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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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2월 6일 (목) 04:32 판 ('사도행전에서 전하는 공동체 운영 원리에 관한 내용을 기원으로 하는' 을 삭제함. 사도행전 속 분배는 공산주의와는 다른 자율적 나눔이다)
공산주의 국가들

공산주의(라틴어: Communismus, 독일어: Kommunismus, 러시아어: Коммунизм, 영어: Communism)는 소유를 공동으로 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경제 이데올로기다. 이후 자본가 계급이 소멸되고, 노동자 계급이 주체가 된 생산수단의 공공 소유에 기반을 둔 무계급 사회 조직, 공동체 형성에 관한 이론, 또는 그러한 체제를 목표로 삼는다고 주장하는 다양한 정치 운동들로 확대되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구조를 원칙으로 하는 공산주의 정치 운동은 역사적으로 억압받던 계급들의 해방을 주장하고, 그 해방된 주체들의 자유로운 공동체 조직 형성을 궁극적 목표로 설정했지만, 이러한 코뮨주의적 주장은, 19세기 후반 근대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전체주의적인 폭력 통치가 이루어지면서 본래 의미가 사라져 공산주의하면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와 동의어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공산주의 분파 중에 제일 큰 세력을 형성한 분파인 마르크스주의는 코뮨주의와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서 인식하는 '공산주의'에 대해 정확히 알려면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알아야 한다. 공산주의의 라틴어 'communis'는 '함께하는'이라는 뜻이고, '공산(共産)'은 함께 소유하고 생산한다는 뜻이다. 공산주의는 주로 경제 체제라고 흔히 불리지만, 딱 경제 체제로만 구별되어있는 사상이 아니며, 정확히는 경제·정치·사회·철학·통치 체제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는 크게 네 가지 뜻으로 분류되는데 첫 번째로 제일 흔하게 쓰이는 의미는 마르크스주의의 학설적 이론을 통칭하여 부르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며, 두 번째로는 하나의 이론으로 구성된 체제의 가능성이며, 세 번째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실행하고 있는 국가의 정경체제를 부를 때 쓰인다. 네 번째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즉, 무계급 사회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이렇게 다양한 뜻으로 구분되는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첫글자가 소문자로 쓰여있는 'communism'은 공산주의 체제 국가의 정경체제 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켰고, 첫글자가 대문자로 쓰이는 'Communism'은 공산주의를 가리켰다.

이론적으로 공산주의는 19세기 유럽의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논의되기 시작한 공산주의 정치사상에 그 기원을 둔다. 인류의 초기 사회 조직은 "고대의 공산주의"라 정의될 수 있겠으나 정치 운동으로서의 공산주의는 일반적으로 아직 형성 중인 미래의 사회 체계를 제시한다.

스스로 공산주의자라 부르는 공동체들 사이에는 상당한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카를 마르크스(마르크스주의)와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주의)의 사상에 근접하다고 인식되는 일련의 분파들은 20세기 초 이후 국제 정치계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기 때문에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계급 투쟁은 핵심적인 역할을 지닌다. 이를 따르면 공산주의 체제의 형성은 자본가 계급(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이)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계급 투쟁의 최정점이다. 또한, 자본주의 생산 방식에서 공산주의 생산 방식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 또는 프롤레타리아 민주"라 불리는 과도기적 기간이 불가피하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성되는 공산 사회는 역사적으로 실현된 적이 없으므로 하나의 이론적 가능성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공산당 체제하에 있는 정치·경제적 사회를 일컫는 일에 흔히 사용된다.

흔히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이 공산주의의 반대를 민주주의라 칭하나, 공산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으며, 공산주의의 정확한 반대어는 자본주의이며 정치적 선동 효과를 자극하기 위해 자본주의라는 표현 대신 자유를 앞세워 강조하지만 이때는 "누구의 자유인지에 대해 부정확하다"며 진보 진영에서 비판한다.

공산주의의 유래와 발전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라고 여겨지는 마르크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서 공화파인 자코뱅 당지롱드 당이 프랑스 정치 권력을 공동 지배하였지만 프랑스 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했던 상 퀼로트(노동자 및 농민)가 자코뱅을 지지해주었기 때문에 사실상 진보적인 자코뱅 당이 프랑스 정국을 주도했다. 하지만 자코뱅의 지도자였던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의 특유 급진적 정책은 자코뱅의 적들을 자극, 단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1794년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인해 자코뱅 혁명 정부는 붕괴된다.

이후 프랑스 대혁명은 부르주아들에 의해 우경화가 된 상태로 진행됐다. 자코뱅의 평등주의 정책이 하나씩 소멸되면서 다시 다수 노동자, 농민의 삶은 추락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자코뱅의 혁명 분위기를 되살리려 했던 정치 세력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러한 세력은 '급진적 자코뱅 당'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 세력을 지도하던 인물은 프랑수아노엘 바뵈프였는데, 바뵈프는 오늘날 공산주의하면 생각나는 평등주의, 무상분배, 토지 균등분배 등을 주장했다. 그리고 바뵈프는 프랑스 근대 정치 역사에서 최초로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로 폭넓게 칭한 혁명가였다. 이 당시는 공산주의란 용어는 루소의 공화주의와 평등주의 이상을 혼합한 용어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의 급진적인 정치 이론은 당시 기득권 세력을 자극시켰고, 그를 따르는 급진 자코뱅 세력은 프랑스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다. 또한 그도 1797년에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한다.

