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니콜라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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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khwong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6월 22일 (월) 01:46 판
니콜라오 4세
전임자호노리오 4세
후임자첼레스티노 5세

교황 니콜라오 4세(라틴어: Papa Nicholaus IV, 이탈리아어: Papa Niccolò IV)는 제191대 교황(재위: 1288년 2월 22일 - 1292년 4월 4일)이다. 세속명은 지롤라모 마스키(이탈리아어: Girolamo Masci)이다.

생애

1227년 이탈리아의 리시아노에서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다. 젊었을 때 프란체스코회에 입회하여 아시시페루자에서 수학한 후 1272년 달마티아 관구의 관구장이 되었고 1274년 성 보나벤투라를 승계하여 수도회의 총장이 되었다. 교황청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명을 받들어 리옹에서 거행될 공의회동방 정교회의 대표들을 참석시켰다. 1278년에는 교황 니콜라오 3세에 의해 추기경이 된 후 1281년에는 교황 마르티노 4세에 의해 팔레스트리나의 주교가 되었다.

교황 호노리오 4세의 선종 후 약 11개월간 교황좌가 공석이었을 때 프란체스코회 수사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추기경단은 앙주 왕가로 인해 이분되어 서로 교황을 내려고 하였다. 이 시도가 좌절되자 중도파였던 지롤라모 마스키 추기경이 교황이 된 것이다. 그는 첫 번째 당선을 거절하였으나 두 번째 당선에는 수락하였다.

13세기 교황들처럼 그 역시 시칠리아 문제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은 개인적으로 앙주 왕가를 지지하였고 1288년 아라곤 왕국의 시칠리아 점령을 무효화시켰다.

프란체스코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 수사들을 페르시아, 원나라, 에티오피아에 선교사로 파견하였다. 몬테코르비노의 조반니 신부가 교황의 친서를 원나라쿠빌라이를 알현한 후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중국 대륙에서 포교를 시작하였다. 교황은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된 후 새로운 십자군 원정의 계기로 삼아 기독교 선교사들을 파견하려고 하였다.

교황은 교황령의 일관된 통치를 위하여 강력한 콜론나 가문을 이용하여 반대 요인을 무마시키려고 하였다.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자치 공동체(comune)를 업고 통치자(Signore)가 등장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정부들은 자주 소요를 일으켜 무장 충돌도 빈번히 일어났다. 교황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칙서 《Celestis altitudo potentiae》를 발표하였으나 이 교서가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선종하고 말았다. 그 내용은 교황청 수입의 반을 추기경단에 할당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증가하는 추기경들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교황령에 대해 그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는 데 있었다. 잉글랜드 교회에 대해서는 1291년에 잉글랜드의 모든 성직록에 대해서 영구적으로 과세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들었다.

전임
호노리오 4세
제191대 교황
1288년 2월 22일 - 1292년 4월 4일
후임
첼레스티노 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