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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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高麗 太祖
파일:Goryo Taejo Wangkun 2.jpg
고려의 제1대 국왕
재위 918년 7월 25일
전임 - (태봉 궁예)
후임 고려 혜종
부왕 세조
이름
왕건(王建)
이칭 고려 태조
별호 왕시중
묘호 태조
시호 응운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
연호 천수
신상정보
출생일 877년 1월 31일(음력 1월 14일)
출생지 개성
사망일 943년 7월 4일(음력 5월 29일) (66세)
사망지 개성
왕조 고려 왕조
가문 고려 왕조
부친 세조
모친 위숙왕후
배우자 신혜왕후
장화왕후
신명순성왕후
신정왕후
신성왕후
정덕왕후
자녀 고려 혜종
왕태
고려 정종
고려 광종
문원대왕
증통국사
낙랑공주 왕씨
종교 불교
왕건
王建
별명 자(字)는 약천(若天)
출생지 신라 송악
사망지 고려 개경
복무 후고구려 군사
복무기간 898년~918년
최종계급 문하시중
지휘 후고구려 장수
주요 참전 나주 전투
공산 동수 전투
고창 전투
기타 이력 고려의 1대 국왕

태조(太祖, 877년 1월 31일 (음력 1월 14일)[1] ~ 943년 7월 4일 (음력 5월 29일)[2])는 후삼국 시대 후고구려의 장군이자 고려의 초대 국왕(재위기간 :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이다. (王), (建), 본관은 개성(開城), 는 약천(若天), 묘호태조(太祖), 시호응운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應運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3]이다. 연호천수(天授)이다. (천수제)

송악의 호족 왕륭(王隆)과 그 부인 한씨(韓氏)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896년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장수가 되었다. 후백제와의 교전에서 거듭 승리하여 전라도경상도 서부 지역에서 견훤의 군사를 여러 번 격파하고 906년 상주의 사화진,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와 나주를 공략하였다. 이어 충주와 청주 등의 충청도 지역과 경상북도의 상주 등을 점령하여 태봉국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나주를 공략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여 국력을 확장시켰다. 뛰어난 전과를 바탕으로 궁예의 총애를 받으며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에까지 올랐고, 918년에 궁예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삼은 여러 호족들과 배현경, 홍유 등 무장들의 지지로 거병하여 마침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웠다.

후백제견훤(甄萱)과 세력을 다투었으며, 927년 10월 견훤경주를 약탈하자 출병, 공산 동수 전투에서 후백제에게 대패하였으나 고창 전투와 병산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패권을 잡았다. 935년에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 투항해오자 936년 9월에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를 무너뜨렸다. 938년에 탐라를 복속시키고[4] 신라에 호의를 보여 경순왕은 자발적으로 그에게 투항하였다. 그는 경순왕에게 두 딸인 낙랑공주 왕씨[5]부인 왕씨[6]를 내려주고, 정승공에 봉하였으며 토지와 경주를 식읍으로 내렸다. 또 경순왕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고려 사심관제도의 시원이 되었다. 926년부터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호족가문의 딸들과의 결혼정책, 자제를 도성으로 유학시켜서 볼모로 삼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왕건(王建)은 877년 1월 31일 송악(松嶽)의 남쪽 자택[1]에서 송도의 신흥 호족 왕륭(王隆)과 그의 부인 한씨(韓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송악의 유력 호족이었던 아버지 왕륭은 후일 궁예가 거병하자 궁예의 휘하에 의탁하였고, 후고구려의 금성태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동생 왕신이 있었으나 왕신은 일찍 요절하였다.

태조는 어릴 적부터 총명함과 슬기로움이 남달랐으며 용모도 훤칠하여 장부다운 기상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태조가 17살이 되자 도선대사가 다시 송악으로 왕건을 찾아와 그에게 군사학과 천문학, 제례법 등을 가르쳤다.

그의 가계는 증조부 이전은 다소 불확실한데, 언제부터 그가 왕씨(王氏) 성을 사용했는가는 불확실하다. 증조모 진의(정화왕후로 추존)는 고구려 유민인 강호경(康虎景)과 강충(康忠)의 후손으로 신천의 호족인 강씨(康氏) 가문이었다. 고려 때 관찬된 편년통록에 의하면 그의 조부 작제건당나라 숙종의 아들이라 한다. 이름은 왕건이다. 다만, 전설적인 면이 강하여 사실성은 의심받고 있다.

도선 승려와 풍수지리 전설

또한 그의 출생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그의 외5대조인 강충(康忠)에게 한 승려가 지나가다 부소산 남쪽에 집을 짓고 거주하면 곧 군왕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 승려의 예언에 따라 강충송악 부소산 근처에 터를 닦고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송악의 호족이 송악의 남쪽에 집을 새로 짓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도선대사란 고승이 문 밖에서 이것을 보고 “북쪽으로 옮겨 지으면 이곳에서 세상을 구할 성인이 태어날 것”이라고 중얼거리며 탄식하였다. 그러면서 왕륭에게 새 집터를 잡아주고 이 일을 비밀로 할 것을 당부한 뒤 길을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왕륭의 부인 한씨에게 태기가 있더니 그 이듬해 음력 1월 14일 아들이 태어났다. 아기가 태어날 때 신비한 광채와 자줏빛 기운이 방 안 가득 빛나고 하루종일 뜰에 서려 있었다. 왕륭도선대사의 예언대로 아들이 태어나자 이름을 건이라 지었다.

설화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에 대한 설화는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데 왕건작제건을 신성화 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설화이며 신화로 알려져 있다.