19세기 중후반, 독일의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는 기존의 이상적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자본론을 통해 자본주의를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엥겔스와 함께 스스로 '공산주의자선언'이란 소책자를 내어 바뵈프 이후 금기시 되었던 공산주의란 용어를 다시 유럽 전역에 불러냈다. 하지만, 이러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유럽 전역에서 사회당의 결성을 부채질했으나 이들 당의 정책은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않고 이른바 "개량"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예외였다. 당내 분파인 볼셰비키가 레닌의 지도 아래에 1917년 혁명을 일으켜 임시 정부를 타도하고 국가를 장악하게 된 것이다. 1918년 당은 이름을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으로 바꾸었다. 그 후부터 여러 나라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가 되었다. 그러면서 공산주의는 각 국가의 사정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농민이 주류를 이은 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주의라는 혁명 주도 세력을 농민으로 정의한 공산주의도 생기게 되며, 폴포트주의 같은 친화교적이며, 주체사상 같은 유교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더 큰 공산주의도 생기게 된다. 기본적으로는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뜻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모든 사람이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자립할 수 있는 무국가, 무자본 자치체 세상을 의미하는 어떠한 체제에 관련된 용어이며,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까지 이르는 모든 방법을 구체화한 사상이다.[1][2]

공산주의란 용어는 역사적 사건마다 그 의미가 달라졌는데, 1차 대전이 종전되기 전인 1917년 이전에 공산주의는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뜻으로 인식됐으나 1차 대전 종전 이후 인터내셔널이 여러 종파로 붕괴하므로 사회민주주의사회개량주의 계열의 사회주의 사상을 가리켰고,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엥겔스를 따르는 과학적 사회주의 계열의 사회주의 사상을 가리켰다.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는 혁명을 통한 사회변혁을 주장한다는 의미로, 사회주의는 빈부의 격차에 반대하여, 인간 평등과 분배를 강조하는 사회민주주의로 이해되었다.

10월 혁명이 성공한 이후 해외의 수많은 사회당은 공산당으로 변하고 소련 공산당과 다양한 종류의 관계를 맺었다. (국제 공산주의를 참고하라.) 제2차 세계 대전의 종막 후 스스로 공산주의라 칭하는 체제들이 중앙유럽에 들어섰다.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중국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중화민국을 몰아내고, 그 해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였다. 기타 공산주의 정부 형태를 채택한 제3세계 나라 중에는 쿠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베트남, 라오스가 있다.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 전 세계의 2/5이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 살게 되었다.

기독교 경전인 성경사도행전에 소유를 공동으로 하고 필요에 따라 나뉘는 공동체가 거론되는 등 공산주의의 역사는 인류 초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음에도 자본주의 옹호자는 소련이 중심이 된 공산권의 붕괴와 비참하게 몰락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말하는 공산주의만을 강조하면서 좁은 의미로 바라보면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모색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반공주의를 확산하고 있다.

과정

자본주의 체제

자본주의 체제는 카를 마르크스에 의해 처음으로 정립된 것이며, 기본적으로 투기 가능한 화폐, 돈인 '자본'이 양산되고, 그것으로 하여금 자본회전을 통하여 효율적인 잉여가치, 착취이윤 창출과 동시에 생산수단이 자본가의 손안에 있고 그것들이 이윤생산을 목적으로 운용되며, 토지와 노동력을 사고팔 수 있는 시대를 말한다. 후에, 사유재산의 발생 원인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정립했으며, 카를 마르크스가 단독으로 저작한 저서들에는 사유재산제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한다는 '자본주의 붕괴론'을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는 이윤율 저하 경향에 대해서 마르크스가 설명했는데,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들이 잉여가치를 축적하면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노동착취도가 심해지는 '궁핍화이론' 단계까지 오고, 그 결과 대중계급의 소비 의욕이 지나치게 낮아져, 결국 초과공급현상이 심해져 자본가 계급의 이윤의 증대되지 않는 것으로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 정권이 전복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무산계급의 시대가 도래하기 때문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강대국은 그러한 공급과잉에 시달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제국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초제국주의' 또는 '신제국주의'라는 경제적 침략 행위로 하여금 자신들의 이윤을 채워나가게 되어있다.[3]

마르크스는 원시 사회, 부족 사회 등은 단계적일지라도 사회 체제 상 비단계로 서술했으며, 1단계의 사회체제의 형태인 왕정이라는 체제는 프랑스 혁명과 같은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 전복된다고 주장했고, 자본주의 체제는 2단계의 사회체제라고 주장했다. 신 공산주의자들이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사회주의 체제'는 마르크스주의에 3단계의 사회체제라고 정의해놓았다. 즉, 왕정이라는 일인독재의 전제군주제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자본가 독재같은 사회 체제는 원시적인 체제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 체제로 가는 이행기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정하였다.[4]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가 고도로 발전될 수록 주기적인 공황에 매우 약하여, 이윤율 저하 경향이 초반 공황에 비해 매우 잦기 때문에 결국 이러한 사이클이 반복되어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 정권이 전복되고 프롤레타리아 정부가 건설된다고 주장하였다. 러시아 혁명은 마르크스가 언급한 취지와는 다르게, 단순한 프랑스 혁명과 같은 자유주의 혁명이랑 비슷한 형태의 혁명으로 일어났다. 일부 정통 마르크스주의 성향 학자들은 오히려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 체제인 2단계에서 사회주의 체제인 3단계로 이어지는 혁명이라기보다는, 마르크스가 언급한 1단계의 왕정 체제에서 2단계의 자본주의 체제로 가는 자유주의 혁명과 같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노동 계급에게 주는 부정적 영향은 특정 국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변국에게도 크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은 공산주의 혁명의 성격에 맞는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 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기는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그 혁명계급이 노동자, 농민과 같은 무산계급이 주류이다. 부르주아 민주제(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체제를 이렇게 통칭함.)는 말 그대로 부르주아들만의 자유권과 참정권이 있는 시대였다면, 프롤레타리아 민주제는 무산계급만이 자유권과 참정권을 가져야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기 기간에는 혁명에 반대하는 '반동세력'에 대항하여 승리해야한다고 주장하였고, 공산당선언에서는 자본가 및 부르주아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층과의 화합이 없다는 전제로 폭력혁명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논점은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와 다른데,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각 노동자가 스스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자각하여, 비집단적이고 분자적으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다. 반면, 레닌주의에서는 다수의 노동자를 지휘하는 지휘 체계 정당인 전위대 체계론을 주장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전위대가 노동자를 지휘하여, 더 전략적으로 혁명을 일으켜야한다고 주장했다.

