 궁수는 고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에 의해 처음 나타난 것으로 보이며 스키타이인, 사르마티아인, 파르티아인, 사산 왕조, 흉노족, 투르크인, 몽골인, 마자르족 외 여러 민족에게서 나타났다. 이들은 주로 기동성을 이용하여 활을 쏘고 물러나거나 측면에서 활을 쏘아 대형을 흐트러지게 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였다.

세계사적으로 궁기병은 스키타이 문화(기원전 8세기~기원전 3세기) 초기부터 존재했으며, 달리는 말등 위에서 활을 쏜다는 특이성으로 하여 고대 그리스 인은 켄타우로스라는 상상의 괴수를 창안해냈다고 여겨진다. 스키타이인은 위아래가 약간 비대칭인 단궁의 양끝에 딱딱한 『귀』를 달고, 화살촉을 큰 철제에서 작은 청동으로 만들어 써서 훈족의 활을 이겼다. 또한 더욱 완성도를 높인 활로서 터키인은 좀더 가볍고 콘펙트한 활에 화살은 양끝이 좁고 가운데에 탄력성을 가미한 구조로 활의 비상력(飛翔力)을 높였다. 몽골인은 나아가 『스트링 브릿지』를 마련하는 등 보다 빠르게, 관통력을 키움으로서 중장기병에 맞서는 보다 유효한 전력을 갖추었다.

전장에서 궁기병의 주요 임무는 경기병과 마찬가지로 전초, 척후병으로서 적을 교란하는 것이었다. 접근전을 피하면서 적의 측면, 및 후방에서 적을 빠르게 급습하였고, 최대한 가벼운 장비를 갖춤으로서 기동력을 살리고 말을 멈추지 않고 전, 후, 좌, 우로 끊임없이 민첩하게 움직이면서 활과 화살로 적을 공격하는 전술이었다. 적의 무기가 닿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착실하게 적을 공략하는 궁기병의 공격에 총이 없는 적병은 꼼짝없이 사기를 빼앗기고 대열을 잃고 말았다. 서구의 중장보병은 기민한 궁기병 앞에서 고전했으며, 특히 동방 여러 국가들의 궁기병은 십자군을 상대로 많은 실적을 남겼다. 중무장한 중장보병에게 궁기병은 위협적인 상대였다. 특히 나무가 별로 없는 평야 지형에서 민첩성이 뛰어난 궁기병은 육중한 중장보병단에 비하면 훨씬 유리했고, 궁기병에 맞설 수 있는 것은 활이나 화살, 아니면 같은 궁기병밖에 없었다. 특히 「파르티안 샷」이라 불린, 적을 정면으로 마주보지 않고 퇴각하면서 말등 위에서 등을 돌려 활을 쏘는 사법은 유럽인들 사이에서 이름난 기사 전술이었다.

유목민의 궁기병에 맞서 승리한 유럽 국가는 그 수가 몹시 적다. 기원전 329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야쿠살티스 강의 전투에서 궁기병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둔 것은 서양사에서 궁기병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몇 안 되는 역사적 승리의 하나이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이 전쟁을 통해 마케도니아 영토를 아시아 일부까지 확장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럼에도 유목 국가의 중심부를 공략하는 것만은 실현시키지 못했다. 신약의 《로마서》에는 사르마티아 궁기병이나 오스만 제국시파히 기병들이 등장하고 있다. 『카레 전투(기원전 53년)』와 『레그니차 전투(13세기)』에서 궁기병은 중심적 역할을 했는데, 두 전투 모두 적병이 궁기병에 대한 직접전투를 고집했기 때문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십자군 전쟁 당시 살라딘십자군 중장보병에 맞서 궁기병들이 집요하게 공격을 가해 적의 전의를 상실시킴으로서 승리를 거두었다(하틴 전투).

또한 칭기즈 칸은 몽골 활을 사용한 궁기병을 보유하여 다른 유목 국가들과 같은 전술을 통해 거대한 몽골 제국을 수립하였으며, 전성기 몽골 제국의 영토는 중국 대륙에서 유럽에까지 걸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