궁예의 휘하 부장

895년(신라 진성여왕 9년) 왕륭과 왕건 부자는 중부 지방의 강자로서 세력을 떨치던 궁예를 찾아가 미련없이 송악을 바치고, 그 밑으로 들어가 벼슬을 하였다. 태조는 후고구려의 장군으로서 전장에서 무공을 세우고 후고구려의 세력 확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895년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간 그는 898년(효공왕 2년) 궁예 진영의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었다. 898년 (효공왕 시대) 정기대감에 오른 태조는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지략과 통솔력으로 연이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으며, 900년까지 광주와 국원, 당성 등지를 평정하였다.

왕건은 병법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덕망이 높고 추종자도 많았다.[7] 왕건의 이러한 성품은 백성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었고, 싸움에서도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7]

후삼국 시대

후고구려 건국 이후

900년 광주(廣州)·충주(忠州)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0년부터 황해 해상을 통해 후백제견훤과 교전하였다. 특히 송악의 해양세력을 이끌던 그는 후백제의 견훤과의 대결에서는 903년 전라도 지역으로 진격하여 나주 등지를 점령하여 후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게 하였으며, 후고구려 건국 후 903년 수군을 이끌고 전라북도 지역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하였다. 육지에서도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의 군사를 격파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그 뒤로 왕건은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군사를 여러 번 격파하였다. 906년 상주의 사화진에서 견훤군대를 격파하였다.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를 공격하고 나주시|금성을 정복하였다. 또한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변방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문무백관의 최고 우두머리인 시중(侍中)의 지위에까지 올라 명실상부한 2인자가 되었다. 궁예는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고 모든 정사를 맡겼다.

그는 충주청주 등의 충청도 지역과 경상북도상주 등을 점령하여 태봉국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나주를 공략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는데도 성공했다.[7] 이렇게 되자 후백제태봉신라에 의해 사방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태봉이 나주를 점령하여 후백제 세력을 위축시키자 그 공로는 자연 왕건에게로 돌아갔고, 이때부터 왕건은 궁예에 이어 명실상부한 태봉국의 제2인자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7]

후백제와의 교전

왕건과 오씨(훗날의 장화왕후)

한편 북원의 성주 양길후백제와 동맹을 맺고, 후백제견훤양길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후고구려를 협공한다. 왕건은 군사 일부를 북원성으로 보내 양길군과 대적하게 하는 한편 직접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목포, 신안, 나주 일대를 공격한다. 그 과정에서 나주의 유력 호족이며 오부돈의 아들인 오다련군 일파를 포섭한다. 후백제의 민심이 이반된 틈을 타 왕건은 서남해안을 공략하였고 오다련군 등 서남의 귀족들은 왕건에게 투항하였다. 갑판 선상에서 시내 위를 바라보던 왕건이 오색(五色)의 운기를 보고 달려갔다가 빨래하고 있는 오씨를 보았다.

그가 나주에 이르러 한 우물가에 있던 처녀에게 물을 달라 하였는데,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주면서 버들잎을 하나 띄워서 주었다. 이유를 묻자 그가 빨리 마시고 체할 것이 염려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주의 호족 오다련군을 만나게 되었고, 오다련군은 그의 사람됨됨이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보고 자신의 딸 오씨를 그와 결혼시킨다. 그 둘 사이에서 아들 (뒷날의 혜종)이 태어나지만 그는 곧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본래 신분이 낮은 나주 호족의 딸이었으나, 태조를 만나 혜종을 낳고, 대광(大匡)인 박술희(朴述熙) 등의 비호를 받았다.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도 나주 지역에 그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행군하던 중 목이 말라 우물을 찾다가, 나주 금성산(錦城山) 남쪽에 상서로운 오색 구름이 서려 있는 것을 보고 말을 타고 그 곳으로 달려갔다.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처녀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물을 청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건네주었다. 태조가 이상히 여겨 버드나무 잎을 띄운 까닭을 물었다.

대답하기를 "장군께서 급히 물을 마시다가 혹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하였나이다" 하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에 감동한 태조가 그의 아버지를 찾아 가 청혼을 하고 흔쾌히 승낙을 받았는데, 처녀는 왕건이 찾아 오기 며칠 전에 이미 황룡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날아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 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후에 태조는 혜종 왕무가 임금될 자격이 있음을 알았으나 모후의 신분이 미천하여 주변의 반발이 있자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징표로 옷상자에 자황포(黃袍)를 담아 전해주었다. 뒤에 왕건태자를 책봉할 때 왕건이 징표로 장화왕후 오씨에게 하사한 자황포 비단을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여주자, 박술희가 그 뜻을 알고 혜종을 정윤(正胤 태자(太子)으로 삼기를 적극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태봉국문하시중

당초 궁예가 현재의 구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는 왕건 세력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북원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떨친 양길을 제압하려면 송악 호족들과 제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궁예는 뜻을 이루자 905년 다시 철원(구철원 북쪽 30리에 있는 풍천원)으로 복귀했다. 그러면서 청주 지역의 1천 가구를 철원땅으로 이주시킨다. 이것은 궁예가 송악 세력 외에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는 뜻이었다.[8] 그러나 궁예와 호족들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왕건의 활약으로 태봉국은 후삼국 구도를 주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왕건의 지위도 점차 격상되어 913년 파진찬문하시중으로 임명되었다. 왕건의 지위가 시중에 이르자 주변에는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겨났다.[9] 자신의 추종자가 늘면서 시기하는 자들도 함께 늘어나자 왕건은 궁예가 언젠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궁예에게 자청하여 변방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9] 변방에 나가 있는 것이 중앙에 있는 것보다는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9] 왕건의 간청에 따라 궁예는 그로 하여금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왕건이 다시 수군을 맡게 되자 한때 나주 지역을 압박해 오던 후백제 군사들은 다시 위축되었다. 왕건이 나주 지역을 완전히 회복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궁예는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만 하겠는가?[9]"하면서 왕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9] 그러나 궁예는 한편으로는 왕건의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점차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 때문에 궁예는 왕건을 급히 소환하여 선수를 쳤다. 왕건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9]

