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베네딕토 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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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urgy (토론 | 기여)님의 2014년 5월 6일 (화) 22:02 판 (→‎평화 활동)
베네딕토 15세
파일:BentoXVIquadroaoleo.jpg
전임자비오 10세
후임자비오 11세
개인정보
서명[[파일:|125px|베네딕토 15세의 서명|alt={{{다른서명}}}]]

교황 베네딕토 15세(라틴어: Benedictus PP. XV, 이탈리아어: Papa Benedetto XV)는 제258대 교황(재위: 1914년 9월 3일 - 1922년 1월 22일)이다. 본명은 자코모 델라 키에사(이탈리아어: Giacomo Della Chiesa)이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으며, 전쟁과 이후 전후 체제는 그의 중요 관심사였다. 베네딕토 15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과 동맹국 사이에서 성좌의 중립을 선언하면서 교전국들 간의 화해와 평화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연합국과 동맹국 어디에서도 베네딕토 15세의 이러한 중재를 거부하였다. 독일의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은 ‘교황에 의한 평화’라는 무례한 언사를 사용함으로써 거절하였으며, 프랑스 정치인 조르주 클레망소는 교황의 이러한 활동은 명백하게 프랑스를 반대하는 활동이라고 평가 절하하였다.[1]

베네딕토 15세는 교전국 간의 외교적 중재에는 실패하였으나, 전쟁 포로들을 돌보거나 부상당한 병사들의 교환, 유럽 각국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식료품 전달 등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완화시키기 위한 인도적인 활동에 열성을 다하였다. 이처럼 뛰어난 외교적 수완과 더불어 근대 사회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를 지녔던 그는 사람들이 자신은 물론 교황직 자체에도 존경심을 갖게 만들었다.[2]

유년기와 청년기

1866년 12세 시절의 자코모

자코모 델라 키에사는 1854년 11월 21일 이탈리아 제노바 교외 펠리에서 주세페 델라 키에사 후작과 그의 아내 조반나 밀리오라티 후작부인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계 쪽 가문은 교황 갈리스토 2세와 이탈리아 국왕 베렌가리오 2세를 배출한 명문 집안이었으며, 모계 쪽 가문 역시 교황 인노첸시오 7세를 배출한 명문 집안에 속하였다.[3]

자코모는 어린 시절부터 사제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그의 부친은 아들이 사제가 되는 대신에 법조인이 될 것을 강요하였다.[4] 1875년 8월 2일 21세가 된 자코모는 민법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제노바 대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사회는 이탈리아 통일 이후 반가톨릭주의과 반(反)성직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성년이 되어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이제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고 다시 부친에게 요청하였으며, 부친은 결국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1878년 교황 비오 9세가 선종하고 그의 뒤를 이어 교황 레오 13세가 즉위한 시기에 자코모는 제노바를 떠나 로마에 있는 알모 카프라니카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새 교황은 즉위 후 며칠 후에 카프라니카 학생들과 일반 알현 자리를 가졌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878년 12월 21일 자코모 델라 키에사는 라파엘레 모나코 라 발레타 추기경의 주재 아래 사제 서품을 받았다.[5]

1878년부터 1883년까지 자코모는 로마에 있는 교황청 교회 학술원에서 공부하였다. 그곳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학생들은 추기경들과 교황청의 고위 관료들을 초대하여 연구 서류들의 보호를 요청하였다. 이 때 레오 13세의 측근이었던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은 자코모 델라 키에사를 눈여겨 보았으며, 1882년 바티칸의 외교 업무에 착수하면서 그를 자신의 서기로 고용하여 마드리드로 파견하였다.[6] 그 후에 람폴라 추기경은 국무성성 장관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때도 자코모 델라 키에사가 그의 곁을 보좌하였다. 이 시기에 자코모 델라 키에사는 람폴라 추기경을 도와 캐롤라인 제도를 놓고 독일과 스페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의 중재와 콜레라 창궐로 피해를 입은 스페인 시민들을 구제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교황이 되었을 때에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피난민들의 구호 사업에 힘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자코모의 어머니 조반나 후작부인은 자기 아들의 이력이 그의 능력과 출신 등에 비해 보잘 것 없다고 여겨, 바티칸이 자기 아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면서 불만과 불평을 늘어놓아 람폴라 추기경을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람폴라 추기경은 자코모의 어머니에게 “당신의 아들은 단지 몇 걸음만을 떼었지만, 그것은 하나하나 큰 걸음들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7]