공산주의 체제

공산주의 이념을 향한 공산주의 체제 시절을 경험했던 국가들은 주황색이며, 현재도 공산주의 이념을 따르는 국가는 붉은색으로 분류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시대는 흔히 사회민주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체제라고 말하는 그것이다. 공산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라고 정의했다. 물론 이 주장에 대해서는 각자 계파마다 다르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이므로 공산주의가 사회주의의 개조된 형태라고 주장하지만, 일부 사회민주주의자는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에서 파생된 일종일 뿐이라고 정의한다. 이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일부 마르크스주의와는 좀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처음으로 성공한 국가가 러시아 제국이었고 그 당시 혁명의 주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한 레닌주의를 방침으로 혁명을 이행했기 때문이다. 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좀 다른데, 일단 사유재산에 대해 거의 큰 언급을 하지 않은 마르크스주의와 다르게, 레닌주의에서는 공산주의에 도달하려면 확실하고 강제적인 당재산제는 불가피하다고 주장했으며, 공산주의에 달성하면서 그 후 나타나는 문제까지 언급했다. 또한 공산주의의 핵심이었던 '유물사관'을 현실에 맞게 수정했다. 그는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도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에서 묘사된 산업 노동자, 농민 계급이 주류를 이은 혁명 세력이 자본주의 정권을 전복시킬 수 없다고 믿어, 블라디미르 레닌전위대 체계론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공산주의의 각 계파 내 큰 논쟁 거리를 낳았다.

블라디미르 레닌카를 마르크스와 다르게 국가를 절대화 했다. 그는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경제적 제국주의 또는 구 제국주의와 같은 세력이 사회주의 과도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부를 여러가지 수법으로 방해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 이유를 들어 노동 계급은 하나로 결집된 단결 공산 국가를 조직하고 혁명 세력을 지원하여 세계혁명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각 공산주의 세력끼리 국제적 화합을 도모하고 세계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전인민국가론을 주장했다. 또한 제국주의 세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인민으로 이루어진 군대와 경찰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5] 또한, 그는 자본주의의 금융 그리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명확하게 밝혀냈고 이것을 현재 흔히 '제국주의론'이라고 한다.[6]


몇몇 학자들에 의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 제국이 혁명 대상에 부적합하다는 의견도 있다. 왜냐하면 러시아 제국은 고도의 산업화가 되지 않은 1단계의 체제 즉, 왕정이었는데, 2단계의 체제인 자본주의 체제(부르주아 독재)가 없이 혁명이 실행되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대로라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시점엔 발전된 자본주의 형태여야하며 왕정이 타도된 자본주의 체제여야한다. 이 말대로 혁명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대가 될 때 소련은 산업화가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으며, 보편적인 민주주의 의식이 높지 않았다.(물론 2차 대전의 주요 승전국으로써 초강대국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 본질은 위에 언급된 유물사관에서 탈피된 개념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는 의견도 주장한다.[7]

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시대에는 당재산제도를 따르며, 공동생산이 이루어진다. 최소한의 필요에 따른 소비가 이루어진다. 또한 자본가 계급은 사라지며 모든 기업은 당소유화되어 당의 재산이 된다. 계급 차이는 노사관계가 사라지고 인민(노동자, 지식인, 학생, 농민)과 지도자(위원, 주석)로 나뉜다. 공화제는 사회주의 공화제를 사용하며, 각 지도자(인민위원)은 각 지역의 임명제로 선출되고 주석이 선출되는 것도 철저한 임명제 방식으로 치루어지며, 공산당이라는 일당체제 하에 국정운영을 한다. 자본주의 국가와 다르게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당을 사유정치집단이 아닌 당주도의 서비스 기관으로 통칭한다.

철학적으로는 소련이 등장하고 나서 소련의 체제가 공산주의 체제의 모태가 되었을 때 적어도 1세대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는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철학적 정책을 실질적으로 따르는 공산주의 국가는 없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전에 존재한 거의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이러한 사회-철학적 관점을 따랐다.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이란, 모든 물질은 '의식'이 있다고 규정하며 인간을 세상에서 존재하는 제일 우수한 '물질'로 보는 유물론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불가지론과 어느정도 상반되며 이라 절대적인 존재를 추종하는 종교를 부정한다. 소련에서의 러시아 정교회 탄압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개신교 탄압, 베트남에서의 천주교 탄압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무신론적 관점 말고도 공산주의의 반제국주의적 성격도 레닌주의의 철학관점이라고 해둘 수 있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최고 진화형태는 제국주의'라고 언급하였다. 반제국주의적 성향 때문에 인간해방론적 사고방식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인간해방론'은 '노동해방론'과 같은 뜻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마르크스는 노동착취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억압세력을 일소하고 노동자들을 해방시킨다는 관점에서 '노동해방론'을 주창했고, 레닌마르크스가 언급한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인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확장 과정을 통해 착취, 억압을 받는 모든 인민을 해방시켜준다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현재의 인간해방론은 더욱더 세분화 된 후자의 뜻을 담고있다. 후에 이 개념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다만, 김일성의 노동당 유일사상 10대 원칙에는 개신교 유일신 사상을 많이 이용하였고, 김일성이 개신교 가정 출신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반제국주의와 인간해방론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하며, 혁명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세계혁명론적 사고방식이라고도 한다. 대표적으로 체 게바라의 혁명 정신이 세계혁명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계혁명론적 사고방식은 꼭 요인들의 직접투쟁적 지원 뿐만이 아니라 세계에 일어나는 공산주의 혁명을 공산주의 국가가 직간접적으로 지원해주는 방법도 포함되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의 유동적인 계급 투쟁의 실현도 포함된다. 후에 이 세계혁명론은 트로츠키주의에서 발전되었다. 현대 시대에서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마르크스주의적 철학 관점을 따르기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에서는 폭력혁명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체제