궁예는 평소 스스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떠벌이곤 하였다. 터무늬없는 독심술을 근거로 그는 이미 수백 명의 장수와 신하들을 죽인 상태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역모죄로 몰려 죽었다.[9] 심지어는 여자의 음부를 불에 달군 쇠방망이로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도록 하는 형벌을 가하기도 하였다.[9] 이런 사태를 수도 없이 목격한 왕건은 궁예의 느닷없는 역모설에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왕건은 그런 내면을 드러내지 않고 태연하게 대처했다.[9]

정변과 추대

그러나 의심하는 한편으로 궁예는 왕건에게 충성심을 시험했다. 하루는 궁예가 왕건을 대궐 안으로 급히 불러들였다. 그때 궁예는 자신이 처형한 자들로부터 몰수한 금은과 보물, 진귀한 물건, 가재도구 등을 점검하고 있었다. 왕건을 보자 궁예는 성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그대가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데, 이 말이 사실인가?'

왕건은 궁예에게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말에 왕건의 얼굴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건은 태연하게 웃으면서 '어찌 그럴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에 궁예가 다그치며 물었다.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마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궤뚧어볼 수 있다. 지금 곧 정신을 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꿰뚧어보리라." 하고는 집중하는 자세를 취했다. 왕건은 심히 당황해하여 안절부절하였다. 궁예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때 최응이 옆에 있다가 고의로 붓을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줍는 척하면서 왕건에게 귓속말로 '장군, 복종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라고 귀띔해주었다. 이 말을 듣고 왕건은 거짓으로 역모를 인정하였다.

'사실은 제가 모반을 계획하였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왕건의 이 말에 궁예는 껄껄 웃으면서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궁예는 이렇게 말하면서 왕건에게 상으로 주연을 베풀었다. 이어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굴레와 금 한덩이를 왕건에게 특별히 내려주었다. 그리고는 '그대는 다시는 나를 속이려 들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10] 고려사에 의하면 왕건이 거짓으로 역모 혐의를 인정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그러나 궁예의 이같은 행동은 왕건에게 더욱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다.[11]

궁예는 호족들과 계속 갈등하였고, 호족 세력에 염증을 느낀 궁예왕후 강씨와 두 왕자를 살해한다. 궁예의 숙청에 반감과 위기의식을 느낀 신숭겸, 복지겸, 백옥삼 등은 일부 호족들과 제휴하여 왕건을 추대할 계획을 세운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와 모반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918년 이들은 그를 찾아가 왕위에 오를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왕건은“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으니 왕이 비록 난폭할지라도 어찌 감히 두 마음을 가지겠는가?”라면서 왕건이 일단 거절하였다. 그러나 신숭겸 등은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라고 밝혀 자신들의 거사가 천명임을 강변하였다. 결국 거사를 왕건이 허락하자 그를 새 군주로 세웠다. 왕건은 망설이다가 부인 유씨의 설득에 힘입어 마침내 군사를 모아 왕성으로 향하였다.[11]

고려 건국과 통일 전쟁

즉위 직후

918년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 박술희 등의 추대를 받아 군사를 이끌고 봉기하여 궁예를 몰아내고 새 임금으로 추대되어, 918년 음력 6월 15일 철원궁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뜻에서 국호를 고려로 하고, 새로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정하였다. 그는 국호를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데서 고려, 연호를 천명을 받았다는 뜻으로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파일:Goryo Taejo Wangkun 2.jpg
고려 태조 왕건 어진

이전 임금은 우리나라 정세가 혼란할 때에 일어나서 도적들을 평정하고 점차 영토를 개척하였으나, 전국을 통일하기도 전에 대번 혹독한 폭력으로 하부 사람을 대하며 간사한 것을 높은 도덕으로 생각하고 위압과 모멸로써 요긴한 술책을 삼았었다. 부역이 번거롭고 과세가 과중하여 인구는 줄어들고 국토는 황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전은 굉장히 크게 지어 제도를 위반하고 이에 따르는 고역은 한이 없어서 드디어 백성들의 원망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형편에 함부로 연호를 만들고 왕으로 자칭하였으며 처자를 살육하는 등 천지에 용납할 수 없는 죄를 지어 죽은 사람에게나 살아있는 사람에게나 다 원한을 맺었으며 결국은 정권을 전복당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바가 아니랴.
내가 여러 신하들의 추대에 의하여 왕위에 올라 모든 풍속을 변혁하고 다 함께 새롭게 나아가려 하노니 마땅히 새 규율을 세우고 이전 일을 심각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임금과 신하는 고기와 물처럼 서로 화합할 것이며 이 나라 강산들도 편안하고 밝아지는 경사를 맞이할 것이니 내외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마땅히 나의 뜻을 알지어다!

— 고려사 제1권 태조 무인 원년

919년 자신의 고향이자 세력 근거지인 송악(松嶽)으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이로써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통일 역량을 기르기 위하여 대내적으로는 궁예가 저지른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빈민 구제 기구인 흑창을 설치하고 세금을 낮추어 민심을 안정시키는 한편, 고려에 반대하는 호족들을 줄이기 위해 정략 결혼을 통한 호족 세력과의 융합에도 주력하여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를 확립하고, 정권의 토대를 단단히 구축해 갔다. 또한 구 고구려세력들의 염원이었던 북진정책을 내세웠고 불안한 시대 민심을 수습코저 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왕건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대외적으로는 힘으로 신라지역을 공략하려던 궁예와는 달리 강성한 백제세력에게 시달리던 신라와의 우호정책을 통해 후백제와는 무력으로 대결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고려는 처음에는 927년 공산 동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하였으나, 930년 고창 전투 이후 몇 차례의 전투를 통해 점차 승리의 기세를 잡았다.

