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지카타 도시조
히지카타 토시조 (土方 歳三, 1835년 5월 5일 ~ 1869년 5월 11일) 는 신센구미 부장이며, 휘는 요시토요, 아명은 도요타마이다. 일본 에도 막부 말기의 막신으로, 메이지 유신에 반발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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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타마․시에이칸(시위관)
무사시 타마군 이시다촌(현재 동 교토시 히노시 이시다)에서 태어남. (6인 형제의 막내로서 자랐다고 알려졌지만, 최근에 발견한 자료에 의해 실제로는 10인 형제의 막내였던 것이 판명 되었다.) 히지카타 가는 ‘대진’으로 불리는 큰 농사꾼 집안이었다. 출생 전에 부친을 여의었고, 6세에는 어머니를 잃어 둘째 형인 키로쿠 부부에게 키워졌다. 지금까지 11세의 때에 에도 우에노의 ‘마츠사카라 불리는 옷가게’ (현재 마츠사카야우에노점)에서 일하여 곧 바로 지배인으로 승진하여 히노에 돌아와 버렸다. 라고 전해지지만, 얼마 전 발표된 이시다촌 인명록을 통해 계산해 보면 11세 때에는 이시다촌에 살고 있었으며, 점원으로 일하러 가지 않은 것이 판명. (인명록에)결손도 있지만, 이 인명록으로부터 토시조가 점원으로 간 것은 계산해보면 14세~24세의 10년간이라고 생각되게 되었다. 17세 때에는 에도의 덴마의 옷가게에서 점원이 되어 거기서, 여성문제를 일으켜 (지배인) 히노에 돌아왔다. 라는 전설도 있지만, 앞서 기술한 인명록의 존재로부터, 현재에는 그 신빙성이 의문시되고 있다. 그 뒤에는 본가 비전의 ‘이시다 산약’을 행상하며 각 지역의 도장에 타류시합을 포함한 수행을 했다고 전해진다. 히노의 사이토 도장에 출장으로 온 천연이심류 4대 콘도 이사미 (후의 신센구미 국장)과는 여기서 만났다라고 추측이 되며, 안세이 6년 (1859)년 3월 29일, 천연이심류에 정식입문 하였다. 토시조의 누나 노부는 형님의 시형제인 히노 여관의 주인 사이토 히코고로에게 시집을 가, 토시조도 히코고로의 집에 자주 출입했다고 전해진다. 히코고로는 큰불이 나 죽을 뻔 한 적이 있어 그 것을 계기로 이노우에 겐자부로의 형 이노우에 마츠고로가 있던 천연이심류에 입문, 자신의 집 한 모퉁에 도장을 열었다. 그러한 기록으로부터 히코고로는 콘도와 의형제를 맺고 천연이심류를 지원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토시조도 이 도장에서 실력을 쌓았다고 전해 진다. 콘도 도장(시에이칸)의 동료와 함께, 토시조는 분큐 3년 2월 막부의 로우시구미(낭사대)의 응모하여 쿄토로 떠났다.
[편집] 신센구미 부장
분큐 3년(1863) 8월 18일의 8월18일의 정변의 후 미부로우시구미의 활약이 인정되어 신센구미가 발족. 부장의 위치에 있던 토시조는 막부에 정식으로 인정받는 낭사대가 되기 위하여 무사도에 맞는 법도를 정하고, 법도를 어길시 사도불각오에 의해 할복하도록 하였다. 그 후 그 정해진 법도에 의해 사도불각오라는 명목으로 니이미 니시키 할목, 세리자와 카모등을 암살. 콘도 이사미가 국장이 되었다. 토시조는 국장 콘도 이사미의 오른팔으로서 쿄토의 코토치안경호유지를 위해 일했다. 신센구미는 스케츠토메(돋는일), 감찰 등의 직무 별로 계통적인 조직이 만들어져 정점은 국장이지만 실제로 지휘명령은 부장인 토시조로부터 내려지도록 되어 있었다. 겐지원년(1864) 6월 5일 이케다야 사건의 때는 반 부대를 이끌고 쵸슈 토사번사가 빈번히 출입하는 니토라(시코쿠야) 방면을 탐색하여 돌아다녔지만, 그곳은 아무도 없었다. 곧 바로 이케다야의 응원을 급히 가서, 그대로 검을 뽑아 쳐들어가 이케다야의 주위를 포위하며 그 후로부터 달려온 아이즈번, 쿠와나번의 병사를 이케다야로 들어가게 하지 않고, 신센구미 한 부대의 공을 지켰다. 아직 지위가 약했던 신센구미를 생각해서였다. 토시조 다운 냉정한 행동이었다. 그로 인해 이케다야 사건의 상은 파격적으로 행하여졌으면 이름도 한번에 천하에 퍼졌다. 거기에 막부로부터 콘도는 요리키 상석(직위 중 하나)에 부대를 요리키(행정, 사법, 경찰의 지위)로 임하도록 하였다. 토시조는 콘도를 말많은 요리키 보다는 다이묘(영주)로, 다음의 기회를 기다리도록 진언, 콘도도 이것을 받아 드렸다. 신센구미 내부에는 언제나 신센구미의 규율울 대원들에게 엄수하도록해, 규율을 깬 대원에 대해서는 할복을 명하여, 대원으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로 인해 신센구미 대원 사망원인 제 1위는 할복이었다라고 한다. 그 후 부장인 산난 케이스케를 총장으로 하여, 부장은 토시조 한명이 되었다. 부대의 있을 곳이 없어진 산난 케이스케가 탈주해 할복하게 된 사건에는 산난과 히지카타의 대립이 있었다고 이야기 되지만, 실제로는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그 후에도 부대의 규율을 지키기 위해 카와이 키자부로, 타니 산쥬로, 타케다 칸류사이등을 할복 혹은 참살시켰다. 이토 카시타로가 신센구미에서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탈퇴하여 조직한 '어릉위사(고료에지)'에 자신의 스파이인 사이토 하지메를 보내는 등을 통해 이토의 콘도국장 암살 계획을 미연에 방지, 이토, 토도 헤이스케를 암살하여 어릉위사를 파멸시켰다.
