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케후 마사유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가케후 마사유키
掛布 雅之

기본 정보
국적 일본의 기 일본
생년월일 1955년 5월 9일(1955-05-09)(68세)
출신지 지바 현 지바 시 주오 구
(니가타 현 산조 시 태생)
신장 175cm
체중 77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좌타
수비 위치 3루수
프로 입단 연도 1973년
드래프트 순위 6순위
첫 출장 1974년 4월 7일
마지막 경기 1988년 10월 10일
경력


가케후 마사유키
일본어식 한자掛布 雅之
가나 표기かけふ まさゆき
국립국어원 표준가케후 마사유키
통용 표기카케후 마사유키
로마자Masayuki Kakefu

가케후 마사유키(틀:Ja-y, 1955년 5월 9일 ~ )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니가타 현 산조 시에서 태어나 프로 선수 시절 한신 타이거스를 대표하는 주력 선수로서 활약했고 한신 팬들이나 언론에서는 ‘미스터 타이거스’(ミスタータイガース)[1]라고 불리고 있다.

인물

어린 시절

어머니의 친정인 니가타 현 산조 시에서 태어나 생후 1년 때부터 아버지의 고향인 지바 현 지바 시에서 자랐다.[2][3] ‘가케후’(掛布)라는 희귀 성의 근원은 할아버지의 출신지 아이치 현 이누야마 시 부근에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2] ‘마사유키’(雅之)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배우 모리 마사유키의 열혈 팬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2] 아버지는 전쟁 전에 지바 상업학교의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야구부 감독으로 고시엔 대회 출전을 바로 눈앞에 둔 시점에서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야구와의 연을 끊었다.[3] 전쟁 이후에는 중국에서 돌아와 직업을 바꾼 뒤 고향에서 음식점을 운영했다.[3] 생가가 있었던 장소는 현재 미스터도넛 게이세이 지바추오점이 들어서 있다.

아마추어 시절

어린 시절에는 검도를 시작하여 경찰서에서 연습했으나 초등학교 시절 보호구를 사달라고 부모님에게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해 하는 수 없이 그만두었다. 아버지가 중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복귀하자 아버지의 밑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이때 아버지에 의해 주로 쓰는 팔을 교정받았다는 자료가 많았지만 실제로는 교정한 바 없으며 본인도 오른손으로 던지고 왼손으로 치는 선수가 된 이유는 모르겠다고 밝혔다. 참고로 펜을 잡을 때는 오른손, 젓가락을 잡을 때는 왼손을 사용한다.

나라시노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2년 하계 고시엔 대회(제54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4번 타자 겸 유격수로 출전했으나 1차전 상대인 도요 대학 부속 히메지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패배했고(당시 히메지 고등학교에는 훗날 한신 타이거스에서 팀 동료가 되는 야마카와 다케시가 있었는데 이 경기에서 만루 홈런을 때려냈다) 3학년 때인 1973년에는 현 예선에서 패해 고시엔 출전에는 실패했다.

그 해 가을, 아버지의 지바 상업고등학교의 야구부장 겸 감독이었던 시절 제자였던 오가와 요시하루 당시 야쿠르트 2군 감독에게 입단 부탁을 넣었다가 거절당해 당시 지바 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던 시노다 히토시에게 프로 구단의 중개 역할을 부탁했다. 시노다와 친분이 있던 한신 타이거스안도 모토오(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코치를 맡음)에게 중개를 부탁한 덕분에 당시 가네다 마사야스 감독에게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2군 캠프에 대동했다(사실상의 입단 테스트였다고 한다). 드래프트 6순위로 지명되었고 계약금 500만 엔, 연봉 84만 엔으로 입단 계약을 맺었다.

프로 야구 선수 시절

입단 초기 ~ 1979년

입단 이후 1974년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 철저한 단련을 받았다. 시범 경기에서의 첫 출전은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였는데 같은 해에 난카이 드래프트 1순위였던 노자키 쓰네오로부터 대타로서 첫 안타를 기록했다. 시범 경기에 첫 선발로 출전한 것은 3월 21일의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전(나루토 구장)에서 중심축인 유격수 후지타 다이라가 결혼식 때문에 경기에서 빠져 7번·유격수 자리에 그 대역으로 들어간 것이었으나 히가시오 오사무를 상대로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그리고 3일 후 긴테쓰 버펄로스전(닛폰 생명 구장)에서는 내야의 중심인 노다 유키토시(이후에는 매니저)가 모친상을 당하여 귀향하는 바람에 또 다시 가케후가 8번·3루수로 대신 출전하게 됐는데 이 경기에서 4타수 4안타를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쳤다. 시범 경기가 끝난 뒤 최종 성적은 18타수 8안타, 2개의 2루타를 때려내는 활약으로 개막 1군에 합류, 고졸 1년 째에 개막전 1군에 정착했다.