반란 진압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지 마군장군 환선길이 4일만에 반란이 일으켰다. 그는 왕건과 함께 고려의 건국에 참여한 인물이었는데, 아내의 제의에 따라 왕권을 노리고 반란을 도모하게 된다.[12] 환선길의 역모 계획은 마군장 복지겸에 의해 발각되어 왕건에게 보고되지만, 왕건은 증거가 없다 하여 무마시킨다. 그 틈을 노려 환선길은 5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내전에 침입하여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있던 왕건에게 칼을 겨눈다. 그러나 왕건이 태연한 태도를 보이며 전혀 겁을 먹지 않자 복명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환선길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다. 결국 그는 근위병들의 추격을 받아 잡혀 처형당하고, 그의 동생 환향식도 같은 혐의로 잡혀 죽었다.[12]

환선길의 난을 진압한 직후에는 청주 출신들이 역모를 도모하기도 했다. 청주 출신 순군리 임춘길을 비롯하여 배총규, 강길아차, 경종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 청주에 가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이 복지겸의 정보망에 걸려들었다.[12] 역모 혐의가 탄로나자 이들은 모두 도망하였다.[12] 배총규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도피하던 중 근위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왕건은 이들을 모두 죽이려 하였지만 청주 출신 수하 현률이 왕건을 만류했다.[12]

치세기간 중

즉위 초반

철원에서 즉위한 뒤 다시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추진하였다. 철원 지역에서는 그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그는 불안감 때문에 송도로 옮겨가게 된다. 철원은 궁예의 터전이었기에 대다수의 철원 주민들은 왕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반감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기에 왕건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 있는 송악으로 도성을 옮겨 왕건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할 요량이었다.[13] 그리고 고토 회복의 기치를 내걸고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즉위 초반 지역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는 각지 호족의 딸들을 후궁로 맞이하였고, 아들들을 특별히 송도에서 수학하게 하였는데 이는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것과 자제들을 볼모로 삼아 각지의 호족을 견제할 목적이었다.

후백제와 연계하여 저항하는 북원 근처의 비적, 호족 세력의 반발을 해결해 나갔다. 즉위 초반 궁예의 부하로 그에게 반발한 환선길의 반란, 이흔암의 반란에 부딪쳤다. 또한 명주의 성주 김순식 역시 그가 궁예를 몰아냈다는 점을 비판하며 그에게 항거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김순식을 포섭하는데 성공하고 후에 왕씨 성을 그에게 사성한다.

개국 초기 그의 입지는 그다지 튼튼하지 못했다. 태봉은 궁예를 구심점으로 이뤄진 호족국가였는데, 궁예가 사라지면서 자연히 호족들간의 결집력은 약해졌다. 태조는 이때문에 내부적으로는 항상 호족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처지였고, 외부적으로는 더욱 강성해진 후백제를 상대해야만 했다.[13] 또한 발해를 침공하는 거란족이나 중국 국가들의 움직임도 예의주시하였다.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는 각 지역의 유력한 인물들과의 결혼을 통한 인척관계를 맺는 한편, 후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다.[13] 또한 궁예가 예전에 시행하던 각지의 유력 호족들의 아들들과 자제들을 송도로 올려보내 유학하게 함으로써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를 대비하기도 했다.

정적 숙청

임춘길 등의 역모 계획이 발각되었으나 청주 출신 측근 현률 등의 만류로 태조는 이들을 처형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조는 이들을 처형하려 하였다. 그러나 현률은 그를 계속 설득했고 나중에는 청주성주와의 관계를 보고하게 된다. 현률은 역모 일당 중 경종청주성 성주 공직의 처남이라고 밝히면서 그를 죽이면 청주성이 반기를 들게 될 것이기 때문에 공직의 반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역모 혐의자들을 죽이지는 말고 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건은 현률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하여 그들을 놓아주려 하였다. 하지만 마군대장군 염상진이 이를 극구 반대하고 나선다.[14] 염상진은 형벌은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되며 예외를 두면 안된다고 반박하였다.

또한 염상진경종이 오래 전부터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종이 최근 자신의 조카를 청주로 데려가려 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피력한다. 당시 지방 성주들은 자신의 아들을 도성에 볼모로 남겨두어야 했는데, 이것은 원래 궁예가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대비책이었다. 청주 성주 공직의 아들 역시 이런 이유로 도성에 머물렀는데, 공직의 아내는 이 때문에 항상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동생 경종에게 은밀히 자신의 아들을 데려올 것을 지시했다.[14] 볼모를 데려간다는 것을 반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경종이 조카를 데려갈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역모를 계획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왕건은 염상진의 주장을 듣고 결국 경종을 비롯한 역모 혐의자들을 모두 죽이게 된다.[14]

왕건은 또다른 정적인 공주 출신 이흔암을 제거한다. 이흔암은 왕건궁예를 내쫓고 왕이 되자 웅주 성주를 포기하고 철원으로 상경한다. 이 때문에 웅주는 후백제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14] 이흔암은 궁예 집권 말기에 장수가 되어 웅주를 점령하고, 그 곳 성주로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궁예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고, 궁예 또한 그를 매우 총애했다. 따라서 그는 궁예를 내쫓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왕건을 용납할 수 없었다.[14] 왕건은 이흔암의 그런 태도가 무척 신경에 거슬렸지만 그가 웅주성을 포기한 것에 대해 문책하지는 않았다. 한때 같은 장수였던 그에게 충성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벌을 내리기에는 명분이 너무 부족했던 것이다.[14]

