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헌 (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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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헌
작가 정보
출생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부산직할시
직업대중음악 평론가
대학 교수
前 영화평론가
학력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음악학과 음악학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석사
필명호(號)는 의박(意薄)
활동기간1986년 ~ 현재
장르대중음악평론
영화평론

강헌(姜憲,1962년 ~ )은 대한민국대중음악 평론가다. 호(號)는 ‘의박’(의지박약)이다.[1] 저서로 《전복과 반전의 순간》 《명리-운명을 읽다》가 있다.[2] 2019년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취임하였다.

이력[편집]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대학교의 음악대학원 음악학과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했다. 그는 "대학 생활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면서 "과가 과인만큼 주변이 거의 운동권이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운동권 골수들이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어 옆에서 딴죽을 걸곤 했다. 바로 몇 달 전만 해도 남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면서 출세할 야망으로 공부해 서울대에 들어온 아이들이 책 몇 권 읽었다고 정의가 어쩌고 혁명이 어떻고 하면서 흥분한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열성적인 운동권 동기들과 '10년 뒤에도 너희가 운동권이면 내가 너희를 존중하겠다. 지금 내가 보기엔 너희가 혁명가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라면서 싸우기도 했다."고 회상했다.[3]

전설적인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의 일원으로 《오! 꿈의 나라》 같은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독립영화를 하게 된 것은 영화판 문을 두드릴 때 처음 만난 운동권쪽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장산곶매 활동을 하다 보니,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일도 하게 되고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집행위원도 하게 됐다.[3] 《상상》, 《리뷰》 등의 문화잡지를 만들었으며, 검열 철폐운동에도 앞장섰다.[1] 1991년 《김현식론》 이후 한국 대중음악에 관한 비평을 25년간 썼다. 들국화 헌정 앨범 및 노무현 추모 앨범 등의 프로듀서를 맡았고 《검열 철폐 기념 콘서트 자유》를 만들었다.[3]

그는 두 번 이혼했고, 나이 마흔둘 시절이던 2003년 3월에 갑자기 ‘사망확률 98%’ 진단을 받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지내던 어느 날 밤, 이유도 없이 동맥이 70cm나 찢어진 것이다. 응급실에 실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을 때 의사는 “당신에게 남은 날은 길게 봐야 2년”이라고 알렸다. “조금씩 주변을 정리하라”는 얘기를 들은 그날 이후 평생 즐기던 소주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못하게 됐다.[4] 대학로 벙커1에서 이뤄진 강연을 기반으로 한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음악사에서 중요했던 네 가지 장면을 다뤘다.[1] 그가 와인바를 운영했을 때, 대부분 사주를 믿었던 소위 상류층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재미 삼아 사주를 봐주기 시작했는데, "다른 역술가와 달리 굉장히 새롭다고들 했다"며 인문학적 기반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좌를 시작했고 3년 후 책을 냈다. 2015년 12월 출간한 《명리》는 보름도 안 돼 초판 5000부가 모두 팔렸고, 두 달 만에 6쇄를 찍었다.[5]

저서[편집]

평론[편집]

  • 《전복과 반전의 순간》
  • 《명리-운명을 읽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백승찬 (2015년 7월 5일). “첫 단독저서 ‘전복과 반전의 순간’ 낸 음악평론가 강헌… 음악이 품고 있는 ‘수많은 속뜻’ 아는 게 중요”. 《경향신문》. 
  2. 강헌. “[특별기획] 비틀스는 왜 ‘현대의 고전’이 되었나?”. 《중앙일보》. 
  3. 김예리 (2014년 7월 29일). “<自由人 인터뷰 54> 음악평론가 강헌”. 2017년 3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4. 송화선 (2016년 1월 13일). “운명을 읽는 남자, 음악평론가 강헌”. 《동아일보》. 
  5. 임주리, 김경록 (2016년 2월 17일). “[BOOK & TALK] 강헌 "우주는 가치의 우열을 두지 않는다 그저 다를 뿐". 《중앙일보》.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