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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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기무처
김홍집, 갑오개혁을 시행했던 김홍집 내각의 중심 인물

갑오개혁(甲午改革)은 1894년 음력 6월 25일(양력 7월 27일)부터 1895년 8월까지 조선 정부에서 전개한 제도 개혁 운동을 말한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불렸다. 내각의 변화에 따라 세분화하여 제1차 갑오개혁과 제2차 갑오개혁으로 나눌 수 있으며, 후에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개혁의 기간과 내용

한말(韓末)에 일어난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혁명 등은 극도로 부패한 조선왕조와 양반계급에 대한 민중의 자아 각성에 의한 반발이며, 누습에 젖은 수구파(守舊派)에 대하여 신제도로 개혁하려는 개화파의 혁신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러나 민중의 자아각성과 근대적 혁명을 기도한 동학혁명은 마침내 외세의 개입으로 소기의 성과를 보지 못하고, 청일전쟁을 유발시켰다.[1] 이후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근대적 개혁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무력한 한말 정부는 내우외환의 다난한 속에 자주의식의 각성과 함께 일본의 침략을 전제로 한 강압에 못이겨 국내 개혁이 이루어지니 이것이 1894년의 갑오경장이다.[1]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김홍집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국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노인정 회담에서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은 교정청에 의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갑오경장 초기에 흥선대원군이준용명성황후 폐서 시도에 착수했다. 7월 24일(음력 6월 22일) 흥선대원군은 측근 이원긍을 오토리 일본 공사에게 보내 명성황후 폐서의 취지가 담긴 문건을 제시하고 동의를 요구하였다. 이준용도 25일까지 오토리 공사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 공사관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2]

주요 개혁으로는 신분제 (인신 매매 행위, 노비제)의 폐지,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 폐지 등이다.[3]

제1차 갑오개혁

1894년(고종 31년) 7월부터 11월까지 이루어진 개혁이다

1차 김홍집내각은 김홍집, 김윤식, 김가진 등 17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라는 임시 합의기관을 설치한다. 이 기관은 행정제도, 사법, 교육, 사회 등 전근대적인 제반문제에 걸친 사항과 정치제도의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특히 개국기원(開國紀元)을 사용하여 과의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1차개혁 때에는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 기존 조선의 6조(六曹) 체계를 8아문(八衙門;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으로 개편하고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둔다. 개혁전담기구였던 군국기무처는 2차개혁 때 폐지된다.

흥선대원군이 7월부터 8월까지 달포에 걸쳐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과의 입장 차이로 은퇴를 강요 받는다.

제2차 갑오개혁

1894년 11월부터 1895년 5월까지 이루어진 개혁이다.

2차개혁 때는 김홍집박영효연립내각 형태를 가졌다. 의정부를 내각이라 고치고 7부를 두었다. 인사제도는 문무관(文武官)을 개편하고 월봉제도(月俸制度)를 수립하였으며, 과거를 없애고 총리대신을 비롯한 각 아문 대신들에게 관리 임용권을 부여했다. 또한 행정제도를 23부로 개편하였으며, 신분제도의 개혁을 통해 문무, 반상(班常)의 구별을 폐지하였고, 지방관에 의해서 집행되던 사법과 군사업무를 중앙에 예속시켜서 근대 관료체제를 이룩하였다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

1895년(을미년) 8월부터 1896년 2월 김홍집이 살해될 때까지 이루어진 개혁이다. 친일세력들이 내각을 구성하여 주도한 개혁으로 가장 친일적 성향이 짙었다.

을미개혁 때는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고치고, 단발령을 단행하였다. 처음으로 태양력을 도입하여 태양력을 기준으로 정삭(正朔: 정월 초하루, 지금의 양력설)을 정하였고, 정부 주도로 종두를 시행하였다. (사설 의원에서의 인두 및 우두 접종은 그 전에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근대적 우편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우체사가 설립되었다.

단발령 등 을미개혁의 단행 때문에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던 민중의 반일, 반정부 감정이 끝내 폭발하였고, 이것이 초기의 대규모 항일의병전쟁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갑오개혁의 주요 내용
정치 경제 사회 군사
제1차 갑오개혁
  • 개국 기원 연호 사용
  • 정부를 궁내부와 의정부로 구분
  • 과거제 폐지
  • 관료제도를 18품급에서 11품급으로 축소 개편
  • 선거조례 제정
  • 전고국관제 제정: 유교 경전 아닌 실무 과목으로 시험하여 관리 선발
  • 정부 재정 탁지아문으로 일원화
  • 화폐 제도 은본위제로 통일
  • 조세의 금납화 실시
  • 인재 등용에서 문벌과 신분 타파
  • 문무 관리 차별 폐지
  • 연좌제 폐지
  • 조혼 금지
  • 청상 과부 재가 허용
  • 공사 노비 혁파
  • 인신매매 금지
  • 의제 간소화
제2차 갑오개혁
  • 의정부 8아문을 폐지, 일본식 내각과 7부로 개편
  • 궁내부 관제 대폭 간소화
  • 전국 8도를 23부로 개편
  • 사법권 독립, 각종 재판소 설치
  • 치안과 행정 분리
  • 한성 사범 학교 관제, 외국어 학교 관제 공포
  • 신교육 실시
  • 경찰권 일원화
  • 군무아문 체제로 개편 단행: 신설대, 시위대, 훈련대 신설
  • 3도 통제군과 각 도의 병영, 수영, 각 진영과 진보 폐지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
  • 태양력 사용
  • 종두법 시행
  • 우체사 설치(근대적 우편제도)
  • ‘건양’ 연호 사용
  • 단발령
  • 근대식 각종 학교 설치
  • 훈련대와 시위대를 합병하여 서울에 친위대, 지방에는 진위대를 설치

개혁의 종결

개혁 방향에 불만을 품은 일본 측과 고종·명성황후 등의 공격으로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함에 따라 개혁 내용은 약화되었고 김홍집 내각에 의해서 개혁이 이어졌다고 하지만 사실상 명성황후 시해와 아관파천 후 내각 요인들이 살해당하는 등의 문제로 개혁은 종결된다.

