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 (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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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에 간행된 《만소당죽장화전》(晩笑堂竹荘畫傳)에 실린 혜원의 초상.

혜원(慧遠, 334년 ~ 416년)은, 중국 동진(東晋)의 여산(廬山)에 주석했던 고승이다. 수대(隋代) 정경사(浄影寺)의 승려였던 혜원과 구별하여 여산혜원(廬山慧遠)으로도 불린다. 중국 불교계의 중심적 인물의 한 사람이다.

생애[편집]

속성(俗姓)은 가(賈)씨로 안문군(雁門郡) 누번현(樓煩縣)[1] 출신이다.

21세로 승려 도안(道安)의 밑에서 출가하였으며, 도안을 따라 각지를 돌아다니다 양양(襄陽)에 머무르던 때 마침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이 침공으로 스승 도안이 장안(長安)으로 연행되고 혜원도 스승과 헤어져 남쪽으로 내려왔고, 후베이 성(湖北省)의 형주(荊州) 상명사(上明寺)로 옮겼다.

그뒤 장시 성(江西省)의 심양(潯陽)에 이르러 여산으로 들어가 서림사(西林寺), 즉 훗날의 동림사(東林寺)에 주석하게 되는데, 이로부터 30년 동안 혜원은 한 번도 산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해당 사실을 토대로 창작된 「호계삼소(虎渓三笑)」의 고사로 알려져 있다.

혜원이 주석했던 여산동림사.

융안(隆安) 5년(401년)에 인도의 승려 구마라습(鳩摩羅什)이 관중(関中) 땅에 들어와 국사(國師)로서 후진(後秦)의 수도 장안에 들어오게 되고, 혜원은 구마라습과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새로 출간된 경전에 대한 의문점 등을 이야기하였다. 그 서간을 모은 것이 《대승대의장(大乗大義章)》이다.

원흥(元興) 원년(402년), 혜원은 동지 123인과 함께 여산 산중의 반야대(般若臺)에 있던 아미타불상 앞에서 염불 실천의 서원(誓願)을 세우고, 백련사(白蓮社, 백련결사)의 조(祖)로서 모셔지게 된다. 다만 혜원의 염불행(行)은 후세의 《정토삼부경》(浄土三部経)에 기초한 전수염불(専修念仏)이 아니라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 기초를 둔 선관(禪觀) 과 같은 선종 수행법과 같은 것이었다.

또한 당시 여산을 포함한 장강(長江) 중류 유역의 패자(覇者)로 군림하던 환현(桓玄)에 대해서도 "불법(佛法)은 왕법(王法)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고 정면으로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이다. 승려로서 계율을 굳건히 지킬 것을 강조한 혜원은 계율(戒律)의 정비에도 힘써서 《십통률》(十誦律)의 번역 및 보급에도 힘썼다.

저서[편집]

  • 법성론(法性論)
  • 석삼보론(釋三報論)
  • 대지도론초(大智度論抄)
  •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
  • 대승대의장(大乗大義章)

전기자료[편집]

  • 《출삼장기집》(出三蔵記集) 권15 「혜원법사전(慧遠法師傳)제3」
  • 고승전》(高僧傳) 권6 「진노산석혜원전(晋廬山釋慧遠傳)」

주석[편집]

  1. 지금의 중국 산시 성(山西省) 닝우 현(寧武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