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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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반란 직후, 5월 16일 오전 8~9시 경 중앙청 앞에서 박정희와 이낙선 소령, 박종규 소령

5·16 군사반란(五一六軍事反亂)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소장 박정희, 중령 김종필, 소령 이낙선 등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 8기, 9기 출신 일부 장교들이 장면 내각의 무능력과 사회의 혼란을 명분으로 제6군단 포병대, 해병대, 제1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해 청와대를 장악,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반란이다.

반란의 원인

박정희를 주축으로 한 군사혁명위원회제2공화국의 정치력 부재와 사회·경제적 혼란, 그리고 군 내부 인사들의 응축되어 있던 불만이 촉발된 성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미 1958년부터 미국의 요청으로 추진된 감군(減軍)으로 인한 군내부의 불만으로 촉발되어 6·25 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의 사회적 지위 신장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구가 있던 군부 내 세력 중 육사 8기생[출처 필요]을 중심으로 군사반란이 논의되었다.

반란의 배경

윤치영,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던 그는 장면 내각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국무총리 장면

제2공화국국무총리이던 장면은 재임기간 동안 10여 차례나 군사반란 정보를 보고 받거나 입수했다. 근거 없는 설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정보였다. 장면은 그때마다 "미군이 있는데 어떻게 반란을 하겠소"라는 말로 태연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후에 반란 정보를 입수한 장 총리는 반란 정보를 장도영 총장에게 수차례 문의하였으나 묵살되었다. 당시 미국 정보국과 장총리의 고문이였던 위태커는 정보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정보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 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이러한 행동을 했을거라 보았다. [1]1950년대에 이미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군사반란 시도를 했던 박정희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4·19 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군내 부패행위에 항거하다가 중령에서 예편된 김종필 등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규합하였다. 또한 장면 내각에 불평, 불만이 많던 윤치영, 임영신, 임병직 등의 인사들과도 사전에 여러 번 교섭하였고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한다.

팔리 보고서

1961년 3월 6일, 미국 국무부의 후진국 개발원조를 담당하는 미국 국제협력처(미국 국제개발청의 전신) 실무책임자 휴 팔리는 한국의 장면 정부가 매우 유약, 무능하며, 이로 인해 곧 공산 혁명 또는 군사 반란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따라서 미국 정부가 강력한 개입을 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갓 집권한 케네디 행정부가 한국 문제에 대해 매우 전향적이고 적극적인 개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팔리 보고서라고 평가받고 있다.

1961년 3월 21일, 미국 CIA 보고서는 한국 문제의 원인이 장면 정부의 유약함 때문이라며, 이로 인해 공산 활동이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1961년 4월 16일, 미국에서 불과 150 km 떨어진 쿠바에서 공산혁명이 발생했다. 이에 놀란 미국은 친미 약소국들에서의 연쇄 공산 혁명 발발을 걱정하여, 세계의 약소국들에서 반미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차단하는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였다.

1961년 5월 5일, 미국 백악관 대통령 직속 "한국문제에 대한 특별대책반"은 장면 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정권 교체를 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이후에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기 직전에도, 미국 정부는 박정희 정부의 반미 성향을 비판하고, 정권 교체를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전개

반란 초기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육사 3-5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부사관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문재준 대령 제6군단 포병단 지휘관과 박치옥 대령 등은 곧이어 박정희가 부의장으로 취임하고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이 의장으로 추대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해 전권을 장악하고, 정변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당시 상황에서 헌법상의 국정·국군 통솔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있었다. 그는 장도영의 전화를 받고 새벽 4시경 미국 대사관으로 향해 군사 세력을 진압하려 했지만 직원이 부재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고 카르멜 수도원으로 피신하여 수차례 미국에 사태 진압을 요청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장도영으로부터 군사반란이 발생했으니 피신하라는 연락을 접하였다. 그 직후 국제연합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美 대리대사 그린윤보선을 접견했다. 접견자리에서 두 사람은 윤보선에게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자고 주장하며, 국제연합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군부를 인정하지 않고 진압명령서를 들고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가 '사인만 하시면 반란군을 진압하겠다'고 하였으나 윤보선은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북한공산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며 끝까지 반대했다. 주한 美 대사 그린은 마지막 경고로 "각하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2] 그러나 5·16 군사반란 이후 그는 당시 반란주체세력들의 계엄령 사후 추인과 반란지지성명 발표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 그가 일면으로는 '싸움을 피하기 위해, 다른 일면으로는 장면 내각에 대한 적개심'[3] 때문에 진압 행동을 거부했다는 분석도 있다.[4][출처 필요] 한편 반란의 성공을 잘 알 수 없었던 박정희는 매우 초조해하며 흥분한 상태였다. 이즈음 장도영은 비밀통로를 이용해 제8군 미군사령부를 오가며 매그루더 장군과 이야기를 했다.[출처 필요]