개혁의 의의

갑오개혁은 정부 주도의 근대적 개혁의 성격을 지닌다. 특히 유교적 사회 질서를 근대적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 많이 보인다. 먼저 계급제도타파, 문벌을 초월한 인재의 등용, 노비매매 금지 등 전통적 조선의 신분제도를 바꾼다. 이 시기 이후 신분 차별은 급속하게 사라졌다. 다음으로 죄인의 고문과 연좌제(緣坐制) 등 비합리적인 형벌의 폐지. 마지막으로 조혼금지, 자유의사에 의한 과부의 재혼, 양자제도의 개정, 의복제도의 간소화 등 불합리한 전근대적 제도들을 개혁하게 되었다.

유럽의 근대사회는 르네상스 이후 종교개혁·산업혁명·프랑스 혁명 등 문화적 혁신과 과학적 문명의 진보를 통해 획기적인 근대화의 과정을 밟아 왔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는 실학운동과 동학혁명이 고질적인 봉건왕조의 폐쇄성으로 인하여 개화(開化)를 보지 못한 채, 갑오경장이라는 타율적인 힘에 의해 외세 자본주의가 이룩한 서구적 근대화 과정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따라서 봉건왕조의 유교적인 형식 논리, 양반 관료의 가렴주구(苛斂誅求), 그리고 은둔적인 쇄국정책(鎖國政策)은 일제의 식민지화를 촉진시켰고, 조수(潮水)처럼 밀려든 근대사조를 주체적으로 수용·극복하기에는 너무나도 힘에 겨웠다. 그리하여 문화와 생활 면에서도 서양문물의 영향이 직접·간접적으로 침투되어 근대화의 구호가 바로 개화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다. 당시에 유행한 "개화장(開化杖), 개화당(開化黨), 개화 주머니, 개화군" 등의 색다른 이름까지 나올 정도로 개화기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개화란 것은 "문명개화(文明開化)"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구시대의 문화 및 생활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의 문화를 흡수하고 새로운 생활양식으로 변모·동화함을 뜻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개화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 문물에 동화(同化), 즉 서양화한다는 말이요, 시대적인 의식 전환으로 근대화한다는 뜻까지 포함한다.[4]

갑오경장은 외세에 의한 피동적인 제도상의 개혁이기는 했으나 이것이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획기적인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첫째 정치적 면에서는 귀족정치에서 평민정치에의 전환을 밝혔고, 외국에의 종속적인 위치로부터 주권의 독립을 분명히 했고, 둘째 사회적인 면에서는 개국 기원의 사용, 문벌과 신분계급의 타파, 문무 존비제(文武尊卑制)의 폐지, 연좌법(緣坐法) 및 노비제의 폐지, 조혼(早婚)의 금지, 부녀 재가(再嫁)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셋째 경제적인 면에서는 은본위의 통화제, 국세 금납제(金納制)의 실시, 도량형의 개정, 은행 회사의 설립 등 이 밖에 2백여 조항의 개혁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말 정부로서는 이를 주체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자주 역량이 부족하고, 외세에만 의존하는 한편, 이 새로운 개혁을 저지하는 기존 봉건세력의 힘이 컸기 때문에, 불행히도 실질상의 큰 성과를 얻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한편 이 때부터 한말 사회에서는 인습과 전통의 구속을 벗어나 자유로운 지식을 보급하고, 일반 민중으로 하여금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개화·계몽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것은 당시의 유교적인 인습과 전통에 사로잡힌 재래의 누습을 타파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 자아를 각성하고 과학문명에 입각한 새로운 지식을 체득하게 하려는 시대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개화 계몽기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겠다는 의욕보다는 낡은 것에서 벗어나겠다는 욕구가 더 선행했으며, 모든 것은 신(新)과 구(舊)로 대립되었고, 낡은 것은 일차 부정의 단계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1] 또한 김홍집, 박영효 연립내각이 고종을 강제하여 발표하게 한 홍범 14조는 한국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법령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일본 입장에서도, 일본이 개혁을 종용하였지만, 조선을 위한 개혁이 아니었다. 당시 외무대신 무쯔(陸奥宗光)가 갑오개혁에 대해서 “우리 나라(일본)의 이익을 주안으로 삼는 정도에 그치고, 감히 우리의 이익을 희생시킬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다.[5]

한계

일본의 한반도 침략 의도가 직접적으로 반영된 타율적 개혁이다. 군사적 제도의 개혁은 일본 제국의 군사적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내용이 적용되었고 보수세력의 반대도 극심하였다. 또한 경제체제의 개혁도 일본 제국과 서구열강의 경제침략에 유리한 측면이 많았다. 이런 일련의 개혁 정책에 따라 일본에 대한 반감이 높았던 조선내에서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지못해 개혁의 내용에 크게 반발하고 이러한 반감이 을미사변 후의 을미개혁항일 의병 활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같이 보기

각주

  1.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갑오경장과 개화·계몽기
  2.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6쪽.
  3. 국사 편찬 위원회; 국정 도서 편찬 위원회 (2004년 3월 1일). 《고등학교 국사》. 서울: (주)두산. 336쪽. 
  4.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개화의 의미
  5.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56~57쪽. ISBN 89-7199-03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