레오 13세와 볼피니 추기경의 선종 직후, 람폴라 추기경은 자코모를 후임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소집된 콘클라베의 서기직을 맡기려고 하였다. 하지만 추기경단은 보수적인 성향의 젊은 사제 라파엘 메리 델 발을 지명하였으며, 람폴라 추기경은 이에 동의하는 서명을 하였다. 람폴라 추기경은 콘클라베에서 그의 상대였던 주세페 사르토 추기경이 교황 비오 10세로 선출되면서 요직에서 물러났으며, 그의 직책은 라파엘 메리 델 발이 추기경으로 서임되면서 대신 맡게 되었다. 자코모 델라 키에사는 자신의 직책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주교

1907년 12월 18일 교황 비오 10세의 집전 아래 바티칸에서 주교 서품을 받는 자코모 델라 키에사

하지만 자코모 델라 키에사는 교황 레오 13세의 외교 정책을 담당했던 람폴라 추기경과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신임 교황 치하에서 국무성성에서 그의 지위가 약간 위태로웠다. 1907년 4월 15일 이탈리아 언론들은 마드리드 주재 교황 대사 아리스티데 리날디니 대주교가 추기경에 서임되면서 자코모 델라 키에사가 그의 뒤를 이어받아 과거 자신이 일했던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가 마드리드 주재 교황 대사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일제히 전하였다. 비오 10세는 발 빠른 언론의 보도를 보고 웃으면서 “불행하게도 언론인들은 내가 볼로냐의 다음 대교구장으로 그를 지명했다는 사실은 빠트린 것 같군.”이라고 지적했다고 한다.[8] 1907년 12월 18일 외교관들과 여러 주교 및 추기경들, 그리고 그의 오랜 친구 람폴라 추기경이 참석한 가운데 자코모 델라 키에사는 바티칸에서 비오 10세의 주재 아래 주교로 서품되었다. 비오 10세는 자코모 델라 키에사에게 직접 자신이 사용하였던 주교 지팡이주교 반지를 하사하였으며, 다음날 자코모 델라 키에사는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9] 자코모 델라 키에사는 자신의 사목 표어로 “In Te Domine Speravi, Non Confundar In Aeternum.” (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니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 시편 71,1)을 선택하였다.[10] 1908년 2월 23일 자코모 델라 키에사는 자신의 교구인 볼로냐 대교구에서 공식 착좌하였다. 당시 볼로냐 대교구의 교구민 숫자는 700,000명이며, 사제는 750명, 수사는 19명, 수녀는 78명이었다. 그리고 신학교의 교수는 25명이었으며, 사제품을 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신학생은 120명이었다.[11]

볼로냐 대교구장으로서 그는 대교구에 있는 모든 본당을 일일이 방문하였는데, 특히 말을 타야만 갈 수 있는 산 속에 있는 작은 본당들도 찾아갔다. 본당을 찾아갈 때마다 자코모 델라 키에사는 언제나 대교구장으로서 중요한 책무인 강론을 열성을 다해 하였다. 그는 강론 때마다 모든 성당의 청결과 모금 활동을 특히 촉구하였는데, 모금 활동을 강조한 이유에 대해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돈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12] 또한, 자코모 델라 키에사는 과학과 고전 교육 과목을 더 많이 추가하는 등 직접 신학교 교육의 개혁을 주도하였다.[13] 그는 성모 발현 50주년을 맞이하여 대표적인 성모 발현 장소인 로레토루르드를 성지 순례하기도 하였다.[14] 1913년 12월 16일 오랜 친구이자 지지자이자 멘토였던 람폴라 추기경이 갑작기 선종하자, 자코모 델라 키에사는 큰 상심에 빠졌다.

추기경

1910년 사목 방문 때의 자코모 델라 키에사

볼로냐의 대교구장은 전통적으로 추기경에 서임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작년에도 대주교로 갓 서임된 성직자들이 대거 추기경으로 서임되었기 때문에, 자코모 델라 키에사 역시 곧 추기경에 서임될 것으로 전망되었다. 그러나 비오 10세는 전통에 따르지 않고 7년 가까이 자코모 델라 키에사를 추기경에 서임하지 않았다.[15] 하루는 볼로냐 시의 사절단이 로마를 방문하여 비오 10세를 알현한 자리에서 자코모 델라 키에사 대주교의 추기경 서임을 요청하자, 비오 10세는 자신의 가문 이름인 사르토(Sarto)를 재료 삼아 다음과 같이 농담식으로 답변하였다. “미안합니다. 아직 추기경 의복을 만들 사르토(Sarto, 이탈리아어로 재단사를 의미함)를 구하지 못해서요.”[15] 일부에서는 자코모 델라 키에사의 추기경 서임이 자꾸 미루어진 이유에 대해 추기경단에 람폴라 추기경의 측근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던 비오 10세나 비오 10세의 측근들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자코모 델라 키에사 대주교의 오랜 동지였던 람폴라 추기경은 1913년 12월 16일에 선종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914년 5월 25일 자코모 델라 키에사는 산티 콰트로 코로나티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로마에서의 추기경 서임식을 마친 새 추기경이 자신의 교구가 있는 볼로냐로 돌아오려고 할 즈음에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서 사회주의자들과 왕정타도주의자들, 반가톨릭주의자 등의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뒤이어 총파업이 잇따랐으며, 각 지역 성당과 전화국 및 철도 등에 대한 약탈과 파괴가 자행되었다. 그리고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 세속적인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는 선언이 있었다. 볼로냐에서는 시민들이 동참을 거부함으로써 교회는 운 좋게 참화를 피할 수가 있었다. 이후 이탈리아에 열린 지역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압도적으로 가장 많은 표를 얻어 승리하였다.[16]