그때 이흔암의 이웃에 살던 수의대형령 염장의 고변이 있었다. 이흔암이 역모를 도모하기 위해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건은 이 말을 듣고도 쉽사리 이흔암을 잡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염탐꾼을 몰래 보내 이흔암을 감시하도록 했다.[15] 그리고 곧 이흔암의 역모와 관련된 염탐꾼의 보고가 들어왔다.[15] 염탐꾼의 말에 따르면 이흔암의 처 환씨가 변소에서 나오면서 한숨섞인 어조로 "남편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을텐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15] 이것을 빌미로 왕건은 이흔암을 잡아들여 시장 바닥에서 목을 베게 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다.[15] 또한 왕건은 이흔암의 처 환씨가 환선길 형제의 누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신라와의 연대

신라는 왕건에게 호의를 보였다.[13] 왕건이 신라에게 직접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는 점과 신라에 적개심을 갖고 있지는 않는다는 점을 주목했다.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신라신라의 장군 출신인 까닭으로 역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견훤보다는 호족 출신인 왕건을 더 믿을만한 인물로 판단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은근히 고려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내비쳤다.[13]

태조가 동경를 방문할 때면 경애왕경순왕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 회유하였다. 경애왕견훤에게 살해된 뒤에는 고려에게 의존했고 왕건 역시 신라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왕건은 고국인 신라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신라를 계승했다는 이미지를 내세움과 동시에 견훤신라의 장군 출신인데 자기 조국에 반역을 저지른 인물임을 강조, 자신이 정통성을 갖춘 지도자임을 대내외에 공언하였다. 또한 발해의 계승자로도 천명하여 고려고구려발해를 계승한 국가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927년 9월 고려와 후백제의 싸움이 시작되자 신라는 왕건을 지지했다. 경애왕은 "견훤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키면 하늘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왕건을 지원할 뜻을 비쳤다.

통일 전쟁

후백제와의 갈등

태조의 즉위 초 후백제는 태조의 즉위를 축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견훤신라대야성을 침략하자 왕건이 신라의 손을 들어줌으로서 후백제와의 우호는 깨지게 된다. 여기에 후백제에서도 그가 후고구려의 장군 시절 빼앗은 나주 지역을 되찾아와야 한다는 여론이 나타나면서 후백제와의 관계는 악화, 전쟁을 하게 된다.

그의 유화정책에 견훤도 초기에는 호의를 보였다.[13] 호전적인 궁예보다는 왕건이 상대하기 편하다고 판단한 견훤은 고려 건국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고, 몇 번에 걸쳐 신하들간의 교류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견훤은 내심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흉흉해진 내부 민심을 안정시키고 동시에 중국, 일본 등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국가적 면모를 일신하여 자신을 한반도 지역의 맹주로 인식시키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자 했다.[13] 즉위 직후 반란 진압과 정적 처리로 바빴던 태조 역시 후백제와 갈등하여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려 노력했다.

920년 견훤신라 지역인 합천을 침범함에 따라 평화는 깨지고 말았다. 합천대야성이 무너지자 신라진주, 거창, 산청 등의 경상남도 서부와 북부지역에 대해 위협을 느꼈고, 후백제의 통일정책은 더욱 가속화되는 양상을 띠었다.[13] 그런데 이 불안이 그에게 호재가 되었다. 불안을 느낀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호족들이 불안을 느낀 나머지 고려에 투항하였다.[13] 그는 직접 나가 이들 호족을 예우하고 관군을 증원하여 호족들을 지원하였다.

후백제의 신라 침공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한 그는 925년 경상도 조물성으로 출정하여 후백제군을 축출한다.(조물성 전투) 이후 후백제 세력과의 통일 전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초기의 전쟁은 대규모의 사상자만 내고 시간을 끌게 되면서 화의를 청하게 된다. 이에 견훤역시 그의 화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화의 조건으로 서로 인질을 교환했는데, 견훤은 처의 친족인 진호를 고려에 보냈으며 왕건은 동생 또는 6촌 동생인 왕신후백제에 보냈다.

그러나 송도에 왔던 진호가 갑자기 병으로 죽으면서 깨지게 된다. 견훤은 진호의 죽음을 독살로 규정하고 인질로 잡고 있던 왕신을 죽인 후, 공주성을 기습하였다.

발해 흡수와 후백제와의 전쟁
왕건의 나체 좌상
공산 전투에서
(신숭겸 장군 - 우측에 선 이 - 과 태조 왕건 - 오른쪽에서 두 번째 앉은 이)

926년(천수 9)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무너져 망명해 온 발해왕자 대광현을 포함한 발해 유민들을 흡수하고, 신라를 공격한 후백제를 신라와 협공하였다. 그가 고려군을 이끌고 후백제와의 전쟁상태에 돌입했을 때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침입하여 발해를 멸망시켰고, 수많은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몰려들었다. 발해 우민이 고려로 몰려든 덕택에 왕건은 병사들의 수를 더 늘릴 수 있었고 견훤과의 싸움에도 그들을 동원하게 된다.

927년(태조 10) 음력 9월초 견훤은 경상북도 북부를 공략하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꿔 영천을 거쳐 경주로 기습하였다. 한참 싸우던 견훤군의 갑작스러운 퇴각에 태조는 경북 북부지역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경주를 기습한 견훤경애왕을 비롯하여 많은 신라 왕족들을 죽이고, 김부신라 왕으로 앉혔다.[16] 신라는 견훤이 경주로 향해 온다는 전갈을 받은 즉시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그가 보낸 고려군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경주는 함락되고 말았다. 경주를 유린한 견훤은 고려 원병을 의식한 나머지 급하게 말머리를 돌려 퇴각하던 중 대구의 공산(팔공산)에서 태조의 군사와 마주쳤다. 그러나 견훤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서 태조는 병력을 잃고 겨우 후퇴한다.