5월 17일, 매그루더박정희 소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박정희 소장은 절대적으로 군을 물릴 수 없다는 의지를 보였다.[출처 필요] 5월 18일, 박정희는 유원식(兪原植)을 데리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그러나 윤보선 대통령은 군사반란군을 진압하기보다, '올 것이 왔다'며 군사반란에 체념하는 태도를 취하였다.[출처 필요] 5월 20일에는 군사혁명위원회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고 장도영을 헌법에는 없는 "내각수반"으로 임명하였다.

군사반란은 초기에 미8군 사령관 C. B. 매그루더, 야전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기도 하였으나 美 정부의 신속한 지지 의사 표명, 장면 내각의 책임 자각형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의 체념 등에 의하여 성공했다.

미국의 환영

5월 16일 아침에는 미8군 사령관 C. B. 매그루더와 미국 대리대사가 장면정부의 지지를 발표하였으나, 워싱턴에서 미국 합참의장, 미국 국무장관 대리가 경고 전문을 발송해, 발언을 금지시켰다.

5월 17일 한국군의 반란 진압작전 명령권인 평시작전권을 갖고 있는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은 박정희의 반란이 반미 반란, 친공 반란라는 증거가 없으므로 최전방 강원도의 한국 육군 1군에게 반란 진압지시를 내릴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5월 19일 박정희 소장은 첫 번째 기자회견을 열어, 친공분자 930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미국 국무부는 공산당 소탕을 환영한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반란성공 후 윤보선의 활동

대통령 윤보선
(혼란과 체념, 장면 내각에 대한 적개심 등으로 사실상 군사반란을 묵인했다는 평가가 있다.)

1961년 5월 19일 대통령 윤보선오후 8시 30분 방송을 통해 하야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다음날인 5월 20일에 성명발표를 번복하였다.[5]

금번 군사쿠테타이 발생하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인명의 희생이 없기를 바랐으며 순조롭게 수습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다행히 하늘은 우리를 도와서 무사하게 이 나라의 일을 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이 맡아서 보게 하였으며 국민 여러분이 또한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지금 안심하고 이 자리를 물러나겠습니다. 아무쪼록 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은 그 소신과 충성을 다하여 이 나라를 발전시키고 이 국민을 하루속히 궁핍에서 건져내 주기를 바라며 나의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이에 협조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바입니다.[5][6]

윤보선의 사퇴발표가 있자 군정 측은 그의 사퇴를 만류하였다. 5월 19일박정희장도영청와대를 찾아와 윤보선의 사퇴를 만류했다.[7] 그러나 그 만류는 시늉이었다. 장도영에겐 윤보선이 좀 더 필요했던 것 같으나, 박정희윤보선의 사퇴를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7] 이때 사퇴를 고사한 일로 후일 민주당 신파 계열에서는 그가 군사정권에 협력했거나 내통, 또는 매수했다며 공격하였다.

5월 20일 상오 외무부 차관 김용식이 윤보선에게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이 시점에서의 하야는 국제법상 새 정부의 승인문제를 복잡하게 할 우려가 있다.[7]"라고 설명했다. 김용식은 이 점을 박정희에게도 설명했다. 5월 20일 오후 2시 윤보선, 박정희, 장도영, 김용식 4자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용식은 다시 "만일 각하가 사임한 뒤 이북이 남침하면 외국과 유엔에 호소하려 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호소할 기관이 없다.[7]"며 사임재고를 요청했다. 재고 요청에 박정희장도영, 미국의 만류도 있었다.[7][8][9]

결국 윤보선은 당일 오후 6시 예정돼 있던 고별회견 대신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하야하겠다는 나의결정이 국제적․국내적으로 영향이 크다 하므로 나라 일을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만부득이 이 나라 형편을 생각하여 번의해야 할 것 같다.[7][8][9]"며 하야를 번복, 번의 회견을 하였다. 1961년 6월 6일 국가재건최고회의현충일 행사에 참석하였다.