고교 시절에는 유격수였지만 당시 한신에는 후지타 다이라가 부동의 주전이었기 때문에 3루수를 맡았다. 가케후와 같은 해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한 사노 노리요시도 3루수였기 때문에 포지션 경쟁이 벌어졌다. 1975년에 감독으로 취임한 요시다 요시오는 당초 상대가 우완 투수일 때는 좌타자 가케후, 좌완 투수일 때는 우타자 사노를 기용하는 식으로 나갔으나 곧 가케후가 3루수 자리를 굳혔고[4] 사노는 외야수로 옮겨갔다. 가케후가 포지션을 둘러싸고 라이벌로 느낀 것은 이 때의 사노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80년 와세다 대학의 거물급 3루수였던 오카다 아키노부가 입단했을 때에도 언론이 “포지션 쟁탈전이 벌어지나?”라고 떠들썩했을 때도 가케후는 이미 중심 선수로서 여유가 넘쳤고 사노만큼 라이벌 의식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5]

1976년 오 사다하루를 웃도는 타율 5위에 랭크되며 같은 해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는데 가케후는 “타격 10위권에서 오 사다하루보다 위에 섰다는 게 큰 자신감을 느꼈다”라고 말했다.[6] 더 나아가 이듬해인 1977년에도 대활약을 펼쳤고, 응원가 ‘GO! GO! 가케후’도 대대적으로 팔리기도 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응원단은 가케후가 타석에 들어서면 응원가를 연주하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한신에서 소속된 선수 중에서는 가케후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응원가는 ‘GO! GO! 가케후’의 후렴구였는데 후에 변경되었다.

1979년 다부치 고이치가 이적한 뒤 팀의 주포로서 구단 신기록인 48홈런(그 때까지의 구단 최고 기록은 후지무라 후미오가 기록했던 46홈런이었는데 그 후 1985년에 랜디 바스가 54개로 기록을 경신했으나 일본인 선수로서는 현재까지도 구단 최고 기록)하며 홈런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 해 시즌 종료 후 결혼했다.

1980년 ~ 1985년

이듬해 1980년에는 왼쪽 무릎 부상으로 인해 70경기 출전에만 그쳤고 성적도 급격하게 떨어졌다. 그러자 시즌이 끝난 후 스포츠 신문에서는 “가케후를 난카이에 방출하고 여러 명의 투수들과 트레이드”라는 특종기사가 나오기도 했다.[7] 구단은 즉각 부인했으나 에나쓰 유타카와 다부치 고이치의 방출 소동이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던 무렵이라 근거없는 기삿거리라는 해명으로 무마될 내용이 아니었다. 가케후 본인도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런 얘기가 나돌지 않도록 식이 요법과 같은 건강 관리를 조절하는 등 이듬해 1981년부터 1985년까지 5년 연속 전 경기에 출전하는 대기록을 달성하게 되었다.

1982년과 1984년에도 홈런왕을 차지했고 특히 1982년에는 타점왕을 석권하는 등 ‘미스터 타이거스’라는 별명으로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당시에는 다부치를 제외한 가케후를 3대째의 미스터 타이거스라고 칭했으나 현재는 다부치까지 포함하여 가케후를 ‘4대째의 미스터 타이거스’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1980년대 전반기에는 부동의 4번 타자였는데 동갑내기이기도 한 에가와 스구루와의 맞대결은 두 사람 모두 전성기였던 1980년대 전반의 일본 프로 야구 최고의 명승부로 꼽힌다. 1984년 홈런왕을 차지했을 때는 주니치 드래곤스우노 마사루와 치열한 타이틀 경쟁을 펼쳤는데 마지막 맞대결 2연전에서 가케후와 우노 두 사람이 모든 타석에서 고의 사구를 당하며 결국 타이틀을 나눠가지게 되었다. 이들과의 승부를 피했던 고의 사구에 대해 센트럴 리그 회장이 두 팀의 감독(안도 모토오야마우치 가즈히로)에게 주의를 줬고, 최종적으로는 기자단에게 사과하는 식으로 끝났다.

1985년에는 3번 바스, 4번 가케후, 5번 오카다 아키노부로 이어지는 강력한 클린업 트리오를 형성하여 한신의 리그 우승 및 일본 시리즈 우승에도 기여하였다. 같은 해 4월 17일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맞대결에서 일명 ‘백 스크린 3연발’(가케후는 백 스크린 왼쪽에 들어갔기 때문에 상금을 놓칠 뻔하다가 스폰서의 재량으로 받았다)을 터뜨렸는데 이 경기에서는 바스에 이어 홈런을 때려내 그 해의 상징으로 회자되고 있다.

1986년 ~ 1988년

1986년 4월 20일의 주니치전에서 신인 선수인 사이토 마나부 투수가 던진 몸에 맞는 볼에 손목을 맞아 골절되어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이 663경기로 중단되었다. 훗날 가케후는 이 부상으로 그 때까지 팽팽하게 조여져 있던 긴장의 끈이 끊어지면서 부상을 변명으로 삼는 ‘나약한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왔다고 토로했다.[8] 5월 중순에 복귀했지만 11일 후 한신 고시엔 구장의 요미우리전에서 3루 수비를 하던 도중 바운드된 타구에 맞아 오른쪽 어깨를 다쳐 한 달 가까이 결장했다. 게다가 8월 26일에는 골절 때문에 세 번째로 팀 전력에서 이탈했다가 시즌 종료가 임박한 시점에서야 겨우 복귀했다. 이 시즌 후반 이후, 화려한 배팅은 그림자를 감췄다.