음력 9월 공산 전투신숭겸, 김락, 전이갑 전의갑 형제와 함께 출정하였다가 크게 패하였다. 공산 전투 초반 고려군이 승리하는 것 같았으나, 싸움의 진행 중 태조는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위험하였다. 이때 신숭겸이 “제가 대왕과 외모가 비슷하오니 제가 대왕으로 변장하면 대왕께서는 무사히 탈출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왕건의 옷을 빼앗아 입고, 태조 왕건이 일반 군졸로 변장하여 포위를 뚫고 탈출하였다.

태조는 부득이 신숭겸과 옷을 바꾸어 입고 빠져나간다. 태조가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동안 신숭겸태조 왕건의 행세를 하며 왕건의 백마를 타고 군대를 통솔하다가 견훤군에게 발견, 견훤군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수천 명의 군사를 잃고 개국공신 신숭겸, 김락 등의 뛰어난 장수들도 잃었다. 왕건은 이 싸움에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개경으로 후퇴하였다.[16] 이후 신숭겸의 시체를 발견한 태조는 크게 슬퍼하여 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면서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한다.

후백제 격퇴와 패권 장악

공산 싸움에서 패퇴한 이후 고려의 힘은 열세에 놓이게 되고, 경상도 서부 일대가 견훤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또한 경북지역의 성이 후백제로 투항하자 왕건은 사람을 보내 이들의 투항을 만류하였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견훤은 오히려 경상도 주민들의 원한을 사게 되어 더 많은 적을 양산하는 결과를 빚는다. 견훤 병사들의 노략질에 분노를 느낀 경상북도 북부 일대의 호족들이 다시 대거 왕건에게 귀순, 고려로 발길을 돌렸다. 경북 호족들의 투항과 견훤 군사의 노략질 등으로 경북 지역의 민심이 왕건에게로 향하면서 그는 기적적으로 세력을 회복하게 된다. 또한 발해가 멸망하고 후발해, 정안국이 세워졌지만 불안감을 느낀 발해 유민들이 계속 고려로 유입되면서 인구가 증가했고, 그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것은 민심을 수습하게 되었다.

927년공산 동수 전투 이후 사기가 오른 후백제군은 930년 7월 갑병 5000명을 이끌고 의성부를 공격해 함락시켰고 그곳의 성주이자 왕건의 부장인 홍술이 전사했다. 그러자 왕건은 직접 출정을 단행한다. 930년 12월 후백제군은 교통의 요충지 고창으로 몰려들었고 이에 왕건은 그곳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고창으로 향한다. 왕건고창에 오자 고창 호족 김선평, 권행, 장정필[17] 등이 군대와 식량을 지원하였고 고려군은 먼저 후백제군의 식량 보급대로 공격해 보급로를 끊었고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고창 병산으로 진격해 3~4일 간의 접전 끝에 고창 지역의 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얻은 고려군이 후백제군 8000명을 사살하고 대승을 거두었고 견훤은 겨우 퇴각하였다.

이어 고창 근처 병산 싸움에서 후백제군을 직접 격퇴하였다. 병산 싸움을 계기로 전세를 바꿔놓는데 성공한다. 밀고 밀리던 공방전을 계속하던 고려군은 수세에 몰리지만 유금필 장군의 활약에 힘입어 후백제군 8천여 명을 죽이는 대상을 거둔다. 병산 싸움 이후 급격히 힘이 약화된 후백제는 이러한 힘을 열세를 회복하기 위해 서해안 일대를 공략하지만 왕건은 다시 수군을 보내 이들을 격퇴한다.

이때를 이용하여 태조는 고려레 투항해온 재암성 성주 선필의 주선으로 금성을 방문하는 성과를 올린다. 그가 경주를 방문하자 경순왕 김부를 비롯한 신라세력들의 고려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높아져 강릉울산의 110여개 성이 고려에 투항하는 등 호족들의 투항도 줄을 이었다.[18] 왕건은 신라 경순왕을 위로하는 한편 후백제군의 잔인함을 규탄하고 그가 신라의 장수였는데 조국을 배신하였다며 견훤을 규탄하였다.

한편 전쟁 과정에서 견훤이 경주를 침략함에 따라 신라 백성들의 감정은 왕건에게 더욱 우호적으로 변해갔다.[16] 왕건은 신라에 욕심이 없다는 듯 제스처를 취했고 신라는 더욱 그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후삼국 통일
태조 왕건 영정(조선시대 작품의 모사본)

이후 신라를 침략하는 후백제와 교전하며 신라를 지원하였다. 신라 경순왕은 결국 고려에 투항할 의사를 피력하고, 마의태자 등 일부의 반대에도 왕건에게 귀순한다. 경순왕의 귀순은 그에게 명분을 안겨주었는데, 일찍이 태조는 견훤과 더불어 경쟁적으로 신라 왕실을 높인다는 점을 내세웠고, 자신이 고구려의 계승자임과 동시에 신라의 계승자라는 점과 견훤을 반란자로 지목함으로써 통일전쟁의 명분을 찾으려 했다.

935년(천수 18) 후백제 왕실 내분으로 그해 3월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그해 9월 야산으로 고려에 입국한다. 그는 도망온 견훤의 귀순을 받아들였고, 상보(上父)의 예로써 받아들였다. 그 뒤 견훤은 어느 사찰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등창으로 사망한다. 같은 해 자진 항복해 온 경순왕을 극진하게 대우하며, 사위로 맞아들여 신라를 평화적으로 합병하였으며,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축출한 점을 들어 후백제를 반역집단으로 규정, 936년 9월 1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리고 출병한다.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神劍)이 이끄는 후백제홍산(黃山 : 연산)에서 일대 격전을 벌인 끝에 멸망시켜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이로써 고려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그 후 신라후백제의 유민들을 포섭, 융화·결혼 정책을 쓰고 귀족은 예로서 대접하였고, 사심관·식읍(食邑)·호장(戶長)·부호장(副戶長) 등을 주어 회유하였다. 한편 숭불정책을 써서 불교를 국교로 삼아 사원을 지었고 승려를 우대하였으며, 신라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교학(敎學)·사상(思想)·민간신앙을 적극 보호하였고, 도참(圖讖)을 믿어 보호하였다. 《정계(政戒)》, 《계백료서(誡百療書)》 등을 내어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왕권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이때 저술한 정계와 계백료서는 후에 실전되었다.