결과

박정희

접견실에서 박정희, 장도영 등을 만난 대통령 윤보선은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혼자 하는 말이었지만 소리가 워낙 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들었다고 한다.[10] 요약을 하면, 장면 총리는 진작에 물러났어야 했으며 민주당은 무능했다는 얘기였다.[11]

국방부 장관 현석호를 비롯한 각 부서의 장관, 차관, 처장급 인사들이 줄줄이 가택에서 체포되거나 연행되는 형식으로 청와대에 끌려왔다. 이때 민주당 신파의 각료인 정일형, 현석호 등은 윤보선의 발언을 듣고 경악한다.

현석호는 회고록에서 윤보선은 이 말에 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다."면서 장면 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박정희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했다.[10]

군부에 의해 청와대로 온 현석호윤보선의 이 발언을 가리켜 '한마디 평생토록 잊지 못할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11]

파일:장도영, 박정희 1961년 5.16 군사반란.jpg
5월 20일, 중앙청 광장에 선 장도영박정희

5월 16일 혁명위원회 포고 제4호로써 민의원, 참의원 및 지방의원 등 대의원 헌법기관은 해산되었고 5월 2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12]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되어 정치활동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따라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장면 내각은 붕괴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한 약 3년간의 군정통치가 이루어졌다. 군정기간 중 정변세력은 특수범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의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대통령제 복귀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하였다.

5·16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의장 박정희는 조만간 원대복귀 하겠다던 애초의 혁명공약 제6조를 추후 번복하고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현직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공·미국과의 동맹강화·구악일소·경제재건 등을 공약으로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여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수반이 되면서 박정희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한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 군사반란 이후 정변 주도세력이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개편해 만든 통치기구이다.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한 최고통치기구였으며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5·16 군사반란 직후

5·16 군사반란 이후 구악일소(舊惡一消)라는 이유로 육군 공수특전단 대원들에 의해 조리돌림 되는 이정재 外 폭력조직

정변 초기에는 일부 인사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장준하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정변을 지지하였고 언론인 송건호제3공화국 초기까지 민족적이라고 평가하여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13] 또한 정변 한달 뒤, 일제강점기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61년 6월 14일 '코리언 리퍼블릭'지에 '5·16군사반란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투고의 첫머리에서 '5·16군사반란은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14]

박정희는 군사반란 직후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 투옥된 독립운동가 김학규를 사면·복권시켰다.[15] 이후 그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에 지장이 생기자,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崔書勉)에게 김학규를 입원시켜 드리고 돌봐 드리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15] 그는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항상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하였다.[15] 또한 군정 세력은 취약한 정통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제1공화국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포상이 없었던 점을 지적, 1962년 3월 1일8월 15일 독립운동가 2천여 명에 대한 포상을 단행했다.

평가

4.19 혁명 정신은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상기시키고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정통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명확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4.19 혁명을 민주 문화의 배양기로 보고 5.16 군사반란을 민주 문화와 상반되는 권력 유지를 위해 연속적으로 군부대를 동원하면서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사실상의 병영국가 체제로 만든 1인 장기독재의 길을 열은 사건으로 보는 비판이 있다.[16] 당시 군사정권은 4.19 혁명을 4.19 의거라 칭하고 5.16을 혁명이라 하였다.[출처 필요]

재일 저술가 겸 사회운동가 정경모는 장면 총리의 수녀원 피신을 두고 "도망한 지 5일째에 모습을 나타내어 학생들의 선혈로 얻어진 한국 사상 유일한 민주주의 정권을 너무도 간단히 박정희 앞에 내밀어 그것을 이양하는 서약서에 서명하였다"며 "피노체트에게 습격당해도 최후까지 저항하여 기관총을 쏘면서 죽어간 칠레살바도르 아옌데에 비해 그 말로가 너무도 교활해 한국인으로써 부끄럽다"[17]라며 총리 장면의 처신을 비판하기도 했다.