1987년에 시즌 개막을 앞둔 3월 22일에 음주운전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는데 가케후의 행동에 대해 언론에서의 비난이 쇄도했을 뿐만 아니라 한신의 구마 슌지로 구단주로부터도 그를 ‘결함상품’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이러한 쇼크를 안은 채로 맞이한 정규 시즌에서는 허리 통증 때문에 성적이 부진했고 팀의 컨디션과 보조를 맞추게 되었다. 약 한 달간 등록이 1군 등록이 말소되어 6월에는 프로 입단 이후 처음으로 2군으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이듬해 1988년에도 거듭된 신체의 이상으로 예전과 같은 타격력은 되살아나지 못했고 9월 14일에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 10월 10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의 홈 최종전이 ‘은퇴 경기’가 되었는데 수많은 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라운드를 떠났다. 통산 349홈런은 한신 구단 최다 기록이다. 은퇴 당시에는 아직 젊은 가케후를 안타깝게 여겼던 여러 구단으로부터 제의가 들어왔다고 밝혔다. 야쿠르트의 수석 코치로 있던 안도 모토오가 “환경을 바꾸면 더 뛸 수 있지 않겠느냐”며 가케후에게 이적 의사를 타진했으나 정작 가케후는 정중히 거절하기도 했다(안도와 가케후가 출연했던 2003년 라디오 방송에서의 발언). 우연히도 프로 입단 당시 가케후를 거부했던 야쿠르트의 제안을 이번엔 가케후 쪽이 거절하는 모양새가 됐다.[9] 이 외에도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고바 다케시 감독은 “등번호 31번을 준비해 두었다”라고 권했고, 나가시마 시게오는 “1년 동안 2군에서 차분히 몸을 단련해서 기분을 전환하는 게 어떻겠냐”라는 조언을 해주었다.[10] 그러나 다부치가 이전에 세이부 라이온스로 트레이드될 당시에 “다음은 너다. 너도 에나쓰나 나처럼 중간에 세로 줄무늬 유니폼을 벗는 짓은 하지 말아달라”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현역 생활을 계속한다면 한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결국 고사했다.[10]

은퇴 경기 이후 나카무라 가쓰히로 코치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한신의 역대 주력 선수가 이런 은퇴 경기를 가진 적이 없었다. 새로운 한신의 역사를 만들었구나. 경기장의 사람들 모두가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다. 네가 길을 닦아준 덕분에 앞으로는 한신 선수들이 은퇴하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10]

그 후

1989년부터 2008년까지 니혼 TV요미우리 TV의 해설위원, 2009년부터는 MBS 라디오의 해설위원(2009년에만 게스트 해설, 2010년부터는 전속), 2013년부터는 스카이 에이의 해설위원을 맡고 있어 이 기간 동안 감독이나 코치 경험은 단 한 번도 없다(미국 마이너 리그의 임시 코치를 맡은 적은 있다). 2004년 가을에 출범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부터 당초 감독 요청이 들어왔던 것처럼 보도됐으나[11] 결과적으로 다오 야스시가 감독으로 취임했다. 이 건에 대해 실제로 가케후는 라쿠텐의 미키타니 히로시 구단주에 의해서 흡사 장난감 취급을 당했다는 사실을 선배인 가토 히로카즈로부터 1년이 지난 10월에 전해졌다. 가케후 자신은 경영상 수익을 내라는 미키타니의 강력한 요구가 자신이 바라는 감독상과 어긋나서 결국 고사했다고 말했다.[12] 그 외에도 지바 롯데 마린스의 구단주 대행하고도 한 차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지만 야구관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13]

2013년 10월 21일 한신 구단에서 가케후가 신설 직책인 제너럴 매니저 지휘 육성 및 타격 코디네이터(DC)에 취임한다고 발표했다[14]. 가케후로서는 현역 은퇴 25년 만에 한신에 복귀하게 되었고, 동년 11월의 추계 캠프에서 타격과 내야 수비의 지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DC는 비상근 취급이며 등번호 및 벤치에 들어가지 않는 특별직이기 때문에[15] 2014년에도 야구 해설가·평론가로서의 활동도 계속할 예정이다.

플레이 스타일

타격

신인 시절에는 굳이 말하자면 중거리 타자였다. 그러나 팀의 주포였던 다부치 고이치가 1978년 시즌 종료 후에 이적하자 장거리 타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체격 면에서 결코 유리하지 못했던 가케후는 맹연습에 의한 신체 개조와 타법 개량에 힘썼고, 강인한 몸과 장거리 타자로서의 타법을 몸에 익혔는데 타구를 스탠드까지 날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타법은 몸에 주는 부담도 컸기에 선수 수명을 단축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가케후 자신은 “몸집이 크지 않은 내가 홈런을 30개, 40개까지 늘리려고 육체적으로 상당한 무리를 했다”라고 말했다.[16] 홈구장인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홈런을 양산하기 위해 해변 바람과 씨름을 벌이는 게 아니라 그 바람을 이용하는 방법을 거듭 연구했고 좌측 스탠드에 홈런을 때려내는 독특하고 예술적인 공을 가볍게 밀어치는 타법을 익혔다.[17] 이후 좌측으로 향하는 홈런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일본 야구계의 대표적인 홈런 타자가 되었다.