공산주의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를 거치면 생산수단을 상품화할 수 있는 모든 공정 및 인프라를 건설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국가는 해체되고, 모든 생산수단을 노동자에게 주고 노동자가 자신을 위한 자체 생산수단을 얻을 수 있어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한 세대마다 자신들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생산수단을 얻어 자신의 몇 십배나 해당하는 세대가 쓸 수 있는량의 상품 및 식량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대표적 종류

적색은 친소, 황색은 친중, 흑색은 중립 노선의 공산주의 체제 국가이다.
공산주의 종류 별 성향

공산주의의 종류에 대한 것은 각 학자들에 의해 의견이 다르지만, 보통 마르크스-레닌을 기점으로 파생된 사상을 공산주의의 종류로 간주한다. 때문에 일부 학계에서는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는 공산주의에서 파생되었다기 보다는 공산주의를 현실화시킨 기반 사상이라고 본다. 그리고 공산주의에서 파생된 기타 사상의 상-하부 구조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은데, 공산주의에 종류가 있다면 과연 소련의 공산주의는 무엇이였냐는 것이다. 때문에, 공산주의라는 사상은 종류와 상관없이, 평균적인 공산주의자들은 보통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를 따른다.

옆의 사진에서 특정 색으로 칠해진 국가는 한 때 공산주의를 경험한 국가인데, 적색으로 칠해진 국가는 소련의 전통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거나, 친소련 정책을 구현시키는 국가를 의미한다. 현재까지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쿠바, 라오스 역시 친소련 노선을 따랐었다.

황색의 경우 친중국적인 정책을 구현하는 국가이거나 마오쩌둥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공산주의 국가이다. 대표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민주 캄푸치아(캄보디아)가 있는데, 민주 캄푸치아의 경우 친화교주의적인 폴포트주의가 정식 이념이었고, 친중국 노선을 따랐다. 또한 알바니아의 경우는 1946년에서 1961년 사이 스탈린주의를 표방하였지만, 반스탈린 인사인 흐루쇼프가 소련의 대통령이 되면서, 1961년 친중노선으로 급선회한다.

흑색의 경우는 친중국도 아니고, 친소련도 아닌 외교 상태이며, 사상도 역시 전통 마르크스-레닌주의 또는 마오쩌둥주의가 아닌 자체 개발한 공산주의 사상으로 통치한 국가를 의미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현재는 사실상 공산주의를 폐기한 것으로 간주됨)의 경우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주체사상이, 유고슬라비아는 티토주의가 주요 이념이었기에 흑색으로 칠해졌다. 현재 유고슬라비아의 경우는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코소보,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로 분리 독립되었다.

레닌주의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을 블라디미르 레닌이 계승하여 보완하였는데, 대표적으로 한 순간적으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주의 체제가 쉽게 도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그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짧은 기간으로 묘사되던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구현화 시켰다. 그는 이 시기에 국가의 존재 더불어 프롤레타리아로 이루어진 군대경찰이 존재해야한다고 주장했으며, 혁명투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전위당론'을 채택해 당의 수직적 구조를 본격화하고 국유화 체제를 강화했다. 또한 자본주의제국주의의 연관성 그리고 신식민지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저술했다. 그의 이론은 수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따랐다.[8]

스탈린주의

스탈린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개조하여, 스탈린주의라는 사상을 만들어냈다.

스탈린주의는 스탈린 통치 시절 소련의 공식적인 정치-경제체제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스탈린이 자신이 만든 사상을 '스탈린주의'라 명명하지 않고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불렀는데, 스탈린이 사실은 마르크스-레닌의 이론을 심하게 훼손한 것이라고 비판 받기도 한다. 주요 내용은 일국사회주의론을 기점으로 만들어졌으며 "전 세계적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강력한 공산주의 국가 하나만 있으면 된다."라는 일념 하에 만들어졌다. 당시 레닌 통치 시절 세계 혁명을 부흥시키는 쪽으로 사상을 발전시켜야한다는 트로츠키와 달리 스탈린은 세계 혁명보다는 일단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어 공산주의 혁명을 군사적 행동으로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었고 스탈린 집권 이후에 이 주장이 반영된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어 군사적 행동으로 전 세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전파하는 혁명의 전위조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야했고, 스탈린은 공산주의의 기본 원리인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자발적 생산보다는, 국가 통제 양식에서의 생산방식을 선택하였고 그로 인해 빠른 집단산업화와 집단농업화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착취는 더 늘어갔고, 자본가 대신 '공산당원'이라는 신분의 생산수단 장악은 기존의 껍데기만 다를 뿐 자본주의 체제와 다를 바 없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유럽의 동서구권 좌파 진영 및 다수의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특히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는 공산주의가 아닌 군국주의의 한 변형에 불과하다는 이론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스탈린주의가 횡행하던 시기에는 트로츠키주의스탈린주의 간의 마찰이 심화되었었는데, 당시 스탈린주의자들은 트로츠키주의는 수정주의적이면서, 공산주의의 전통을 이으지 않은 사상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스탈린주의는 국가를 개인숭배화시키는 국가주의적인 사상이기도 하다. 이는 후에 다른 공산주의의 파생 사상에 큰 영향을 준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한 공산주의는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 계급이 생산수단을 공동소유하고, 생산물의 공동소유 및 분배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기본 원리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공산주의는 본래 자유의지론적 사회주의, 급진적 풀뿌리 민주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벌어진 러시아 내전의 과정 이후, 레닌에 의해 실행되었던 노동자 계급의 생산수단 공동소유라는 공산주의의 기본 원리가 스탈린 체제에 들어서 크게 퇴색되고,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병영국가적인 모습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대공황을 극복하고, 큰 폭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탈린식 공산주의가 공산주의의 전형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스탈린에 의해 권력에서 쫓겨난 트로츠키마저도 자신의 저서인 "배반당한 혁명"에서 1930년대 소련의 사회체제가 왜곡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소련은 노동자 계급의 공산주의 국가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 일부(국제 사회주의자 경향 등)는 소련에서 민주주의적 측면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스탈린을 위시한 소련공산당 관료들이 자본가 계급과 마찬가지로 생산수단을 독점하면서 소련의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스탈린주의를 군국주의 사회로 규정하고 '좌파 파시즘'의 일부일 뿐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 그는 스탈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세계혁명론을 필두로 한 트로츠키주의의 창시자이다.

