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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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순간에 지혜의 신인 로마의 여신 미네르바가 빛을 비추는 동안 전세계의 종교들이 회합함, 다니엘 쇼도비에츠키(Daniel Chodowiecki) 1791년 작

계몽주의(啓蒙主義)란 17, 18세기유럽과 신세계를 휩쓴 정치, 사회, 철학, 과학 이론 등에서 광범하게 일어난 사회 진보적, 지적 사상운동으로, 계몽사상이라고도 부른다. 계몽주의는 교회의 미신적인 면과 독단적인 해석에 대해 반란하였다. 대신 실제적인 도덕을 지향하였으며 형이상학보다는 상식, 경험, 과학을, 권위주의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특권보다는 평등한 권리와 교육을 지향하였다. 이 계몽주의는 1760년경 이후 강력히 대두되게 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은 이성으로 적법성을 판단할 수 있으며, 이성은 권위의 요소이자 권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이 이성은 인간과 세계의 보편적 원리나 자명한 법칙을 발견할 수 있게 했으며 진보를 확신토록 했다.

독일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지에서 계몽주의 운동이 거의 동시에 이런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대서양 주변 국가에서 일어난 각종 혁명을 통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러시아, 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도 이런 움직임을 따랐으며, 라틴 아메리카 역시 아이티 혁명을 통해 이런 움직임에 동참했다. 미국 독립 선언과 영국 권리 장전, 프랑스 인권 선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제정한 1791년 5월 3일 헌법은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1]

"계몽주의" 또는 "계몽주의 시대"라는 용어는 어떤 하나의 운동이나 사상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속하는 사상가들은 서로 충돌되는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어떤 사상의 집합체라기 보다는 가치의 집합체에 더 가까웠다. 전통적 관습, 의례, 도덕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계몽주의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여러 대립하는 철학 사이에도 비슷한 부분이 상당했다. 심지어 계몽주의에 반대했던 철학자들까지 계몽주의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이성의 시기"는 보통 계몽주의 사상의 전주곡으로 여겨진다.[2]

계몽주의의 뜻

Enlightenment(프랑스어: Lumières, 독일어: Aufklärung)를 번역한 한자어 계몽(啓蒙)이란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Enlightenment 사상의 다만 한 부분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자어 번역이 대개 그렇 듯, 이 번역은 한국어로 뚜렷한 뜻을 전달해 주고 있지는 않다. 한편, 칸트는 인간이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 타인의 지도없이 이성적으로 사는 것 또는 미완성 상태에서 완성태로 나아가는 것을 계몽이라 했다

17,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이른바 계몽사상은 인간이 이룩한 문화문명에 고취되어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을 바탕으로 문화와 문명을 진보, 발달 시키려는 사상 또는 그러한 행동을 포함하는 적극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다시 말해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의 힘으로 자연과 인간 관계, 사회와 정치문제를 객관적으로 관찰해서 명료하고 자명한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고 낙관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시대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계몽사상은 이와 같은 정신으로 인간의 존엄과 평등, 자유권을 강조함으로써 유럽의 중세 시대를 지배한 전제군주와 종교신학의 독단 교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교회와 국가를 비판함으로써 지나친 권위를 상당부분 낮추었다. 신학자들이 신성을 수정한 것과 같이 정치가들도 국민과 정부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계몽사상의 의의는 국가·정부의 역할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다. 정부가 더이상 목적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민중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인간의 권리와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는 당연히 국민의 동의를 받지않고는 존재할 수없다. 국가가 그 책임을 다하지 않고 민의를 배반한다면 민중은 혁명적인 저항권을 발동해 국가를 교체, 폐지할 수 있다[3]. 이런 연유로 계몽사상은 17, 18세기 시민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한 것이다. 이 노력의 첫 장을 연 철학자로는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 존 로크를 손꼽을 수 있다. 이후 계몽주의는 프랑스독일에서 백과전서파 (디드로, 볼테르),루소칸트에 영향을 주어 이후 사상들의 출현에 기여했다.

프랑스의 계몽사상

프랑스의 계몽 사상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 시작되었다. 계몽사상은 프랑스 혁명의 계기가 되었으며 민중들에게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은 하늘이 정한 것이 아니라 혁명을 통해 깨부수어야 한다는 강한 사회개혁 의지를 심어주었다. 민중들의 이러한 사회의식은 프랑스 혁명의 원천이 되었으며, 지금도 민중들이 그들을 억압하는 권력에 저항할 수 있다는 저항권을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존중되고 있다.[4]

영국의 계몽사상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에서 특이한 점은 혈통주의에 따른 "선택받은 자"에 대한 점이 포함되어 있다. 고전주의의 계층 혹은 직위에 따라 개인적인 능력 또한 세습된다고 말한다.