[편집] 보신 전쟁
케이오우3년 (1867) 6월에 막신에 봉해진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14일 대정봉환(쇼군이 자신의 실세정부 권위를 천황에게 돌려 준 사건), 12월 9일에 천황정치 부활의 칙령이 내려져 막부는 사실상 붕괴. 케이오우 4년 1월 3일 토바․후시미 전쟁에서 시작된 보신 전쟁이 발발하여, 토시조는 스미도메 사건(콘도 이사미가 길에서 총을 맞은 사건)에서 부상당한 국장 콘도 이사미 대신에 신센구미를 이끌어 싸우지만, 신 정부군의 총격전 앞에 패배한다. 토시조는 토바․후시미 전쟁에서 패배 하기 전에 케이오우 원년 경부터 지금부터는 칼로 싸움이 되지 않는 시대라고 깨달아, 서양식의 군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토바․후시미 전쟁에서 진 막부군이 오사카에서 에도로 철퇴한 후 콘도와 토시조는 일시 이름을 바꾸어 카이로 향했다. 그러나 3월 6일 카츠누마 전투에서 패하여 후퇴, 토시조는 급히 원군요청에 나섰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류잔에서 재기를 모색하지만, 4월 3일 불의의 신 정부군 포위에 의해 국장 콘도 이사미가 신정부군에 출두 그때 토시조가 콘도의 할복을 멈추게 하여 출두를 권했다고 함. 토시조는 에도로 향하여 카츠 카이슈(막부의 신하)들에게 직접 상답하여 콘도의 구명을 탄원했지만 실현되지 못하고 케이오우 4년 (1868) 4월 25일 콘도는 이타바시 근처 현 JR이타바시역 앞에 묘소가 있다.)에서 처형(참수)당했다. 콘도 출두후 구명탄원에서부터 신센구미를 사이토 하지메에게 맡기고, 아이즈로 향하여, 시마다 카이등 수명의 대원만을 대리고 오오토리 케이스케들이 이끌고 있는 구막부탈주군과 합류. 4월 11일에 에도성이 전쟁없이 열린 후 에도를 탈주하여 토시조는 아키즈키 토노스케가 이끌고 있는 선봉군의 참모를 맡았다. 병사들을 이끌고 우츠노미야성의 싸움에서 승리 우츠노미야성을 함락한다. 그러나 미부의 싸움에서 패주, 신정부군과 다시 우츠노미야에서 싸우던 때 발을 부상, 본군이 있었던 아이즈에 호송되게 되었다. 아이즈에서 약 3개월간 요양생활을 보내고, 그 동안 콘도 이사미의 묘를 텐야스시사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완쾌하여 전선에 복귀한 후에는 아이즈의 방어전에 전력을 기울이지만, 8월 하하시게루토우게의 패전을 포함하여 아이즈전쟁이 격화. 토시조는 원군을 얻기 위해 쇼우나이로 향하지만 벌써 복종체제의 쇼우나이에는 들어 갈수조차 없었다. 다음으로 센다이로 가 에노모토 타키아키가 이끄는 구박부해군에 합류 에노모토와 함께 오우우에츠렛반동맹의 군의에 참가하여 동맹군총감에 추천되지만 곧 동맹이 붕괴하여 동맹번들이 계속 신정부군에 굴복한 후 싸울 땅이 있는 한 계속 싸울 것을 결의. 신센구미의 살아 남은 대원에 쿠와나번사들을 합하여 오오에마루에 승선 에노모토 타키아키와 함께 10월 12일 센다이오리노하마를 떠나 에조의 땅으로 간다.(홋가이도)
[편집] 하코타테 전쟁
10월 20일, 에조치 와시노키에 상륙후 토시조는 문도군 총독이 되어서 고료우카쿠(북해도의 펜타곤 모양의 장소)으로 향했다. 신센구미는 오오토리 케이스케 총독 밑에서 일을 진행했지만, 토시조는 시마다 카이들 수명의 신센구미 대원이 언제나 따랐다고 전해진다. 하코타테.고료카쿠를 점령하고 토시조는 몇몇 눈에 보이는 병사들을 이끌고 마츠마에로 출진하여 마츠마에성(후쿠야마성)을 함락하고 잔병을 에사치죠까지 추격했다. 이때 에노모토 타케아키는 토시조군을 바다에서 원호하기 위해 카이요우마루(막부군의 전함)으로 에사치로 향했으나, 폭풍우에 많은 좌초. 에사치에 상륙해서 카이요우마루가 침몰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에나모토와 토시조는 옆에 있던 소나무를 치며 울었다고도 전해져 지금도 그 소나무가 남아있다. 