트로츠키주의는 레프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에 대항하여 레닌주의세계 혁명 쪽으로 발전시켜 만든 공산주의의 분파 사상이다. 트로츠키주의는 공산주의의 하부 이론인 세계혁명론영구혁명론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국제 노동자 운동에 중점을 두어야한다고 주장하였고 그 때문에 트로츠키주의는 국제 공산주의의 시초라고도 불린다.[9]

이러한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주의자들에게 큰 반발심을 주기도 했지만, 제일 큰 반발심을 표출한 쪽은 바로 남미 쪽의 친미 정부였다. 당시 남아메리카의 기타 정부는 친미 정부하에 극단적 반공주의 체제를 실행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곳은 항상 반미-공산주의 투쟁이 심한 지역이었는데, 트로츠키주의는 이러한 공산주의 운동을 적극 지원해준다는 이론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을 가진 트로츠키주의가 소련 사회를 휘어잡을 시, 남미의 친미 정부는 극심한 공산주의자들의 맹공을 받아야하기 때문이었다.

트로츠키는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과의 권력 다툼에 밀려 소련에서 추방당한 이후 일생을 스탈린주의에 대항하며 살았는데 그에 관한 대표적인 저서로는 《스탈린주의 날조학》이라는 저서가 있다.

마오쩌둥주의

마오쩌둥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개조하여, 만들어낸 중국식 공산주의이다. 아시아 일대의 공산당계에서는 마오쩌둥주의가 제일 영향력있는 공산주의로 평가되고 있다. 스탈린 사후 1960년대 소련이 흐루쇼프를 중심으로 어느정도 탈스탈린화 되면서 소련마르크스-레닌주의와 대립한 사상이기도 하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산업화는 유럽에 비해 훨씬 늦었었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은 1차 산업에 의존하여, 공장과 같은 2차 산업의 생산라인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주체는 산업 노동자가 되어야하는데, 산업이 활성화 되어있지 않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산업 노동자 또한 없었다. 이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농민들로 인한 혁명을 주로하고 그에 관한 사상을 정립화시키기 위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의 사정에 맞춰서 재개조하게 된다.[10]

마오쩌둥주의의 하부 사상들은 민족주의, 대중주의(포퓰리즘), 신민주주의를 기초로 하였으며, 마오쩌둥주의와 레닌주의 주요 차이점은 혁명의 주체가 산업 노동자이냐, 농민이냐이며 마오쩌둥주의에서는 혁명의 주체가 농민이 되어야한다고 명시되어있는 것과, 유물론적 관점을 옹호하는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와 달리 마오쩌둥주의는 관념론적 관점을 옹호한다. 마오쩌둥주의는 어디까지나 중국의 사정에 따라 계승된 공산주의 사상이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 일각에서는 오히려 고도로 산업화 된 자본주의 체제를 공산화시킬 때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마오쩌둥주의보다는 개조되지 않은 레닌주의를 선호하기도 하였다. 이 사상의 하부 조직중 하나인 신민주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언급된 인민민주주의와도 같은 뜻인데, 이는 중국인 특유 문화에 맞춰진 민주주의라고 이름을 달리하였다. '신-민주주의'라고 불린 까닭은 분단국가로 견제할 상대인 중화민국삼민주의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신민주주의는 삼민주의를 개조한 중국의 개조된 민주주의이며, 삼민주의는 구(舊)민주주의라고 부른다.

현재 마오쩌둥주의는 인도 공산당, 네팔 공산당의 주요 이념이기도 하고[10], 주로 저개발 지역의 농업지상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옹호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 내에서는 덩샤오핑 이론에 맞써는 중국 공산당 내 보수파의 주요 이념이기도 하다. 때문에 중국 내에서의 보수주의는 전 세계적 보수주의의 의미와 달리 마오쩌둥주의를 의미하기도 한다.

티토주의

티토주의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에 의해 개조된 마르크스-레닌주의이며 기존의 공산주의에 비해 파격적인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공산주의에 파생된 사상이지만 일부 학자들에 의해 '공산주의의 일부'라고도 묘사된다. 유럽공산주의를 제외하고 모든 공산주의 분파에서 유일무이하게 공산주의를 대변하는 레닌주의의 제일 기초적인 공산주의 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쳐 공산주의에 도달한다는 목표를 포기한 이론이며, 오히려 공산주의에 도달한다는 표현이 티토주의에서는 친소련파들을 향한 멸칭으로 등장한다.[11]

주요 내용은,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되, 모든 정치, 경제 및 사회적 영향은 혹여나 그 국가가 약소국이라 할지라도 보장받아야하며,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침범은 있을 수 없다는 이론이다. 또한 이 티토주의는 냉전 당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 간의 대립 속에서 초월적 독립관을 지녔었는데, 티토주의에서도 자본주의 체제는 개조되지 않은 체제라 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전복되어야할 체제로 보았지만, 공산주의 체제는 인민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기본적인 체제이기 때문에, 냉전에 의한 공산주의 국가들 끼리의 단합적인 태도의 전제하에 공산주의 국가들 간의 외교적 격차는 모두 없어져야하며, 그것은 소련에게도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티토주의는 유럽에서 공산주의적인 민족주의 사상이라고도 불리며, 이 때문에 스탈린유고슬라비아의 관계는 매우 험악해졌다.

룩셈부르크주의

블라디미르 레닌의 라이벌 공산주의자인 로자 룩셈부르크레닌마르크스주의에서 제일 중요한 민주성이 보장된 사회를 저버렸고, 부르주아적 공산주의자 내지는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하였다. 이 때문에 레닌주의가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독재로 변질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룩셈부르크주의에서 구현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는 의회공산주의를 기초로하며, 완벽한 삼권분립을 주창한다.