홈런은 ‘노리고 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수로 때린 홈런이 안타’라는 이미지를 지녔다.[16] 다만 부상에 의한 컨디션 난조에서 복귀한 1981년에는 ‘4번 타자로서 전 경기 출장’을 목표로 삼았기에 홈런을 의식하지 않는 타격을 관철했다. 그 결과 전 경기 출전을 달성함과 동시에 타율도 3할 4푼 1리라는 높은 숫자(현역 시절 최고 기록)를 남겼지만 1981년 시즌 종료 후에 가진 이벤트 때 팬들한테서 “홈런을 좀 더 보고 싶다”(그 해의 홈런은 23개)라는 말을 들은 게 계기가 되어 다시금 홈런을 의식한 타격으로 변경했다고 한다.[18] 가케후는 은퇴 후에 이 1981년이 “제일 자신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해 “지금도 내가 홈런 타자라는 생각은 안 한다. (1981년과 같은 배팅을 할 수 있다면)다른 배팅, 다른 가케후가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지금도 강하다”라고 말했다.[18]

센트럴 리그 심판부장을 역임한 다나카 도시유키는 저서 《프로 야구 심판이기에 알 수 있는 것》에서 공수의 기술이 양쪽 모두 뛰어나면서 심판에 대한 태도도 좋았던 선수로 가케후를 높이 평가했다. 특히 타격면에서 가케후의 타구는 방망이에 닿는 순간 극히 일순간이지만 공이 사라졌다고 증언했다. 이것은 가케후가 공을 바로 앞까지 끌어들여서 빠른 스윙을 실어 되치는 통에 공이 방망이에 달라붙어 있는 동안 시야에서 사라진 게 아닌가 하고 추측하면서, “투혼 드라마에 나올 법한 기술”이라고 평가했다.

투수의 버릇을 관찰해서 타종을 판단하는 것을 도중부터 그만뒀다. 그 이유는 다이요 시절 노무라 오사무와 상대했을 때 “버릇을 간파하고 있다”라고 생각해서 공을 쳤더니 그 공이 몸에 맞는 볼(머리 부분에 맞음)이 되어 버릇을 보고 판단하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19]

에가와 스구루는 저서 《에가와류 마운드의 심리학》(고사이도 출판, 2003년)에서 “가케후의 약점은 인코스로 높이 날아가는 공”이라고 지적했고 가케후 자신도 대담에서 ‘인코스에는 약하다’라고 인정했다.[20] 그러나 ‘4번 타자의 강함’을 상대팀 투수에게 과시하고자 인코스로 던져진 공의 컨트롤 미스를 우측 스탠드로 향하는 강력한 홈런으로 연결시키려 했다.[20] 은퇴의 발단이 됐던 1986년의 몸에 맞는 볼도 우측으로 길게 늘이는 홈런을 치기 위해 인코스쪽의 공을 기다리다가 발생했다고 한다.[8]

손목을 보호할 목적에서 손목밴드를 착용하고 플레이한 야구 선수는 가케후가 처음이었다. 한편 아버지의 가르침도 있고 해서 배팅 글러브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방망이를 쥐는 버릇은 은퇴할 때까지 계속 고수했다. 다만 수비 때는 글러브 아래에 장갑을 착용했기에 타석에 들어설 때는 그 장갑을 뒤쪽 호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 모습이 마치 원숭이 꼬리와 흡사해서 야쿠 미쓰루가 만화 소재로 삼은 적이 있다. 현역 후반부에는 로컷 타입의 스타킹을 즐겨 신었는데 이것이 ‘가케후 스타일’의 대명사가 되었다.

프로 15년 동안 공식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때려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끝내기 안타도 1개에 그쳤다. 올스타전에는 강해서 1978년에는 3타석 연속 홈런 기록을 남겼으며 또 1981년에도 제2차전부터 제3차전에 걸쳐 3타석 연속 홈런을 때려냈는데 그 중 두 번째 홈런이 공식전에는 기록되지 않은 끝내기 홈런이었다. 현역 마지막 시즌이던 1988년 4월 26일에는 프로 생활에서 유일한 런닝 홈런을 때려냈다.[21]

수비

수비에서는 현역 시절에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6차례나 수상했다. 프로 야구 기록의 조사 및 분석으로 이름이 알려진 우사미 데쓰야는 이에 대해 “그 외에는 딱히 우수한 선수가 없었고, 천부적으로 타고난 감각이 뛰어났다”라고 적었다.[22] 요시다 요시오는 초임 감독 시절 가케후의 수비를 “약간 어정쩡하긴해도 어깨는 강했다”라고 말하면서 조지 올트먼이나 헐 브리든 등 체격이 좋고 포구 기술이 뛰어난 1루수들을 만난 덕에 가케후의 성장이 촉구됐다고 평가했다.[23]

호적수·에가와 스구루

고등학교 시절 연습 경기에서 사쿠신가쿠인 고등학교와 맞대결할 기회가 있었는데 에가와 스구루가 등판하기 전에 가케후는 몸에 맞는 볼로 교체되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맞붙지는 못했다. 만약 이 때 타석에 섰더라면 몸에 맞는 볼의 트라우마가 되어 프로 입단 후에도 공을 못 쳤을지 모른다고 가케후는 말했다.[24] 프로 입단 후 어느 시기까지 에가와는 가케후를 상대로 초구는 반드시 커브를 던졌다. 그러나 가케후는 커브를 그냥 보내고 직구를 기다렸다가 승부했다고 한다.[25] 딱 한 차례에 에가와가 가케후를 고의 사구로 걸러보내며 승부를 피했는데(1982년 9월 4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의 경기) 그 공이 비정상적으로 빨랐다고 한다.[26] 가케후와 에가와의 통산 상대 전적은 167타수 48안타로 타율 2할 8푼 7리, 14홈런, 21삼진 33타점이었는데 이 중 홈런 갯수는 야마모토 고지와 맞먹는 기록으로 에가와한테서 가장 많은 홈런을 빼앗은 타자였다.