호족 유화 정책

호족들의 난립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는 결혼 정책을 펼쳤다. 각지의 유력 호족들의 딸과 누이를 왕후나 후궁으로 삼는 것이었다. 통일을 이룩하기는 했으나 후고구려 역시 호족 연합체였고 발해계 유민, 신라계 세력, 후백제계 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존재했다. 태조는 이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방안을 강구하던 중 결혼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게 된다. 통일을 하기는 했지만 고려의 초기 형태는 신라처럼 각지의 호족연합체적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통일 이후에도 지방 호족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것은 언제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 왕건은 통일 이전부터 이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혼인정책이라는 화합책을 펼치고 있었다.[19]

고려 건국 초기에 정주의 유씨, 평산의 유씨, 경주의 김씨, 황주의 황보씨, 광주의 왕씨, 충주의 유씨, 신천의 강씨, 의성의 홍씨, 평산의 박씨 등 유력 호족의 딸들과 결혼하여 왕후나 제3,제4왕후와 후궁으로 맞이하였다. 또한 후백제계 세력인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들 역시 후비로 맞이하여 후백제계열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했고, 왕건은 935년 신라 항복 이전에 신라 경순왕의 소개로 경순왕의 사촌여동생이자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와 결혼하는 한편, 자신의 딸인 낙랑공주와 서녀 부인 왕씨를 신라 경순왕에게 보내서 사위로 삼는 등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 또한 중국식 제도를 받아들여 그때까지도 성씨가 없던 부하장수나 장졸들에게 성씨를 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딸, 누이 등이 없던 호족들의 존재와 딸, 누이들과의 결혼으로 안심할 수 없었던 태조는 호족들의 아들, 동생, 조카들을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송도로 올려보내게 하여 일종의 정치적 인질, 볼모로 잡아두고 있었다. 이는 자신과 결혼한 호족들에게도 집안의 남성을 송도로 올려보내게 함으로써 다른 호족들의 반발을 막기도 했다.

게다가 왕건과 함께 고려 건국에 참여한 장군들 역시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19] 태조는 반란의 기미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개국공신이기도 한 부하 장군들에게서 사병들을 압류하였으나 호족들의 사병들은 압류하지 못했고 소수의 관군만으로는 완벽하게 호족들을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족내혼

혼인 정책은 그가 죽고 난 뒤 고려를 왕권다툼의 각축장으로 몰고 가게 된다. 각기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복 형제들을 전면에 내세운 호족들의 왕권 경쟁으로 고려 왕실은 피비린내나는 살육전에 휩싸이게 된다.[19] 이에 태조는 이복 남매들끼리의 족내혼을 추진한다.

자녀들이 송도에 올라왔으므로 호족들은 반란을 기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 호족은 왕실의 외척이라는 신분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태조는 이들 호족들이 자신의 외손, 자기 가문의 외손을 후계자로 앉히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자신의 자녀들끼리 족내혼을 시킨다. 그러나 유력 왕위 계승권자였던 태자 무, 태자 태, 태자 요를 족내혼을 시키려 하자 호족들이 반발하였다.

이복형제들을 등에 업은 호족들의 움직임도 경계하는 한편으로 이복남매간의 족내혼을 허용하여 왕권 강화를 꾀한다. 또한 이러한 족내혼은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특별한 조치이기도 했다.

북진 정책

통일된 국가의 국론 단결을 위해 그는 고구려 계승론을 적극 국가 이념으로 선언하였다. 우선 왕건고구려 계승을 표방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이러한 국시 아래 왕건고구려의 옛 수도 서경을 중시하여 그곳을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고 옛 땅을 되찾으려는 북진 정책(北進政策)의 전진 기지로 삼아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서경으로 천도하지 않았다. 서북면을 개척하고 발해(渤海) 유민들을 받아들였으며, 여진족(女眞族)의 거주지를 공략하는 등 북진 정책을 추진한 결과 왕건이 사망할 무렵에는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고구려 영토의 일부분을 수복하였다.

생애 후반

불교 장려 정책

태조는 고구려-발해 계승론 외에도 불교의 장려를 통해 사상적 통일, 단결을 꾀하려 하였다.

민족화합정책과 북진정책에 매진하여 고려를 안정된 통일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그는 민간의 정신적 통일을 위해 불교를 공식 국교(國敎)로 삼고, 숭불정책을 적극 실시하였다. 태조 자신이 매일 불당에 방문하여 부처에게 불공을 함으로써 직접 모범을 삼았다.

숭불정책의 일환으로 그는 신라 출신의 승려 충담을 왕사로 세우고, 940년 그가 죽자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탑을 세워 친히 비문을 지었으며,940년 12월에는 충청도개태사를 완성시켰다.[20] 동년 신흥사를 중수하고 공신탑을 설치하여 공신들의 모습을 화상으로 그려 벽에 붙였다. 또한 무차대회(無遮大會[21])를 개최, 해마다 이 대회를 열 것을 명하여 매년 무차대회를 열어 신분, 귀천, 지역에 상관없이 불법을 듣게 했다. 이는 효과를 발휘하여 불교 신앙은 다시 민간으로도 폭넓게 확산되었고 국민들의 사상적 단결을 이끌어냈다.