유럽 공산주의

1970년대 초반부터 프랑스 공산당 등의 서구의 공산당들은 유로코뮤니즘(Eurocommunism)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소련 특히, 스탈린주의에 대한 무비판적이며 무조건적인 지지의 전통에서 분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당들은 프랑스, 스페인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일본도 비슷한 노선을 걸었다. 프랑스 공산당의 경우 1970년대 프랑스 사회당과 함께 70% 이상의 득표율을 얻기도 했었으나, 1990년대 소련의 해체와 소련의 위성 국가들의 붕괴 이후 의석 수가 줄어들며 위상이 급격히 떨어졌다.

공산주의의 문제점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사회주의 사회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포함하며, 카를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코뮌주의'적 양상과는 다른,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현실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일어난 문제점을 기준으로 서술했다.

내부적 문제

관료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분배를 강조하기 때문에 해당 행정에 종사하는 공무원을 다수 필요로 했다. 이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에는 총체적으로 관료주의가 팽배했다. 또한 일당독재체제이므로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에 관련된 정책은 국민의 뜻과 상관없이 공산당에 의해 정해져 자유주의적인 사람들의 불만을 샀다. 또한 일반적인 자유민주주의나 기타 민주주의와 달리 사회주의 공화제는 일당일파에 지배 하에 의한 사법, 행정, 입법 과정이 이루어졌으며, 삼권분립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때문에 정권을 가진 공산당의 일개파는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그에 따른 정치양극화, 위계화도 심했다. 이러한 관료주의는 대다수 인민들의 반항심을 키웠고 결국 이는 총체적인 생산성 저하의 원인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현상으로 노멘클라투라 현상이 있다.

토니 클리프를 포함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대표로 하여,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포함한, 자유사회주의계 정치학자들은 본질적으로 '영구적인 무산계급 정치혁명'의 포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생겨난 중앙집권적 성향을 띤 민주주의 제도인 민주집중제라는 제도 자체가 스탈린주의와 결합하면서, 관료주의에 대응하기에는 너무나도 약한 구조라고 주장한다.[12]

마르크스 철학의 현실성 문제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유물사관, 변증법적 유물론과 같은 사회-철학적 정신을 기초로 하여 교육하고 지침하여 인간을 더욱 더 개조된 물질 상태로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레닌 그리고 여러 유명한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을 "사회주의 소유 구조와 생산 체계를 대표로하는 경제적 물질로 하여금, 아직 의식이 개조되지 않은 해방되지못한 인간"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개조되지 않은 물질 상태의 인간을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는 인간으로 비유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이론과 같은 것들을 지침으로 한 인간의 사회-철학적 행동이 없이 개인의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이렇듯이 공산주의자들은 개인의 이익에 따라 무의식으로 사는 것은 인간(물질)의 방치된 형태이고 이 방치된 물질을 사상적으로 개조시켜 더 개조된 물질로 하여금 한마디로 '신형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기존의 일반 유물론과 달리, 변증법적 유물론은 '인간의 의지의 주관성과 관계없이, 오직 인간은 물질을 보고 뇌수의 이성으로 도출되는 특수한 또는 정해진 물질적 행동을 포함해, 그러한 행동을 하게 해주는 특수한 의식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기계론적 유물론과 달리,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오랜 시간 다른 구조의 생산 양식과, 수 많은 물질을 인식해, 그 자체로써 고차원적인 의식을 가진 인간이 충분히 사회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즉, 사회자본, 어떠한 부조리한 사회체제가 인간의 우위에 있어 인간의 생각과 그에 더불어 모든 물질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인간이 사회를 변증시키고 차이를 보아 변화시켜야 하며 그 주체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계층안에 두었다. 그리고 그 신형인간을 만드는 단계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이라고 칭하였다.

이 기간에서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라 인간의 사상적 정신을 완벽하게 개조할 수 있는 충분한 시기라고 단언하였다. 또한 이렇게 굳혀진 사상적 정신이 후에 공산주의 사회에 도달하여 무정부, 무군대의 무방비 상태가 되어도 마르크스철학에 정통한 각 인민들의 자치체로 인해 자연적으로 질서를 유지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인간의 사상정신보다 사익에 대한 욕구가 더 강했으므로 이러한 철학 관점을 장기간 주입시키기는 어려웠으며 결국 마르크스 철학정신의 부재로 인해 '과학적 사회주의' 체제 하에 살고있는 모든 절대다수의 국가는 정신은 마르크스가 흔히 말했던 자본주의 체제의 시절과 다를 바 없었지만, 현실은 그들의 본능과 맞지 않은 공산주의 체제로써 여러가지 내부적 문제가 생기게 되는 원인이 된다.[13]

반제국주의 노선의 문제점

블라디미르 레닌 외, 스탈린, 니키타 흐루쇼프 등이 정립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은 자본주의 정권을 붕괴시킨 뒤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채택하고,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하나의 견고한 사회주의 체제로 다져서, 제국주의 진영을 이긴다는 궁극적 목표가 있었지만, 이러한 공산주의 목표는 미국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기부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시기적으로 산업 발전이 느렸던 소련과 이를 포함한 수 많은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은 사실상,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군비 경쟁에 부담감을 느꼈다고 평가되며, 서방 제국주의·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군비 경쟁으로 인해 대다수의 민중들의 복지 수준도 하락했다. 이는 정부의 불신과 이념의 불신을 낳게된다. 그리고 그에 의한 결과는 전체적인 생산력, 의욕심 하락의 형태로 나타났다.

경제적 문제

공산주의 경제 이론에서 주장하는 '필요생산'이 가능해지려면, 농축산물과 공산품을 위주로한 경공업이 발달되어야하며, 2차 산업 중에서는 생필품, 공산품 위주로 생산해야 한다. 고수익을 창출해내는 일부 2차 산업 부문은 식량, 생필품의 자급률을 원만하게 유지하는 한 늘리는 것도 고려해야한다. 특히 공산주의에서 금융 계열 3차 산업은 자본가들이 잉여가치 또는 자신들의 물질욕을 채우기 위해 인민을 착취(예를 들면 채권자소득률과 불로소득을 주요 소득으로하는)하면서 더욱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산업으로 규정하였으며 금융 산업이 비활성화 되어있다. 또한 모든 기업을 국유화하고 인간의 필수적인 교육 및 의료 서비스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모두 지원해주기 때문에 4차 산업역시 배제된다. 때문에 공산주의에서는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식량의 자급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회주의 국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발전했다.

