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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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gmoon (토론 | 기여)님의 2014년 3월 21일 (금) 00:24 판 (HotCat을 사용해서 −분류:유교, −분류:중국의 유학자)

공자의 제자 또는 공자의 문인은 그 수가 많아 이름이 알려져 있는 사람만도 70명을 넘고 있다.

공자(孔子)의 제자 가운데 뛰어난 70인을 칠십자(七十子)라고 하는데, 기록에 따라서는 육십일자(六十一子) 또는 칠십이현(七十二賢)이라고도 한다.[1] 이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제자로는 자로(子路) · 염유(冉有) · 유약(有若) · 안회(顔回) · 중궁(仲弓) · 자공(子貢) · 자하(子夏) · 자유(子遊) · 증자(曾子) 등이 손꼽힌다.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인 공자가 사망한 후에 여러 파로 분파된 것으로 보이는데, 크게 2분하면 증자(曾子) · 자사(子思)의 계통에 속하는 내성파(內省派)와 자하(子夏) · 자유(子遊)의 계통에 이어지는 숭례파(崇禮派)의 2파로 나뉘었다.[2] 이 두 파를 공문의 2유파(孔門의 二流派)라 한다. 이들 선진시대(先秦時代) 유가의 두 줄기의 흐름은 후대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공문의 2유파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의 사후에 분파된 것으로 보인다. 《한비자(韓非子)》의 〈현학편〉에 의하면, 유가에는 자장(子張) · 자사(子思) · 안씨(顔氏) · 맹씨(孟氏) · 칠조(漆雕) · 중량씨(仲良氏) · 손씨(孫氏) · 악정씨(樂正氏) 등의 8파(八派)가 있었다.

또 《맹자》에 의하면 공자의 사후에 자하(子夏) · 자장(子張) · 자유(子遊)의 3인이 상의하여 유약(有若)을 스승의 후계자로 하려고 하였을 때 증자(曾子)가 강력하게 반대한 일이 기록되어 있어, 이 8파는 다시 2파, 즉 증자(曾子)를 중심으로 한 내성파(內省派)와 자유(子遊) · 자하(子夏)를 중심으로 한 숭례파(崇禮派)로 나뉜 것으로 보인다.[2]

내성파

맹자

증자(曾子: 기원전 505~435)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 사후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공자 사상의 유심주의적 측면을 발전시켜 씨족제(氏族制)하에서의 도덕규범으로서의 를 중시하였다.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이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기원전 483?~402?)이다.

자사는 "(天)"이라는 종교적 관념을 바탕으로 인간존재도덕을 규제하였다. 그것을 "(誠)"이라고 이름 지어 철학의 중심에 두고 만물의 근본인 "(道)"와 일치한다고 했다.

자사의 학통을 계승한 사상가가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이다. 맹자(仁) · (義)라는 것을 주장하였지만, 그 기초가 되는 것은 그 자신이 주장한 성선설(性善說)이었다. 맹자성선설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본성하다는 견해는 자사종교적 관념으로서의 (天)과 밀접하게 서로 관련되어 있었다. 한편, 맹자의 정치론의 목적은 당시 붕괴되어 가던 봉건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있었다.

후에 송나라(960~1279) 시대에서는 선진시대(先秦時代: 기원전 221년 이전) 유가(儒家)의 도통(道通: 유학 전도의 계통)이 강조됨으로써 공자 · 증자 · 자사 · 맹자의 계보가 중시되어 공자의 《논어(論語)》, 증자의 《대학(大學)》, 자사의 《중용(中庸)》, 맹자의 《맹자(孟子)》의 4서가 성립되었다.

숭례파

순자

자유(子遊) · 자하(子夏)의 파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禮)라고 하는 외적 규범을 중시하였으며, 그리고 이들 양자 간에도 차이가 있었음을 순자(荀子: 기원전 298?~238?)도 지적하고 있다.

유가의 내성파에 속한 자사(子思: 기원전 483?~402?)와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를 통렬히 비판한 사람이 순자인데, 그는 자궁(子弓: 자유(子遊)라고 하는 설도 있다)의 학통을 이은 것 같고, 또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종교(天)의 사상에서 탈각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제출하였으며 (禮)를 강조하였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은 원래 악하기 때문에 성인에 의해 정해진 (禮)에 따라서 교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성악설에 의거하여, (禮)를 (法)에 접근시켜 국가 통치의 원리로 했다.[3] 그는 (禮)와 (法)을 동일시함으로써 (法)을 사회질서의 이념(理念)으로 끌어올려 사상의 한 유파로서의 법가(法家)가 성립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다.[4] 법가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이사(李斯)와 한비자(韓非子)는 순자의 문하생이었다.[3]

순자의 사상은 송나라(960~1279)의 성리학의 학풍 이래로 이단적인 학이라 취급되어 왔으나 근년에 이르러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공자의 제자들

이는 《사기》(史記)를 토대로 작성한 것으로, 《공자가어(孔子家語)》 및 기타 《논어》의 주석 등에서 주장하는 제자들과 상이한 부분이 있다.

주석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