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종 (고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22.232.248.116 (토론)님의 2015년 9월 26일 (토) 17:46 판
고려 의종
高麗 毅宗
고려의 제18대 국왕
재위 1146년 ~ 1170년
전임 인종
후임 명종
부왕 인종
이름
왕현(王晛)
신상정보
부친 인종
모친 공예왕후
배우자 장경왕후 김씨
장선왕후 최씨
종교 불교

의종(毅宗, 1127년 5월 23일 (음력 4월 11일) ~ 1173년 11월 7일 (음력 10월 1일) )은 고려 제18대 국왕(재위: 1146년 ~ 1170년)이다. 는 현(晛), 는 일승(日升), 묘호는 의종(毅宗), 시호강과장효대왕(剛果莊孝大王)이다.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 任氏)의 맏아들이다.

내시와 환관들과 어울려 유흥과 오락에 깊이 빠지고, 측근들을 중용하다가, 측근 내시의 한사람인 김돈중이 무관들을 업신여겨 무신정변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정변으로 축출된 뒤 이의방이 보낸 이의민에 의해 살해당했다.

생애

생애 초반

의종은 인종임원후의 딸 공예왕후 임씨의 5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러나 모후인 공예왕후는 그보다 둘째 아들 대녕후 경을 유난히 편애하여 그를 태자로 앉히려 했으나, 정습명의 반대와 인종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둘째 동생인 대녕후와 갈등하다가 후일 그를 역모로 몰아 유배보낸다.

즉위

1134년에 태자(太子)가 되었으며 국자감 사업(國子監司業)으로 유학을 가르치던 정습명을 사부로 삼아 수학하였다. 1146년 인종이 죽자 즉위하였다.

즉위한 뒤에 그는 이미 인종 때에 일어난 이자겸의 전횡과 반란, 묘청의 난 등으로 크게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여 쇠약해진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무신(武臣)들을 총애하여 친위군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민 등이 발탁되었다.

인종은 죽으며 정습명에게 아들 의종을 지도할 것을 부탁하였는데, 선제의 유지가 있다고하여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의종이 향락에 빠지자 이를 거침없이 지적, 질타하였다. 1148년(의종 2년) 정습명을 한림학사(翰林學士)에 발탁, 제수(除授)하였고 1149년 좌승선으로 고시관이 되어 시부(詩賦)로 오광윤(吳光允), 십운시로 조정시(趙挺時) 등을 선발하였고, 다시 정습명을 추밀원지주사로 앉혔다.

지적이 계속되자 의종은 정습명을 미워하고 기피하였다. 의종이 그를 꺼리는 데다가 김존중(金存中)과 정함 등은 밤낮으로 그를 헐뜯었다. 1151년 3월 정습명이 병으로 사직하자 왕은 즉시 김존중에게 임시로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왕의 뜻을 이해한 정습명은 독약을 먹고 자결한다. 그러나 후일 의종은 무신정변으로 축출되며 뒤늦게 그를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의종은 장점이 많았다고도 한다. 활을 잘 쏘았으며 잘한 신하에게 상도 후하게 주었다. 의종이 운동도 잘했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큰 단점, 즉 무신들을 차별하는 것과 놀기를 즐겨하는 것으로 인해 폐위되었다.

무신정변과 폐위

그러나 말년에는 문신들 및 환관들과 어울려 유흥과 오락에 깊이 빠지고, 지나치게 불교·음양설, 선풍(仙風)을 중요시하고 유교를 멀리하는 등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였고, 이 과정에서 무신들을 소외시켜 천대받게 만들어 무신정변의 계기를 낳았다.

왕의 총애를 등에 업은 문신들은 약탈을 자행하였고, 무신들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이후 의종의 측근 김돈중오병수박희를 하던 정중부의 수염에 불을 지른 것과 젊은 문신인 한뢰가 나이가 많은 무신이자 종 3품의 대장군인 이소응 장군의 뺨을 때린 것이 빌미가 되어 무신정변이 발생한다.

1170년[보현원에 거동하였을 때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신정변이 일어남으로써 무신 정권에 의해 폐위되어 3년간 거제도둔덕기성에 유폐되었다.

김보당의 난과 최후

그 뒤 1173년김보당(金甫當) 등 의종 복위 세력이 무신 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유배된 의종을 모셔와 받들고 경주로 가서 웅거하였다. 그러나 무신 정권이 보낸 군대에게 모두 패하였다.

1173년[1] 의종은 총애하던 장수 이의민과 곤원사(坤元寺) 연못가에서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그에 의해 등뼈가 꺾여지고 시체는 그대로 동경 (오늘날 경주)의 한 연못에 수장당하고 마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때 그의 나이 47세였으며 이후 동생인 명종에 의해 능이 조성되었는데 바로 희릉(禧陵)이다. 현재 희릉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개성 동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계

의종이 등장한 작품

고려 문종과의 관계

의종, 명종, 신종문종의 4대손이면서 동시에 증손녀 사위가 된다. 의종, 명종, 신종인종의 아들로 문종-숙종-예종-인종으로 이어진다.

문종의 서자인 양헌왕의 아들이자 손자인 강릉공 온(江陵公 溫)은 의종의 왕후인 장경왕후, 명종의 왕후인 광정왕후, 신종의 왕후인 선정왕후의 친정아버지가 된다.

각주

  1. 인물사전 이의민(李義旼), 《한국역대인물》, 2011년 3월 11일 확인.

참고

전임
인종
제18대 고려 왕
1146년 ~ 1170년
후임
명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