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알렉산데르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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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7세
전임자인노첸시오 10세
후임자클레멘스 9세

교황 알렉산데르 7세(라틴어: Alexander PP. VII, 이탈리아어: Papa Alessandro VII)는 제237대 교황(재위: 1655년 4월 7일 - 1667년 5월 22일)이다. 세속명은 파비오 키지(이탈리아어: Fabio Chigi)이다.

생애

1599년 2월 13일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태어나 9년간 시에나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박사 학위를 받고 로마에서 2년간 개인 공부를 한 후 로마의 지식인들과 교분을 맺었다. 1629년 교황청의 승지로 입문하여 페라라 부사절, 나르도의 주교, 몰타에 교황청 순시관으로 파견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그에게 그 당시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맡겼다. 문제가 많은 독일에 사절로 파견되어 13개월간 쾰른에 머물면서 뮌스터의 평화 협정에 교황 대리로 참석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에 의해 1651년 추기경과 국무성성 장관이 되었다. 인노첸시오 10세의 선종 후 소집된 콘클라베는 3개월간 지속되었다. 마침내 키지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교황 알렉산데르 3세를 기념하여 알렉산데르 7세로 명명하였다.

알렉산데르 7세는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열심히 일하는 인물이었다. 자선에 힘쓰고 장학금을 마련하며 사학자들을 독려하여 문서고 정리를 하게 하고 예술을 장려하였다.

알렉산데르 7세와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서로 불편한 관계였다. 절대왕정을 편 루이 14세는 알렉산데르 7세를 곤란하게 하였다. 특히 알렉산데르 7세의 코르시카 경비병들과 프랑스 대사 다시에 일어난 마찰로 인해 관계가 복잡하게 되었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본뜻은 그 충돌이 아니라 유럽 연합을 통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고자 하는 알렉산데르 7세의 의도에 반대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있었다.

알렉산데르 7세는 전임 교황들처럼 얀센파를 반대하고 개신교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를 환영하였다. 알렉산데르 7세는 선교에 전력을 다하였고 포교성성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였다. 1600년경 프랑스에서 파리 외방 선교회가 시작되자 이 선교회를 승인하였다.

알렉산데르 7세는 난징 교구에 조선을 포함시켰다.

전임
인노첸시오 10세
제237대 교황
1655년 4월 7일 - 1667년 5월 22일
후임
클레멘스 9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