후문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이자 내각 수반, 국무총리였던 허정(許政)은 '국제연합군 측의 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성공했고, 장면 내각의 총사퇴와 함께 혁명정부가 정권을 정식으로 인수했다.[18]'고 주장했다.

정변 직후 허정은 정부에 전화하였지만 연결되지 못했다. 허정에 의하면 국제연합군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군사혁명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안도감도 있었으나 군사혁명은 성공해 가고 있었다. 매그루더 국제연합군 사령관의 원대 복귀 호소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18] 정변 직후 허정장면 총리윤보선 대통령에게 연락하였으나 모두 연락이 불통이었다.

그 무렵 매그루더 사령관과 주한 미국 대리대사가 허정을 찾아갔다. 그들의 말로는 군사혁명의 저지를 위해 국제연합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18]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하고 힐난까지 했다는 것이다.[18] 허정1963년 초의 야당 대통령 후보 단일화 경선에서 이 점을 문제삼아 윤보선을 공격하여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북한의 예측

북한은 5·16 군사반란 발생 이전부터 남한에서 군사반란이 발생할 것을 예측하고 상황을 예의 주시해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 주재 중공 대사관이 정변 당일 작성한 〈남조선 군사반란 정황〉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김일 부수상이 대사관 측과 만나 김일성의 위임에 의해 5월 16일 하오 중공 측에 정변에 관한 정세를 설명하면서 "정변을 지지하는 성명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보고서는 또 정변이 박정희와 진보적인 군인들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기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90%"라고 추정했다.

북한은 특히 정변 발생 직후, 정변 주도세력을 남로당계로 보고 당일 지지성명까지 준비했지만 이틀 뒤인 5월 18일 조선로동당 중앙상임위원회 회의에서는 "극심한 반동에 의한 정변이며, 정변 세력은 반동적인 친미 군인들"이라고 주장했다.[19][20]

이로 인해 북한은 당초 추진했던 경제개발계획인 〈인민경제 향상을 위한 1차 7개년 계획〉의 시작을 미루는 결정을 내린다. 당시 북한 당국이 중공 외교관에게 전한 회의 내용에는 "우리는 경계를 강화하고 국방 강화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 올해부터 1963년까지 인민경제계획의 발전을 늦추고 국방과 방어요새 강화에 집중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21]

관련 항목

주석

  1.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 172~188쪽. ISBN 978-89-7090-136-7. 
  2. 김진국 (2000). 《WWW.한국현대사.COM》. 민연. 129쪽. 
  3.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 214쪽. ISBN 978-89-7090-136-7. 
  4.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 215쪽. ISBN 978-89-7090-136-7. 
  5.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305페이지
  6. 김삼웅 《곡필로 본 해방 50년》 (한울, 1995) 112~113페이지
  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306페이지
  8. 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 (대왕사, 1993) 223페이지
  9. 김성진, 《한국정치 100년을 말한다:우리들이 꼭 알아야 할 한국 정치의 실상》 (두산동아, 1999) 211페이지
  10.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273페이지
  11. 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 1997) 212
  12. 국가재건최고회의포고제6호 1961. 5.22 시행
  13. 송건호 《송건호 전집:20 역사에서 배운다》(한길사, 1996) 295페이지
  14.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73801&sc=naver&kind=menu_code&keys=1
  15. 김희선 의원, 의성김씨 본관 찾다 실패 동아일보 2004-08-17일자
  16. 박정희 5.16 반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17. 정경모, 찢겨진 산하 (기획출판 거름, 1986) 192페이지
  18.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89페이지
  19. 신석호 (2009년 10월 16일). “북한, 5·16군사반란 예측…당일 지지성명 준비했었다”. 동아닷컴. 
  20. 박성호 (2009년 10월 16일). “북한, 5·16 반란 '지지성명' 준비했었다…중국 외교문서”. YTN. 
  21. 최재원 (2010년 3월 29일). '5·16 둘러싼 北의 잇단 오판'이 불량국가 불씨됐다”. 헤럴드.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