유럽 전역에 전운이 감도자, 이탈리아는 어느 편에 서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었다. 공식적으로 이탈리아는 여전히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독일 제국과 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티롤 주의 대다수는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깊이 받아 주민들 대부분이 독일어를 사용한 반면에 남부 지역은 배타적으로 이탈리아어를 사용한 주민이 많았다. 볼로냐 대교구의 사제들 역시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전쟁이 발발하자 자코모 델라 키에사는 대교구장으로서 사제들에게 평화와 전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교회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17]

교황

1914년 교황 베네딕토 15세의 대관식

비오 10세가 선종한 후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1914년 8월 말엽에 콘클라베가 소집되었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으므로 새 교황의 주요 사안은 자연스럽게 전쟁 문제일 것으로 전망되었다. 따라서 추기경단은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외교 능력이 뛰어난 교황을 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총 열 번에 걸친 투표 끝에 1914년 9월 3일 자코모 델라 키에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으로서 자신의 새 이름을 베네딕토 15세를 선택하였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볼로냐 대교구장을 지냈던 교황 베네딕토 14세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교황 선출에 뒤이어 부제급 추기경 단장이 성 베드로 대성전의 발코니에 나타나 군중을 향해 교황 선출 소식을 알리는 하베무스 파팜을 하였다. 하지만 베네딕토 15세는 로마 문제 때문에 근래의 전임 교황 두 명의 예를 따라, 성 베드로 대성전의 발코니에 나타나 군중을 향해 우르비 에트 오르비를 하지 않았다. 베네딕토 15세는 또한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는 이유로 1914년 9월 6일 시스티나 경당에서 간소하게 자신의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로마 문제를 둘러싸고 이탈리아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로마 주교좌 착좌 미사를 집전하지 않았다.

베네딕토 15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시기에 재임하였다. 그는 유럽의 자살 행위라고까지 표현할 정도로 전쟁에 단호하게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교황으로서 작성한 자신의 첫 번째 회칙에도 상호 적대감을 하루속히 끝낼 것을 요청하는 진심 어린 호소를 담았다. 또한, 그는 1914년 크리스마스 정전보다 이른 시기에 교전국들에게 예수 성탄 대축일(크리스마스)에 종전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묵살되었다.

평화 활동

베네딕토 15세의 평화 제의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전달하기 위해 독일 황궁을 방문한 에우제니오 파첼리.

베네딕토 15세의 주요 관심사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전후 처리 문제였다.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그는 교황청의 중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1916년과 1917년에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있는 입장에서 교전국 간에 평화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연합국과 동맹국 모두 베네딕토 15세의 중재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교전 당사국들 사이의 상호 적개심은 전쟁 발발 전 프랑스와 이탈리아, 벨기에 등이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라는 점이 부각된 일 등 종교적 차이점 때문에 더욱 깊어졌다. 바티칸은 영국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프로이센이나 독일 제국과는 어떠한 공식적인 외교 관계도 맺고 있지 않았다. 동맹국의 주요 축이었던 독일의 프로테스탄트교 단체들은 교황이 표면적으로만 중립이고, 실제로는 연합국 쪽에 더 마음이 기울어져 있다고 보고 비난하며 교황의 중재를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다.[18] 또한 그들은 베네딕토 15세가 독일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충동질해서 전쟁에 나서게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파리 주재 교황 대사는 가톨릭 대학교에서의 연설 중에 프랑스에 맞서는 것은 곧 하느님께 맞서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지금 교황이 프랑스인이 아니라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18] 벨기에의 추기경 데지레조제프 메르시에는 벨기에가 독일에 점령당했던 시기에 반(反)독일 선전 활동에 나선 애국자로 유명세를 떨쳤으며, 이러한 활동 덕분에 베네딕토 15세의 호감을 샀다고 전해진다. 또한, 전쟁이 끝난 후에 베네딕토 15세는 독일인들에게 굴욕감을 안겨준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8]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1916년 3월 4일 교황청 국무성성 장관 피에트로 가스파리 추기경이 공식적으로 나서서 성좌는 전적으로 중립으로서 공정한 입장을 갖고 있으며, 결코 연합국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히며 진화에 나섰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외교 대표단이 이탈리아 당국에 의해 로마에서 추방당한 후에 이 문제가 더욱 불거지자, 가스파리 추기경이 특별히 입장을 밝힌 것이다.[19]

