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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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지(慶熙宮址)
대한민국사적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지정번호 사적 제271호
(1980년 9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제작시기 1616년

경희궁(慶熙宮)은 서울시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광해군 10년(1623년)에 건립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서울시에 있는 5대 궁궐 중에서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으며, 새문안 대궐, 새문동 대궐, 아주개 대궐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의 이궁(離宮)으로, 경운궁(덕수궁)과 홍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부지 7만 2천8백 평에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며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되어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이다. 그나마 초석과 기단이 남아 있고,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잘 보전돼 있어 궁궐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1]

일제 강점기에 경희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위치하였다. 경희궁터는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었고,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로 이전한 이후 서울 시립 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건물을 허물고 경희궁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서울고등학교의 별칭과 경희대학교의 명칭 등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역사

서궐도안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친 것이다.[2]

경덕궁터는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정원군)의 사저가 있던 곳이다.[2] 광해군임진왜란 뒤 재건된 창덕궁으로 들어가기를 꺼리고, 인왕산 아래 새 궁궐인 인경궁(仁慶宮)을 짓다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설을 믿고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그의 집을 빼앗아 1617년(광해군 6년)~1623년(광해군 15) 사이에 경덕궁을 세웠다.[2] 그러나 1623년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경덕궁을 쓰지 못하였다.[2] 인조가 즉위한 뒤에 창덕궁이 소실되고,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마저 불타버리자 인목대비를 받들어 이 궁궐로 이어하였다.[2] 이 곳에서 숙종이 태어났고, 숭정문에서는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하였으며, 숙종, 영조, 순조가 승하하였다.[2]

경희궁은 경복궁 서쪽에 세워진 까닭으로 서궐(西闕)로 불렸고, 이 밖에도 새문안 대궐, 야주개 대궐, 새문동 대궐 등으로 불렸다.[2] 경희궁은 순조 29년(1829년) 10월 화재로 인하여 전각 대부분이 소실된 것을 1831년에 중건하였다.[2]

일제가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궁궐의 서쪽에 세우면서, 경희궁의 많은 전각들은 헐리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2] 정전인 숭정전은 일본의 한 불교 종파인 조동종의 조계사 본전으로 쓰기 위해 1926년 남산 기슭으로 이건되었다가 지금은 동국대학교의 법당인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2] 흥정당은 1928년 광운사로 이건되었으며, 관사대(觀射臺)는 사직단 뒤로 이건되어[2] 현재 황학정(黃鶴亭)으로 쓰이고 있다.[3] 흥화문은 1932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의 문으로 쓰였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폐사되고, 이후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 지금의 위치(계양문:남문)로 다시 옮겨졌다. 본래의 위치는 구세군회관 자리이다. [3]

경희궁터는 광복 후에 서울중ㆍ고등학교로 쓰이다가 1980년 6월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현대건설에 매각되었다.[3] 그 뒤 서울특별시에서 이 터를 매입하여 사적 제271호로 지정하였으나, 서울시의회에서 경희궁 복원비용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복원공사는 중지되었다. 시에서 경희궁터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세우면서 다시 훼손되었다. 창건당시의 경희궁 규모는 무덕문지(북문)의 유구가 발견된 대한축구협회, 성곡미술관, 일조각출판사, 내수동교회, 구세군회관, 서울시교육청, 서울복지재단을 모두 경희궁지였으며, 기상청 서울관측소 일부도 포함되는 것으로 추측된다.[3]

2013년 1월, 서울특별시청종로구청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제출된 계획은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 공동으로 2014년부터 2023년까지 경희궁 2차 복원이 진행되는 것을 소재로 하고 있다. 경희궁 복원 예산은 국가 예산 70%, 서울특별시 예산 30%가 투입될 예정이다. 정문인 흥화문을 원위치로 복원하며, 방공호를 철거한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할 계획이다. 또한 서울시립 경희궁미술관을 철거한 후 흥정당을 복원하며, 현재 성곡미술관 주변에 남아있는 궁장을 포함하여 경희궁 궁장이 일부 복원된다. 2단계에서는 서울역사박물관 이전과 궁지 내 민간 건물 매입이 추진된다.[4]

건축물

경희궁을 구성하는 전각들은 궁궐지, 서궐도안, 서궐영건도감의궤 등의 자료와 유구를 통하여 알 수 있다.[3] 흥화문과 숭정문은 궁궐의 내외 출입문을 형성하였고,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융복전, 회상전, 흥정당, 자정전, 장락전, 집경전, 만학정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3]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파괴되거나 이전되었다. 현재의 터에 남아 있는 것은 건물터와 원래의 자리로 다시 이전된 흥화문뿐이며, 나머지는 새로 복원된 것이다.