현실공산주의 국가로 대표되는 구소련의 경우는 군수산업과 항공·우주산업, 공장 기계부품 제조산업이 발달했지만, 그와 반대로 생필품의 생산력은 부진했다. 실제로 구소련은 붕괴되었으며 현재, 러시아의 경제 상황은 자본주의국가들과 비교해 상당히 낙후되어 있다.

경쟁심의 부재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국가 주도의 기술진으로 여러 가지 신상품을 배출해냈는데, 이 방법은 한계가 있었다. 일단 획기적인 상품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개발해낸다 하더라도 그로 인한 이익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더더욱 확실한 이유는 자본가 계급은 경제 활동에 있어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할만한 최적의 개체인데 자본가라는 계급을 생산력을 발생시키지 않고 잉여가치만 소모하는 비효율적이고 취약한 존재라고 여겨 자본가 계급을 모두 일소하였기 때문에 경제에 관해서 경쟁력있는 혁신적인 산업화의 아이디어가 더디어졌다. 즉, 사회주의의 분배제는 각 개체 간의 경쟁심을 유발시키지 못했다. 이 결과는 경제적 문제에서 큰 오점으로 남았으며 공산주의의 치명적인 경제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또한 봉급의 격차와 한계효용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동기화를 부여하지 못했다.[14]

브랜드 가치의 부재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대부분의 국가는 고도로 산업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2차 산업이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고 1차 산업인 어업, 농업과 같은 것들이 주류를 이었다. 원래 산업 노동자들을 주요 기반으로 삼는 공산주의 노선은 중공에서 마오쩌둥주의라고 개조되어 농민들로 이루어진 혁명 활동이 일어났다. 러시아도 같은 상태였다. 당시 러시아는 고도로 산업화 된 근대 자본주의라기보다는 제정 시대, 중상주의적 구조였다. 이로 인한 제일 심각한 문제점은 바로 브랜드의 가치가 없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 여러가지 상품의 브랜드 가치는 브랜드의 가치가 낮은 상품보다 실효성이 낮아도 커버가 될 수 있다는 무궁무진한 경제적 장점이있다. 그러나 이러한 브랜드 가치가 없는 상태에서 바로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 중국은 장기간 수출력침체기를 맞게 된다. 그 예로 고도의 산업가치가 활성화 된 상태에서 공산화 된 동독의 경우 공산주의 국가였지만, 다른 서구권과 다를 바 없는 경제성장력을 보여주었다.

지나친 중공업화

스탈린 시기 부터 소련은 지나친 식량난에 시달려야했다. 그 이유는 지나친 중공업화에 있었는데, 당시 스탈린은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한 대량의 무기제조, 전차제조에 들어갔고 그 도중 식량의 자급률이 낮아져 아사자가 속출하였고 위기감을 느낀 스탈린은 무리한 우크라이나 지역에 대해 집단 농장화를 추진하다, 약 700만명의 아사자를 낸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시 다를 바 없었는데, 김일성의 일당일파 경제발전을 하면서 지나치게 중공업을 발전시켜 당시 대한민국에 비해 경제성장력이 높았지만, 결국 아사자가 30만명이 속출하면서 고난의 행군 시기가 찾아온다. 물론 이 문제도 지나친 중공업화로 인한 식량의 자급률 문제였다.

수 많은 경제학 전문가들은 대다수의 공산주의 국가들의 식량 외교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무역의 거래 상대국 역시 같은 이념으로하는 공산주의 국가와 타 중립국가 뿐이었다. 당시 자본주의의 맹주였던 미국과 서구권의 강대국들은 공산주의 국가의 수입수출 및 경제활동을 제재해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분배되는 자본에 비해 공산품, 기본식량의 물가가 심하게 오르면서 식량의 자급률에 문제가 생기고만다. 또한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집단 농장화를 하다가 아사자를 더욱더 발생시켰으며, 공산주의 국가에 큰 경제적 후유증을 남긴다. 당시 공산주의 국가의 평균 식량 자급률은 안정적인 자급률이라 평가되는 140%의 반인 70% 이상을 넘지 못하였으며, 당시 미국은 270%, 서구권인 스위스는 250%, 덴마크는 230%, 영국은 130%를 넘었으며 서구권의 평균 식량 자급률은 약 200%였다.[15][16]

냉전과 공산주의

반공주의 정부 지원

자본주의 국가들은 세계 공산주의 혁명의 전파를 막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는데 이 중 미국을 대표로 정치경제학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필리핀, 대한민국, 중화민국, 베트남 공화국 등지에는 미국의 전면적 후원을 등에 업은 강력한 국가주의 정부가 들어서 반공산주의 교육을 강화하며 국내 진보사회운동 세력들을 공권력으로 탄압하며 정치계에서는 극단적인 반공주의로 불리는 매카시즘 등으로 진보 진영 분열을 꾀했다. (자세한 것은 코인텔프로를 참고하라.)