가케후는 에가와에 대해 “직구에 대한 강한 집착을 지닌 공을 느끼게 해준 유일한 투수”라고 평가했다.[27] 또한 이들은 상대방과의 대결이 본인의 컨디션을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되었다는 사실을 서로 인정했다.[28]

에피소드

개인

  • 술버릇이 나빠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음주운전 혐의로 체포된 이력도 있지만 도박과 담배는 전혀 하지 않는 편이다.
  • 현역 시절부터 야구계 굴지의 자동차를 아주 좋아하는 일명 ‘애차가’로 알려져 있다. 실제 자동차뿐만 아니라 모형차와 라디콘카도 좋아했고 자신의 커스텀카에 번호표지를 31개나 달았을 정도였다. 1987년 음주운전 사건 당시에는 사고 직전에 회식을 했던 호텔 종업원이 차를 두고 가는 게 좋겠다고 권했으나 “차가 외로운 듯이 보여서”라고 운전석에 올랐다고 훗날 이렇게 말했다. 현역 시절에는 차 내부를 ‘혼자가 될 수 있는 공간’으로 중요시했고 독신 시절에는 차고에 차를 넣고 잠시 앉았다가 합숙소의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 오사카 부 도요나카 시의 자택 근처에 위치한 통칭 로맨틱 가도변에 ‘가케후 기획’명의로 ‘핫 코너’라는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 가게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역시 가케후가 경영하는 스포츠 캐주얼 용품점인 ‘스포츠 하우스 필드 31’도 있었다. 그 외에도 게이한 덴마바시 역 근처에 ‘31 핫 코너’라는 토종닭 가게를 운영했던 적이 있고 프로덕션 회사 ‘가케후’도 경영했다. 그러나 이들 점포가 경영난에 의해 2009년 이후 채무 처리와 관련된 언론 보도가 여러 차례 나왔다(자세한 내용은 채무 문제를 참조).
  • 야구 해설할 때에는 퍼스트(1루수)를 ‘화스트’라고 발음했다. 해설 도중 선수 이름을 말할 때면 어미에 반드시 ‘~군’을 붙였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외국인 선수한테는 붙이지 않았다. 또 ‘대단히 이렇게’(ひじょうにこう), ‘역시나 이~’(やはりこの), ‘그래서 그~’(ですからその)하는 식의 표현을 많이 썼고 말끝은 ‘네에’, ‘그렇죠’라고 마무리할 때가 많다. 성대모사를 많이하는 마쓰무라 구니히로는 “가케후는 ‘대단히’라는 말을 한 경기 중계에서 최소한 27번은 한다”라고 말했다(이것은 완전 중계되지 않는 TV 중계의 경우이며 원칙적으로 경기 개시부터 종료까지 방송되는 라디오 중계에서는 27번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2007년 9월 23일에 방송된 《착신 감사! 휴대폰 오기리》의 마지막 코너에 출연했을 때 “헐, 연장전인가요….” 등 투고된 말들을 전한 직후에 ‘본심이네요’또는 ‘이건 아닌데’ 등과 같은 말을 임의로 덧붙여 방송한 적 있다.
  • 사인 색지에 늘 쓰는 어구는 ‘언제나 동경’이다.

인간 관계

프로 2년째인 1975년 6월에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1점 뒤진 6회초 2사 만루 상황에서 3루 땅볼을 놓친 것을 시작으로 대량 실점을 내주어 경기에서 패했다. 경기 종료 후 락커룸에도 못 들어가고 문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선발 투수였던 에나쓰 유타카가 지나가다가 “뭐하는 거냐, 이 바보야. 마음에 두지 마라”라고 말해줬다고 한다.

나가시마 시게오를 경애했다고 하였는데 프로 데뷔한 시즌이던 1974년 5월 21일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프로 데뷔 후 첫 안타를 기록했을 때 가케후는 3루를 노렸지만 나가시마한테 터치아웃 당했다. 하지만 ‘동경하던 나가시마’에 터치당한 것이 매우 기뻤다고 한다. 나가시마는 가케후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너한테 요미우리전에서 홈런을 수도 없이 얻어 맞아서 분하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너는 지바의 후배다. 분하긴 해도 진심으로 누구보다 큰 박수를 너의 홈런에 보낸다”라고 발언해 가케후도 “‘나가시마 교진’을 쓰러뜨리는 것이 나가시마가 가장 기뻐할 일”라고 생각했다고 한다.[29]

신인 시절 요미우리전에서 안타로 출루했을 때 오 사다하루가 “언제 그런 배팅을 배웠어?”라고 말을 걸어 왔는데 이것을 계기로 “아아, 날 보고 있었구나”라는 자신감이 붙었다고 한다. 오 사다하루와는 별로 말을 주고받지 않았고 오 사다하루가 말을 건넸던 것도 그 때뿐이었다. 그 반면에 나가시마 시게오는 3루에서 “너 몇 살이야?” 등 여러 가지를 묻곤 했다고 한다.[30]

나가시마가 평론가로 전향한 이후 극도의 슬럼프에 빠져 있던 가케후는 나가시마에게 전화로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 그러자 나가시마는 “거기에 방망이 있나? 있으면 휘둘러 봐”라고 말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가케후는 방망이 휘두르는 소리를 수화기 너머로 나가시마에게 들려 줬다. 그 소리를 들은 나가시마는 “잡념을 떨쳐버리고 무심의 경지에서 휘둘러라!”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마음을 비우고 방망이를 수 차례 휘둘러 그 소리를 들려줬는데 그러자 “그래, 지금의 바로 그 스윙이야. 잊지 말아라!”라고 말하여 전화를 끊었다. 그 후 가케후는 슬럼프에서 벗어났다고 한다.[31]

라이벌인 에가와 스구루와는 현역 시절 올스타전 때 대화를 나눌 정도의 사이였다.[32] 그러나 은퇴 후에 같이 해설자로 일하게 되면서 사이가 깊어져 지금은 절친한 사이이다. TV에서 같이 출연할 때에는 에가와에게 “가끔 한신의 OB회에 와라”라고 에가와의 프로 입단 때의 소동을 이야깃거리로 삼고 있다.