에사치를 무사점령한 토시조는 한번 마츠마에성에 돌아와 12월 15일 에나모토가 각국영사를 초대하여 연 에조치지평정축하연에 맞추어 고료카쿠로 개선했다. 그 후 간부를 정하는 선거가 행하여져, 에나모토 타케아키를 총재로 하는 에조공화국(고료카쿠가 본진)이 성립,토시조는 간부로서 육군부사령관이 되어 하코타테시의 치안담당이나 육해군 재판장도 겸했다. 하코타테의 땅에서도 토시조는 냉정했다고 전해진다. 하코타테 정부가 수립되고 에나모토등이 축배를 들 때에도 토시조는 홀로 침묵을 지키며,“지금은 가볍게 들뜰 때가 아니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1월부터 2월을 걸쳐 하코타테 고료카쿠를 정비하여 3월에 신정부군 내습의 정보가 들어와 토시조는 신정부군의 철갑선을 탈취하여 목적으로 했던 미야코만해전에 참가, 작전은 실패하여 사상자가 나타지만, 토시조는 생환한다. 메이지 2년 (1869) 4월 9일, 신정부군이 에조치 을부에 상륙을 개시 토시조는, 후타마타구치의 전쟁에서 신정부군의 진격에 대하여 철저하게 방어전을 펼침. 그 전투중에 신정부군은 방울의 소리를 내며, 포위당했다고 생각되게 하는 행을 하여, 자군이 포위당했다고 생각한 토시조군은 동요했다. 그것에 대해 “정말로 포위하려 한다면, 소리를 숨겨서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라고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여 부하들을 진정시켰다. 또 싸우는 동안 토시조는 부하들에게 직접 술을 돌렸다. 그러고는 “취해서 군율을 어지럽히는 것은 곤란함으로 전부 한잔 뿐이다.”라고 말하였기에 부하들은 웃으며 따랐다고 전해진다. 토시조군이 사수하였던 후타마타구치는 연전연승. 그러나 또 다른 편에 마츠마 에구치가 돌파당해서 퇴로가 끊겨서 위험이 닥쳤기에 어쩔수 없이 후타마구치에서 퇴거 고료카쿠로 귀환했다. 그리고 메이지 2년 (1869) 5월 11(음력), 신정부군의 하코타테총공격이 시작되어, 신센구미대원 시마다카이가 수비를 하고 있던 벤텐다이바가 신정부군에게 포위당하여 고립되어서 토시조는 농성전을 싫어하여 적은 병력을 이끌고 출진. 신정부군함 아사히가 군함에 의해서 격침당하는 것을 보고 “이 기회를 놓치지마라!”라고 대갈, 하코타테잇폰기관문에 육군사령보좌역 오노우중에게 명하여 패주해 오는 동료들을 이끌어 진군시켜 “우리들의 법도에 따라 도망가는 자는 벤다!”라고 외쳤다. 토시조는 잇폰기관문을 수비하여 일곱 겹으로 조여오는 신정부군에게 응전, 마상에서 지휘를 했다. 그 난전 중에 총탄이 복부를 관통하여 낙마, 측근이 급히 다가 왔을 때는 벌써 절명했다고 전해진다. 적의 총탄이 아닌 쏟아지는 탄에 맞았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항복을 완강하게 반대하는 토시조를 제거하기 위해 아군의 손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토시조의 생명에 의해 타이바방면에 진군해있던 오노가 이끄는 병사들은 일시세력을 돌렸지만, 돌연 날뛰어서 오노의 필사의 지휘에도 불구하고 모두 무너져버렸다. 오노가 야무를 받아들렸던 때 똑같은 육군사령부보좌역의 안토우사스케로부터 토시조의 전사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토시조의 유체는 다른 전사자들과 함께 고료카쿠에 이장되었다고도 하고, 다른 장소에 안치했다고도 전해진다. 그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항년 35세.
애도는, 이즈미노카미카사네다 와카자시는 호리카와쿠니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