미국 내 반공산주의

이러한 반공주의는 미국에서도 극심하였다. 1950~60년대이후 미국의 공산주의 탄압은 겉으로는 공산주의자간첩 추방을 목표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뉴딜정책 관련 정치인과 지식인들을 힘없게 하려는 미국 공화당의 정치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미국정부는 지적 반공주의 그러니까 반공주의 지식인들의 활동을 CIA에서 거액보조금으로 키우는 방법으로 정치외교문제에 대해 자유주의 견해를 주장하는 미국내 자유주의자들의 수를 급감시키기도 했다. 매카시 광풍이 1954년 막을 내린 이후에도 미국 내 공산주의 탄압은 계속되어 미국 지식인 사회는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는 미국 지식인사회에서 활약하던 진보주의자들은 물론, 공산주의자들과 지지자들이 탄압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출판계도 마찬가지여서 미국 출판사 편집자들은 논란의 소지가 있는 진보적 작가들의 책을 내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출판인들은 유럽 출판계와 협동하거나, 다른 출판사에서 외면받은 작가들과 계약하는 등 공산주의 탄압으로 침체된 미국 지식인 사회를 회복시키고자 하였다.그 실례로 미국 랜덤하우스 계열사였던 판테온 출판사는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P. 톰슨의《영국노동계급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es), 에릭 홉스봄, E. H. 카 등의 저서, 미국 노예제도를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해석한 《노예제도의 정치경제학》(The Political Economy of Slavery, 유진 제노비스 저) 등을 출판하였다.[17]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 부르주아 경제학으로부터의 비판 : 공산주의는 유토피아적 체제로서, 사람들의 근본적인 '욕구'를 무시한 체제이다. 개인의 동기부여가 되지 않음으로 인해 공산주의 체제는 낮은 생산성과 개인의 불행이 만연한 체제가 되었다. 한편, 자유주의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의지와 사회의 의지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완벽한 독재자"라는 언급으로 공산주의의 내적 결함을 지적한 바 있다.
  •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의 비판 : 공산주의의 역사적 단계론은 근대주의적 사고 방식이다.
  • 무정부주의(아나키즘)자들로부터의 비판 : 공산주의 이론은 레닌주의에서부터 잘못되었다. 본래 마르크스주의에서 '국가'라는 것은 영구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없어져야 할 권위체임에도 불구하고, 레닌주의는 국가를 절대화시켰다.

대한민국에서의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는 경제, 정치, 철학적이고 학술적인 공산주의의 의미가 아니라 왜곡되고 적대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이는 한국 전쟁의 경험에서 기인한 것으로, 한국 전쟁 발생 20년 전후로 출생한 사람들(2010년 기준으로 60대이상의 노년층)이 남북한 대립의 상황으로 인해 공산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꺼내는 것을 금기시하거나 적대적인 것과 관련있다.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는 철학적 이념, 정경체제가 아닌 절대적 통치체제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축소돼 이해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북한의 정치 경제 권력이 김일성, 김정일 일가에 독점되는 특유의 시스템과 결함 때문이기도 하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정권들을 거치면서 공산주의는 기성세대들에 의해 민주주의의 반의어인 것처럼 쓰였다. (ex: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북한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중국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하지만 이는 공산주의를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며, 과거 공산주의 정부들이 민주적이지 않았던 것과는 상관없이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의 반댓말이 아니라 개념에 담긴 것으로 볼 때는 민주주의가 포함된 개념이며 인민민주주의 독재가 그것이다. 그 실례로 옛 동독의 정식국명은 독일민주공화국(DDR)였으며, 북한의 정식국명은 실제 민주주의의 실현 여부와는 상관없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에서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주로 김일성주체사상이라는 북한의 정치 시스템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대한민국의 군인 대통령 시대를 지나 사회가 선진국식 민주화와 전지구적 시장경제로 점차 진행되고 냉전이 종료된 뒤는 공산주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분위기는 상당히 없어졌다. 하지만 대한민국 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은 보수나 진보를 떠나서 부족한 편이다.[18][19]

공산주의에 대한 오해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당재산제를 주장하지 않으며, 대신에 생산수단의 사회화 즉, 생산수단이 공유되는 사회 체제를 주장하며, 국가 체제의 소멸도 주장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서 원하는 '공산주의' 사회란 현대 사회로 따지면 국가의 권력은 최소화되고 노동자 협동조합체가 생산수단을 공유하고, 각자의 사유재산권은 보장된 사회이다.

좀더 강권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체제인 소비에트 체제에서는 특정 작업장이 목표 생산량에 연속적으로 도달하지 못하면, 징계 처분을 내렸으며, 목표 생산량을 훨씬 넘는 생산력을 보여주었으면, 여러 소소한 특혜도 있었다는 점에서 위와 같은 주장은 다소 왜곡된 주장이다. 즉 "일을 정해진 수준 만큼 하지 않을 경우 엄벌을 받으며 일을 정해진 수준 이상을 할 경우 자신이 초과 달성한 업무량에 비해서 거의 제대로 특혜를 받기 힘들었다."가 정확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포함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노동에 있어서는 강제성을 띄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 자체는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를 내걸지만 개인의 잉여재산을 축적하는 행위는 금했기 때문에 사실상 필요한 만큼만 받을 수 있었고 항상 모든 자원이 집중되는 당에 기대어서 당에 자신의 자유를 종속당함으로써 개인적 차원에서 독립은 있을 수가 없었다.[20]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대표적 인물

관련 항목

각주

  1. 칼 마르크스의 《Critique of the Gotha Programme》를 참조하라.
  2. http://www.economictheories.org/2009/05/full-communism-ultimate-goal.html
  3. 《제국주의론》 참조
  4. 《독일이데올로기》 참조
  5. 이러한 레닌의 주장은 그의 저서 《국가와 혁명》에서 잘 드러난다.
  6. 크리스토퍼, 《Lenin and the Russian Revolution》
  7. 이츠하크의《Re-Inventing Russia: Russian Nationalism and the Soviet State》 참조하라.
  8. 《마르크스주의 역사》 참조
  9.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8549
  10. http://www.voanews.com/korean/news/NEPAL_11_19_11-134172103.html[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0046716
  12. 토니 클리프 저,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국가자본주의론 분석》 참조
  13. 노희상 저, 《공산주의 비판노트》 p. 308 ~ p. 313 참조
  14.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노예의길》 참조
  1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3991761
  16. http://leadersrich.com/news/news_leaders.asp
  17. 《책들의 사업》(The Business of Books)-판테온의 제2시대/앙드레 쉬프랭 지음/류영훈 옮김/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p. 61-65
  18.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1200&num=87002
  19. http://www.frontiertimes.co.kr/error/404.php
  20. 이부분은 《공산당선언》, 《자본론》을 참조하라.

참고 문헌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