현역 시절 같은 주력 선수였던 오카다 아키노부와의 사이에 불화설이나 각각의 ‘파벌’이 있다는 식의 기사를 당시 스포츠 신문 등에서 볼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오카다는 2008년 저서에서 입단 후에 식사를 함께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지만 불화설은 부인하고 있어 그러한 언론의 기사를 ‘같이 다니지 않는다고 = 사이가 않좋다고 취급을 하는 것은 곤란하다’라고 비판적으로 서술했다.[33] 오카다는 가케후의 은퇴 경기 때 ‘뒤를 맡긴다’라고 말한 것이 “처음으로 각자의 본심을 말한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33]

아베 신노스케의 아버지는 가케후의 나라시노 고등학교 시절의 동창생으로 같은 야구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고교 시절에는 아베의 아버지가 4번 타자였기에 가케후는 3번 타자였다. 지금도 아베의 아버지와는 절친한 사이이며 아베가 어릴 적부터 가케후를 동경한 것은 이 인연에서 유래되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쓰무라 구니히로가 가케후를 자주 흉내내고 있다. 초기에는 ‘한신보다 하반신이 좋네요’라거나 ‘낮에는 해설, 밤에는 외설적’ 등과 같은 말장난에 저질 발언을 섞은 흉내를 내서 본인은 조금 난처해했지만, 이것을 계기로 친분을 맺었다. 마쓰무라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집에 일반인이 태연하게 찾아오거나 장난전화가 걸려오는 등의 괴롭힘이 끊이지 않았을 때 가케후의 전화를 받고 처음에는 장난으로 생각했지만 진짜 가케후인 것을 알고 감동했다고 한다.

가족

현재 부인은 요네다 데쓰야에게 소개받았다. 장남은 오사카가쿠인 대학 고등학교에서 오사카 가쿠인 대학을 거쳐 사회인 야구팀인 미쓰비시 중공업 고베에서 2008년까지 뛰었는데 그가 착용했던 등번호도 31번이었다. 오사카 가쿠인 대학시절에도 주장을 맡았던 4학년 때를 제외하면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는 등번호 31번을 착욯했다(4학년 때에는 주장의 관례로 1번을 착용했다).

채무 문제

2009년에는 자신이 경영하던 가게의 경영난으로 인해 거액의 부채를 지게 됐으며 자택도 2008년 11월에 압류당한 사실이 주간지를 통해서 밝혀졌다.[34] 이런 사정과 관계가 있는지 여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2008년에 오랫동안 담당했던 니혼 TV요미우리 TV의 야구 해설자 계약을 해지당했다. 이 채무로 인해 가케후는 채무보증을 섰던 컨설턴트 회사에서 오사카 지방재판소소송을 당했다. 가케후는 “컨설턴트 회사가 실질적으로 경영하고 있었다”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사카 지방재판소는 2009년 9월 11일에 가케후 측의 패소 판결을 내렸다. 2010년 3월 31일, 오사카 지방재판소는 오사카 부 도요나카 시에 소재한 가케후의 자택을 경매에 붙인다는 결정을 내렸고 가재도구 13점도 동시에 경매에 붙여졌다. 경매 신청자는 효고 현 아마가사키 시의 금융기관이었다. 부동산 등기부에 따르면 대상은 연면적 약 600㎡의 지상 4층, 지하 1층의 철근 건물과 토지 약 320㎡로, 도요나카 시가 그 해 2월에 차압한 것이었다. 경매 결과 자택은 2011년 6월에 제3자에게 매각되었다.[35]

2011년 7월 27일, 실질적으로 경영하던 가케후 기획이 두 번째 어음 부도를 내면서 은행거래 정지처분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사실상 도산) 채무총액은 약 4억 엔에 달한다고 한다. 가케후는 그 직전의 올스타전부터 시즌 종료까지 해설자로 전속 계약되어 있던 MBS 라디오의 《MBS 타이거스 라이브》에의 출연을 자숙했고 2012년 시즌 개막 이후에 한 차례 복귀했으나 5월 이후로는 다시 출연하지 않기로 했다.

2013년부터는 스카이 에이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선 TV 박스석》(선 TV의 한신전 중계)이나 《세키구치 히로시의 선데이 모닝》(TBS TV)에도 게스트로 출연하는 등 야구 해설가로서의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상세 정보

출신 학교

  • 나라시노 시립 나라시노 고등학교

선수 경력

기타 경력

수상·타이틀 경력

타이틀

수상

  • 베스트 나인 : 7회(1976년 ~ 1979년, 1981년, 1982년, 1985년)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 6회(1978년, 1979년, 1981년 ~ 1983년, 1985년)
  • 올스타전 MVP : 3회(1978년 제3차전, 1981년 제2차전, 1982년 제3차전)
  • 월간 MVP : 1회(1979년 4월)