거란과의 관계

거란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였다. 942년, 거란이 화친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어 낙타를 선물해 왔다. 하지만 왕건은 거란이 형제국인 발해와의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킨 신의가 없는 나라라고 하여 사신을 귀양보내고 낙타를 만부교에 메어 굶겨 죽이는 등 강경한 태도로 수교를 거부하였다. 2차로 거란이 사신을 파견했을 때도 역시 거절하였다. 또한 왕건은 유언을 통해서도 거란의 풍습을 따르지 말고 경계할 것을 명하였다.

이후 중국오대 십국에 꾸준히 사절을 파견, 중국의 제국들과 외교활동을 하며 거란여진족까지 견제하는 외교정책을 펼친다.

사망

태조와 신혜왕후의 합장된 왕릉인 현릉(顯陵)

943년(태조 26년) 임종을 눈 앞에 두고 고명대신인 삼중대광 박술희에게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 10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내려 자신의 자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 원칙으로 삼는 귀감으로 남겼다고 한다.

  • 첫째, 불교를 진흥시키되 승려들의 사원 쟁탈을 금지할 것.
  • 둘째, 사원의 증축을 경계할 것
  • 셋째, 서열에 관계 없이 덕망이 있는 왕자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할 것.
  • 넷째, 중국 풍습을 억지로 따르지는 말고, 거란의 풍속과 언어는 본받지 말 것.
  • 다섯째, 서경에 1백 일 이상은 머물러 왕실의 안녕을 도모할 것
  • 여섯째,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증감하지 말고 원래 취지대로 유지할 것
  • 일곱째, 상벌을 분명히 하고 참소를 멀리하며 간언에 귀를 기울여, 백성들의 신망을 잃지 말 것
  • 여덟째, 차령산맥 이남이나 공주강(금강) 외곽 출신은 반란의 염려가 있으므로 벼슬을 주지 말 것
  • 아홉째, 백관의 녹봉을 함부로 증감하지 말고, 병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매년 무예가 특출한 사람에게 적당한 벼슬을 줄 것
  • 열째,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읽어 옛일을 교훈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사에 임할 것

그는 태자 무를 일찍부터 태자로 정하였으나 태자 무의 외가는 세력이 미약한 점을 염려하였다. 그는 박술희를 불러 고명 대신으로 정하고 태자 무의 앞날을 부탁하였다. 임종을 앞두고 신하들이 목을 놓아 통곡하자 태조가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신하들이, "성상께서 백성의 부모로 계시다가 이제 저희들을 버리려 하시니 저희들은 애통함을 이길 길이 없나이다. 왕건은 웃으면서 "뜬 구름같은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하니라"하고 말을 남겼다.인용 오류: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

태조 왕건이 나타나는 작품

저서

  • 《정계》(政誡) : 현재 전하지 않는다.
  • 《계백료서》(誡百寮書) : 현재 전하지 않는다.

평가와 비판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를 재통일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신라통일을 인정하지 않는 견해에 의하면 그가 최초의 민족 통일을 이룩했다고 보기도 한다.

논란과 의혹

훈요 십조

왕건 청동 좌상 (사후 제작되었다.)

그가 죽으면서 직접 후세의 왕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친술하여 남겼다고 하는 훈요 10조는 고려 현종이전까지 즉위한 후왕들에 의해 지켜지지 않았으며, 신라계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른 고려 현종 때 만들어진 위작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정변 관련

그가 직접 정변을 일으켰는가,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는가 여부에 대한 의혹도 존재한다.[출처 필요]

기타

보통 왕건의 성씨에 대해서 처음부터 왕(王)이었다고 말하기도 하나, 사학자 박은봉은 이는 오해라고 반론한다. 그에 의하면 《고려사》 어디에도 왕건의 아버지 용건과 할아버지 작제건의 성씨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22] 박은봉은 왕건이 출세한 뒤 자신의 이름 첫 자인 왕(王)을 성씨로 삼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 건국 이후 조선 태조 이성계 또는 조선 태종 이방원이 왕씨들을 모아다가 이주시키겠다 또는 관광을 시켜주겠다는 이유로 배에 태운 뒤 강화도에서 배를 난파시켜 익살시켰다. 이때 왕건이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너희가 내 후손을 몰살시켰으니 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보복하리라며 보복을 다짐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족내혼 추진 배경

태조가 자식들을 이복 형제끼리 결혼시킨 것은 신라 왕족의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23] 이는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동시에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배려였다. 왕이 족외혼을 했을 경우 왕권이 외척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23]이라는 왕건의 계산이 작용했다.

함께 보기

주석

  1. 고려사절요》 제1권 태조 신성대왕〈고려사절요/제1권/태조 신성대왕〉"신라 헌강왕(憲康王) 3년 정유(877) 정월 14일 병술에 태조를 송악 남쪽 사제(私第)에서 낳으니"
  2. 고려사》 세가 제2 왕이 유조를 남기고 별세하다
  3. 고려사》 세가 제1 태조 총서
  4. 장성현 기자 책/새로쓰는 제주사, 《매일신문》, 2005년 7월 9일 작성, 2011년 2월 23일 확인.
  5. 신명순성왕후 소생
  6. 평주 호족 박수경의 딸 성무부인 소생
  7.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8페이지
  8. 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17/2008121701603_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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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고려사》세가 제2 태조가 거짓자복해 목숨을 구하다
  11.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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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5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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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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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후일 이들을 태사로 봉하여 3태사라 부르게 된다.
  18.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pare199627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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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왕족, 호족, 관료, 중인, 평민, 승려, 속인, 남녀노소, 귀천 등에 대한 차별을 두지 않고 널리 일반 대중에게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주면서 집행하는 불교의 법회
  22. 박은봉.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초 1쇄판. 서울: 책과함께. 21~28쪽쪽. ISBN 978-89-91221-31-4. 
  23.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85페이지

참고 문헌

바깥 고리

전임
초대 군주
(태봉 궁예)
제1대 고려국왕
918년~943년 음력 5월 29일
후임
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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