독일의 계몽사상

독일은 당시 시민사회의 발달이 미미했기에, 프랑스의 계몽사상의 활발한 전개에 영향을 받았는데, 프랑스와는 다르게 독자적으로 발달했다는 특징이 있다. 계몽주의가 유럽 전역에 퍼지던 17세기에 프로이센은 문화적인 관점에서는 유럽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프리드리히 2세는 계몽 사상가인 볼테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그와의 서신 교환이 프랑스 어로 이루어진 점, 그 외에 많은 예술가와 문인, 학자들과도 프랑스 어로 이야기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국왕을 중심으로 한 프로이센의 문화,예술은 독일적인 것이 아니라 프랑스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문화, 예술,학문 분야에서의 서유럽 선호 현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적인 것으로 서서히 변화된다. 독일인 중에서도 새로운 사상과 예술을 대표하는 인물이 등장하게 되었다. 서유럽에서 철학과 정치 이론 부문에서 뉴턴의 자연 과학적 사고 방식이 널리 퍼지면서 등장한 계몽주의 철학이 독일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칸트(1724~1804)가 살았던 시기였다.

독일 계몽주의의 발달

독일의 계몽주의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계몽주의보다 늦게 나타는데,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당시 독일은 300여 개의 국가들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형태 안에 연방국가로 유지되고 있었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당시에 외국문화가 독일인들의 생활과 사상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을 때, 계몽주의는 외국 문화에 대한 반발로 표출되었다. 계몽주의는 다른 나라의 것을 모방하는 것에 벗어나 다양한 문화들을 수용하고 발전시키면서 독일 내에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인간의 사고가 기존의 종교적 규범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형태로 발전하면서 계몽주의는 더 나아가 세상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강조한다. 계몽주의 시대의 문학 또한 인간의 합리적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며, 이성과 법칙을 중요시 여겼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프랑스나 영국의 계몽주의가 국가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발전하여 근대 시민 혁명의 이론을 제공한 것에 비해, 독일의 계몽주의는 혁명의 원리와 결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는 시민 세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던 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독일, 특히 프로이센의 계몽주의는 점진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장기적인 사상으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또, 계몽주의를 받아들인 중심 계층에 자신을 '국가 제일의 공복'으로 자처한 프리드리히 2세와 같은 군주가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 계몽주의는 국가 혁명의 원리가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강력한 국가 건설을 위한 서구화의 일환이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군주제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듯이 프로이센의 계몽주의도 프리드리히 대왕의 사망과 함께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프리드리히 대왕 사후 프로이센의 계몽주의는 국가와 사회를 변혁시키는 실천적인 성격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보다 관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대표적인 계몽주의 철학자인 칸트의 사상에서도 나타난다. 이미 초기의 독일 계몽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종교론이나 경건주의 신앙 등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칸트의 철학 세계도 계몽주의를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을 철저히 구분지음으로써 시민 정신의 자유로운 발현보다는 시민의 교양으로서 특수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독일의 계몽주의와 문학

무엇보다 독일의 계몽주의는 문학에 결과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계몽주의가 확산되면서 지나치게 규율들에 얽매이게 되어 인간의 합리적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본연의 목적도 상실하게 되었으며, 문학에서도 작품의 내용보다 법칙들을 더 우선시하게 되어 인간의 감정에 대해 소홀하게 되었다. 이성만으로는 인간 내면의 복잡하고 깊은 심리를 표현하기 어려웠고, 감정을 나타낼 수가 없었다. 계몽주의의 문학은 인간의 다양한 행동 양식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그러한 것들에 대해 공감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문학의 본래 목적과 점점 멀어져 갔다. 계몽주의의 문학은 기쁨이나 슬픔 같은 인간의 심리를 억압하는 경향을 보여주기도 했다. 몇몇 작가들은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새로운 경향의 작품을 저술하여 사회 분위기를 바꾸고자 한다. 이 때 나타난 운동이 인간 본연의 감정을 중시하던 질풍노도 운동(Sturm und Drang)이며, 젊은 시절의 괴테와 쉴러가 대표적인 작가이다.

참고문헌

이영수(1992.12). 젊은 괴테와 계몽주의. 『독일학연구』, 8, 63-75. Heinrich Haerkotter, Deutsche Literaturgeschichte, 1962.

계몽주의의 영향

  • 계몽주의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에서 벗어난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으며, '하나님의 책'(The book of God)이라고 불리던 성서에 대한 자유로운 비평의 토양이 되었다.

대표적 계몽사상가

주석

  1. Robert R. Palmer, The Age of the Democratic Revolution (1964)
  2. Hackett, Louis (1992). “The age of Enlightenment”. 2008년 1월 18일에 확인함. 
  3. 안효상 역《세계를뒤흔든 독립선언서》그린비,53쪽
  4. 《교실밖의 세계사》/김성환 지음/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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