개인 기록

첫 기록

기록 달성 경력

  • 통산 100홈런 : 1979년 4월 21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7회말에 엔도 가즈히코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역대 99번째
  • 통산 150홈런 : 1980년 6월 14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8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7회초에 야마네 가즈오로부터 2점 홈런 ※역대 54번째
  • 통산 200홈런 : 1982년 7월 18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5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5회말에 야마모토 가즈오로부터 2점 홈런 ※역대 37번째
  • 통산 1000안타 : 1982년 8월 24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9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7회말에 다치노 마사하루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 ※역대 125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 1983년 4월 16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4번·3루수로 선발 출장 ※역대 233번째
  • 통산 250홈런 : 1984년 4월 12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3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4회말에 가도타 후미아키로부터 좌중간 솔로 홈런 ※역대 21번째
  • 통산 300홈런 : 1985년 6월 23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2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7회초에 히로세 신타로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 ※역대 17번째
  • 통산 1500안타 : 1986년 8월 19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9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6회초에 엔도 가즈히코로부터 좌월 2루타 ※역대 51번째
  • 통산 1500경기 출장 : 1987년 7월 18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16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4번·3루수로 선발 출장 ※역대 85번째
  • 통산 1000타점 : 1988년 5월 24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5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2회초에 가지마 겐이치로부터 2점 적시 2루타 ※역대 19번째
  • 통산 3000루타 : 1988년 6월 18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3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7회말에 가케하타 미쓰노리로부터 중전 안타 ※역대 28번째

기타

  • 1이닝 2홈런 : 1982년 8월 24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9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7회말에 다치노 마사하루로부터 우월 솔로, 이하라 신이치로로부터 우월 3점 홈런 ※역대 9번째(10번째)
  • 4타수 연속 홈런(1978년 8월 31일 ~ 9월 1일) ※일본 타이 기록
  • 10타석 연속 볼넷(1984년 10월 3일 ~ 10월 5일) ※센트럴 리그 기록
  • 10타수 연속 안타(1981년 8월 5일 ~ 8월 7일)
  • 12타석 연속 출루(1981년 8월 5일 ~ 8월 7일)
  • 올스타전 출장 : 10회(1976년 ~ 1985년)

등번호

  • 31(1974년 ~ 1988년)

나가시마 시게오의 3번과 오 사다하루의 1번을 합쳐서 31번으로 정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가케후 본인은 구단에서 제시한 비어 있는 등번호 가운데 제일 빠른 번호여서 31번을 택했다고 한다. 쇼가쿠칸월간 코로코로 코믹》에 게재된 만화 〈가케후 선수 이야기〉(다가와 야스유키)에는 가케후가 아버지에게 가르침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남들보다 3배 연습해라. 그래야 비로소 최고가 될 수 있다’라는 교훈과 앞에서 말한 ‘나가시마와 오 사다하루의 등번호’일화를 겸한 감동적인 설명이 실려 있다. 가케후 전에 그 번호를 달았던 선수는 가케후의 입단 직전인 1973년 시즌 끝으로 퇴단한 외국인 선수 윌리 커클랜드였다. 또한 입단 당시의 선수 명감에는 우에다 지로의 유니폼을 빌려 등번호 ‘16’을 달고 찍은 사진도 있다. 본인은 징크스를 믿는 타입이라 경기 전에 자신의 등번호 31에 빗댄 배스킨라빈스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고 한다.

축구 선수인 오구로 마사시가 2005년에 처음으로 일본 축구 국가대표로 발탁된 때의 등번호가 31이었는데 “가케후 선수와는 같다. 운이 좋겠다”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참고로 소속팀인 감바 오사카에서의 등번호는 오카다 아키노부가 착용했던 16번이었다.

1976년 시즌 종료 후 가케후는 구단 수뇌부로부터 “등번호를 ‘3’으로 바꾸지 않겠나”라는 제안을 받았는데 동경하던 나가시마와 같은 등번호였기에 가케후는 고민했지만 “입단할 때 받았던 등번호 31을 제 얼굴로 키워나가고 싶다”라는 이유로 고사했다.

2010년 5월 5일에 오사카 부립 가미가타 연예 자료관(통칭 왓하 가미가타)에서 진행된 야마다 마사토의 토크쇼에 게스트로 출연한 가케후는 “31번을 영구 결번으로 하고 감독으로 복귀했으면 좋겠다”라는 야마다의 발언에 대해 “31번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가 등에 착용하고 살아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라고 대답했다.