교황이 된 후 그는 교황청의 관리들을 대폭 경질하였다. 페라타 가스파리 추기경은 국무성성 장관으로, 메리 델 발 추기경은 검사성성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전쟁 중이었으므로 베네딕토 15세는 애덕 사업에 열성을 다하였다. 예를 들면, 교황청에 국제 행방 불명국을 신설하여 전쟁 포로들과 가족들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베네딕토 15세는 결핵으로 고생하는 군인들을 수용하여 치료하도록 스위스 정부에 요청하여 좋은 결과를 내었다. 개별적으로 각 본당의 사제를 선정하여 병자들과 후송자들을 방문하고 위로와 신의 축복을 빌도록 하였다.

베네딕토 15세는 1917년 8월 1일 모든 교전국의 통치자들에게 구체적인 평화 제의를 하였다. 즉 교전국들이 무력에 의한 폭력 대신 법에 의한 도덕적 권력이라는 원칙을 인정하고 다음 사항에 일치할 것을 제의한 것이다.

  1. 협약한 규율과 보증에 의하여 또한 각국의 공공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하고 충분한 정도로 각 교전국이 동시에 또는 서로 군비를 축소한다.
  2. 협약한 규법에 따라 또는 국제문제를 중재 재판소에 일임하거나 그 결정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여러 국가에 대하여 확고한 보장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중재 재판소를 설치한다.
  3. 여러 국민의 교통에 장애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고 항해의 참된 자유와 공공성을 보장한다.
  4. 전쟁으로 인한 손해와 지출 비요에 대해 완전히 쌍방이 단념한다.
  5. 점령한 지역을 돌려준다.
  6. 적정 또는 가능한 것을 표준으로 한 영지 문제를 검토한다.

대부분의 교전국들이 베네딕토 15세의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기꺼이 받아들였고 영국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프랑스는 보류하였다. 독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 역시 거절했으나 후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평화 원칙에 다소 영향을 주었다.

베네딕토 15세는 자신이 낸 평화 제안으로 인해 양측으로부터 각종 루머에 시달렸다. 독일은 “프랑스 교황”이라고 비난하였고 연합국은 “독일 교황”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럼에도 교황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칙서를 반포하여 전쟁 후 복구를 위하여 형제적인 사랑을 강조하였다.

전쟁 후 베네딕토 15세는 그 동안 중단된 여러 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특히 프랑스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1920년 5월 9일 잔 다르크를 성녀로 시성하였다. 그가 교황이 되었을 당시 바티칸은 14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선종 당시에는 일본, 중화민국 등 26개국으로 늘어났다.

베네딕토 15세는 로마 문제에 있어서 교황보장법을 반대하였다.

비오 10세에 의해 시작된 교회법전 편찬은 가스파리 추기경의 지휘로 추진되어 1917년 6월 28일에 출판되었다.

주석

  1. Franzen 380
  2. Franzen 382
  3. George L. Williams, Papal Genealogy: The Families and Descendants of the Popes (2004:133), reports that his father's family had produced Pope Callistus II (1119–1124) and claimed descent from Berengar II of Italy, and that the Migliorati had produced Pope Innocent VII|Innocent VII 1404–1406).
  4. De Waal 7
  5. De Waal 19
  6. De Waal 43
  7. Pollard 15
  8. De Waal 68
  9. De Waal 70
  10. “CHIESA 1922 GENNAIO”. Araldicavaticana.com. 2013년 4월 22일에 확인함. 
  11. De Waal 82
  12. De Waal 102
  13. De Waal 100
  14. De Waal 121
  15. De Waal 110
  16. De Waal 117
  17. De Waal 124
  18. Conrad Gröber, Handbuch der Religiösen Gegenwartsfragen, Herder Freiburg, Germany 1937, 493
  19. Gröber 495
전임
비오 10세
제258대 교황
1914년 9월 3일 - 1922년 1월 22일
후임
비오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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