경희궁의 배치 형태와 공간 구성은 다른 궁궐과 달리 매우 독특하다.[5] 정전인 숭정전 영역이 서쪽에,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영역이 동쪽에 나란히 놓여 있으며, 정문인 흥화문은 궁궐의 남쪽에 있지 않고, 동남쪽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다.[5] 따라서 정문에서 내전으로 진입하는 길은 침전 앞을 지난 다음 북으로 꺾어 정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5]

흥화문

흥화문(興化門)은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워진 경희궁의 정문이다.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다.[5]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 오른쪽에 개양문, 서쪽에 숭의문, 북쪽에 무덕문이 있었다.[5] 일제 강점기박문사(현재의 장충단 자리)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일제가 이전하여 경춘문(景春門)이라 불렀다. 광복 후 장충동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1988년 경희궁터로 다시 옮겨왔다.[6] 흥화문은 원래 경희궁터에 동남쪽 금천교 밖, 지금의 구세군회관 자리에 동향하고 있던 경덕궁 정문이었는데, 처음과 달리 지금 위치에 남향하여 세워졌다.[5]

금천교

흥화문 안쪽의 홍예교(무지개다리)로, 광해군 11년(1616년) 세워졌다. 일제 강점기에 묻혔다가 2001년 발굴하여 복원하였다. 발굴조사 때 나왔던 유구는 복원시 함께 사용되었다.

숭정문

숭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상왕의 승하시 정전이 아닌 정전의 문에서 즉위하는데 경종, 정조, 헌종이 그러했다.

숭정전

숭정전(崇政殿)은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운 것으로, 경희궁의 정전이다. 숭정전 일곽은 남향한 경사지에 축대를 조성하여 그 위에 건물이 들어서 있다.[5] 숭정전은 행각으로 둘러졌으며, 뒤로는 자경전이 있다.[5] 동ㆍ서 행각은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바닥과 지붕이 단을 이루며 높아지도록 조성되었다.[5] 숭정전은 이중 월대 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건되어 본래 건물은 현재 동국대학교 안에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 현 위치의 건물은 1989년 12월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1994년 10월 주변 행각과 함께 완공한 것이다. 2층 윌대 중 상월대의 답도는 정각원에 남아있고, 하월대의 답도는 복원된 경희궁의 숭정전에 있다. 상월대의 답도는 봉황, 하월대의 답도는 공작무늬이다.[5]

자정전

현재 《서궐도안》에 따라 복원되어 있다. 이 건물은 주로 편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태령전

태령전은 발굴조사시 유구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서궐도안》의 자정전과 숭정전의 위치를 추정하여 복원하였다. 이 건물은 조선 영조의 어진을 모신 곳이었다. 2000년에 서울시에서 복원하였다.

경희궁 방공호

1944년 초, 경성중앙전신국의 피폭에 대비하여 중요 통신 유지를 위해 설치된 지하전신국 겸 방공호이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방공호를 만들었다. 방공호 건설에는 당시 체신국 직원들과 경성중학교의 근로보국대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경성중학교 내에 방공호를 조성할 것이 결정된 뒤 경성중학교 학생들 대부분은 교내 방공호 조성에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파작업은 조선군사령부 공병대가 담당하였고, 작업이나 실무 행정은 전부 체신국에서 담당했다.[7] 서울특별시청은 방공호를 서울역사박물관의 근현대유물 수장고로 활용하기로[8] 하고 2014년 수장고 준공[9]을 계획하였으나, 2013년 수립된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에 따라 철거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할 계획이다.

황학정

원래 경희궁에 있었던 정자로 고종황제가 청-일-러 3국의 3파전을 근심해 이곳에서 활을 쏘며 피로를 풀었는데, 일제 때 팔려나가 현재 사직공원의 옛 등과정 자리에 있다.

함께 보기

각주

  1. 글로벌 세계대백과》〈경희궁
  2. 이상해, 2004, p.93.
  3. 이상해, 2004, p.94.
  4. “일제가 망친 경희궁 내년부터 복원한다”. 매일경제. 2013.01.27 17:12:53. 
  5. 이상해, 2004, p.97.
  6. 경희궁 흥화문의 일제수난 생생히, 《한국일보》, 2009.2.25.
  7. 2004년 서울특별시청 보고서 '경희궁 영조·훼철 사료조사 및 활용방안'
  8. “일제가 만든 경희궁 방공호, '유물 수장고' 활용”. SBS. 2010년 2월 5일 20:51. 
  9. “일제가 경희궁에 만든 거대 '방공호'…'유물 수장고' 된다”. 노컷뉴스. 2012년 2월 17일 07:01. 

참고문헌 및 링크

  • 이상해, 궁궐ㆍ유교건축, 서울: 솔 출판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