연도별 타격 성적















2

3



















4












O
P
S
1974년 한신 83 194 162 13 33 8 0 3 50 16 1 1 0 2 28 0 2 38 3 .204 .325 .309 .633
1975년 106 344 317 34 78 15 3 11 132 29 0 0 3 0 22 3 2 68 8 .246 .299 .416 .716
1976년 122 469 406 69 132 20 7 27 247 83 5 7 2 3 54 4 4 52 7 .325 .407 .608 1.015
1977년 103 439 381 59 126 18 4 23 221 69 4 4 0 6 50 1 2 58 9 .331 .405 .580 .986
1978년 129 532 465 73 148 17 2 32 265 102 7 5 0 2 63 7 2 86 5 .318 .400 .570 .970
1979년 122 530 468 107 153 20 3 48 323 95 10 4 0 4 58 0 0 61 13 .327 .398 .690 1.088
1980년 70 288 258 27 59 7 0 11 99 37 2 1 0 2 26 1 2 47 9 .229 .302 .384 .686
1981년 130 549 458 84 156 25 1 23 252 86 1 1 0 4 85 18 2 54 8 .341 .443 .550 .993
1982년 130 549 464 79 151 27 0 35 283 95 6 6 0 4 79 16 2 69 11 .325 .423 .610 1.033
1983년 130 560 483 72 143 25 2 33 271 93 6 3 0 3 72 8 2 81 5 .296 .388 .561 .949
1984년 130 549 442 79 119 14 1 37 246 95 3 2 0 3 102 8 2 83 11 .269 .406 .557 .963
1985년 130 579 476 102 143 16 4 40 287 108 3 1 0 6 94 6 3 62 12 .300 .415 .603 1.017
1986년 67 285 254 33 64 11 1 9 104 34 0 2 0 3 25 0 3 40 7 .252 .323 .409 .732
1987년 106 424 387 33 88 14 3 12 144 45 0 1 0 3 33 2 1 61 9 .227 .288 .372 .660
1988년 67 283 252 28 63 13 0 5 91 32 1 0 0 3 28 0 0 37 7 .250 .322 .361 .683
통산 : 15년 1625 6574 5673 892 1656 250 31 349 3015 1019 49 38 5 48 819 74 29 897 124 .292 .381 .531 .913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저서

주석

  1. 또는 ‘(4대째)미스터 타이거스’라고 불린다.
  2. 《맹호가 포효했다 - 열구비원》 p.159 ~ 161
  3. 《호타 폭발! 우리가 가케후 마사유키 : 등번호 31은 타이거스의 보물이다!》 고단샤, 1982년, p.50 ~ 51
  4. 요시다에 의하면 당시 이치에다 슈헤이 코치가 카케후를 강력 추천했다고 한다(《우시와카마루의 이력서》 닛케이 비즈니스 인문고, 2009년, p.161).
  5. 분슌 비주얼 문고 - ‘호타열전 2’, 분게이슌주
  6. 분슌 Number 비디오 - ‘열투! 한신 vs 요미우리 1200 경기’, 분게이슌주
  7. 《요미우리-한신론》에 따르면, 가도타 히로미쓰와의 ‘미도스지 트레이드’(御堂筋トレード)였다고 한다(p.180). 가케후는 만약 이 트레이드가 성립됐다면 자신은 은퇴할 생각이었다고 밝혔다.
  8. 또한 1989년에 와세다 대학 오쿠마 강당에서 야자와 겐이치(전 주니치 선수)와 강연회를 했을 때에는 “사이토 선수의 제구력은 알고 있었다. ‘위험하다, 온다’라고 알고 있었으면서도 끝내 피하지 못했던 게 유감이었다”라고 말했는데 원망하는 듯한 발언은 없었다(《요미우리-한신론》 p.127).
  9. 《요미우리-한신론》에 의하면 세키네 준조 감독이 권유한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에 따르면 장래에는 한신에 돌아가도 좋다는 조건이 명시돼 있었다고 언급했다(p.133 ~ 134).
  10. 《요미우리-한신론》 p.133 ~ 134
  11. ‘라쿠텐, 가케후에게 감독 취임을 정식 요청’ - 아사히 신문, 2004년 10월 16일
  12. 《요미우리-한신론》 p.207 ~ 208
  13. 《요미우리-한신론》 p.210
  14. 掛布雅之氏のGM付育成&打撃コーディネーター就任について - 한신 타이거스 공식 사이트, 2013년 10월 21일 방송
  15. 前代未聞の超大役!阪神・掛布氏、コーチも“コーチ”する!! - 산케이 스포츠, 2013년 10월 22일
  16. 《요미우리-한신론》 p.87
  17. 《요미우리-한신론》 p.19
  18. ‘만약 다부치가 남아 있었더라면’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는 말도 했다(《요미우리-한신론》 p.88 ~ 89).
  19. 《요미우리-한신론》 p.58 ~ 59
  20. 단 에가와는 《요미우리-한신론》에서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면 못하는 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요미우리-한신론》 p.69 ~ 70).
  21. 우사미 데쓰야 저 《일본 프로 야구 기록 대감》(고단샤, p.423)
  22. 우사미 데쓰야 저 《프로 야구 기록 대감》(고단샤, 1993년), p.972
  23. 《우시와카마루의 이력서》 p.162
  24. 《요미우리-한신론》 p.44
  25. 그러면서 에가와가 어깨 통증에 시달렸던 1983년경부터는 이 ‘암묵의 이해’가 사라진 게 아닌가 하고 두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요미우리-한신론》 p.74 ~ 76).
  26. 에가와는 “아마 화가 났었던 모양이다”라고 말했다(《요미우리-한신론》 p.54 ~ 56).
  27. 《요미우리-한신론》 p.113
  28. 《요미우리-한신론》 p.129 ~ 131
  29. 《요미우리-한신론》 p.148 ~ 149
  30. 《요미우리-한신론》 p.141
  31. 《요미우리-한신론》에서도 가케후는 이 전화 에피소드가 사실이라고 말했다(p.149 ~ 150). 그러나 실제로 슬럼프에서 벗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32. 《요미우리-한신론》 p.96
  33. 식음을 같이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결국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마시러 간다’라는 이유로 설명하고 있다(오카다 아키노부 저 《완고력》, 가도카와 SSC 신서, 2008년, p.96 ~ 97).
  34. 슈칸 신초》 2009년 5월 7일·14일자
  35. ミスタータイガース掛布氏倒産、負債4億 - 닛칸 스포츠, 2011년 7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