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판 메이헤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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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판 메이헤런 (1945)
판 메이헤런이 1932년부터 1938년까지 머물렀던 집.

한 판 메이헤런 혹은 반 메헤렌(네덜란드어: Han van Meegeren, 1889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30일)은 네덜란드화가이다. 본명은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Henricus Antonius van Meegeren)이다. 20세기에, 명화를 가장 독창성을 띤, 성공했다고 할 만하게 위작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의 일생은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위작해서 전 세계에 걸쳐 유명하다.

조작[편집]

세계대전 끝무렵에 연합군은 오스트리아암염갱 (岩鹽坑)국가사회주의독일로동자당 고위 관계자가 점령지에서 약탈한 예술 작품을 숨겨놓은 것을 발견했다. 이 중에는 헤르만 괴링의 수집품이 있었는데 예술 전문가들도 처음 보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그림이 있었다. 조사 결과 이것은 암스테르담에서 나이트클럽을 경영하는 네덜란드 사람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에게서 나온 작품이었다.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은 1945년 5월 국가사회주의독일로동자당에 부역한 혐의로 체포됐다. 이것은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네덜란드의 국보급 미술품을 국가사회주의독일로동자당에 매도한 혐의로 반역죄로서 기소되면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며칠 동안의 강도 높은 심문이 있은 후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는 믿기 어려운 사실을 실토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그림은 사실 자신이 가짜로 만든 그림이라는 것이었다.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이 위작한 동기도 흥미로운데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는 돈 때문에 위작하지 않았고 적어도 처음에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네덜란드 데번터르에서 태어난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은 처음에는 델프트 공과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으나 곧 미술을 배웠고 네덜란드의 고전 화가들에게 강한 흥미를 느꼈다. 아버지는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가 화가가 되는 것을 심하게 반대하였으나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지만,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가 고전 화가들의 방식으로 그린 여러 회화는 회화의 가치를 평가해 논하는 일을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 좋게 평가받지 못했다.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런은 예술의 가치를 평가해 논하는 일을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들을 마침내 몹시 경멸하게 되었으며 그 사람들을 골탕먹이고자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위작하기로 결심했다. 회화의 가치를 평가해 논하는 일을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들이 위작인지도 모르고 아름다운 회화라고 찬사를 늘어놓으면, 나중에 그것이 위작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해서 회화의 가치를 평가해 논하는 일을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들이 사실은 예술을 보는 안목이 부족하다는 진실을 만천하에 공개하여 망신을 주려는 생각이었다. 특히,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가 삼은 목표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만을 연구해 상당한 지식과 경험이 있던 박사 아브라함 브레디위스였는데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은 그 사람을 특별히 싫어했다.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은 자신의 계획을 치밀히 진행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양식과 기술을 모조할 뿐만 아니라 오래된 회화처럼 보이게끔 해야 했다.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은 17세기에 만들어진 캔버스를 구해 고전 화가들이 하는 방식 그대로 스케치하고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사용했다는 붓을 사용해 색을 칠했다. 페놀포름알데히드를 이용해 300년이 경과한 듯이 보이게끔 회화의 색을 희미하게 만든 다음에는 불에 구워서 바싹 말리고 북을 그 위에다 대고 굴려서 그림에 균열이 약간 생기게 한 다음에 갈라진 틈에다가는 검은 잉크를 채워 넣었다.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이 이런 방식을 완벽히 통달하는 데는 4년이 걸렸고 자신이 만든 〈엠마우스에서의 만찬〉이 꽤 잘된 위작이며, 그 자체로도 예술 면에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은 이 회화를 브아브라함 레디위스에게 보였고 그 사람은 이 작품이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품이라고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가 예상한 대로 감정했다. 네덜란드 예술 협회도 마찬가지로 속아 넘어갔고 오늘날 수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하고 그 회화를 사들였다.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은 원래, 예술의 가치를 평가해 논하는 일을 전문으로 해 돈을 보는 사람들을 골탕먹이려는 의도였지만, 짭잘하게 수익하자 돈벌이로 위작하게 됐다.

1938년에서 1945년까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 여섯 개를 위작했고 프란스 할스피터르 더 호흐의 작품도 위작했다. 특히 당시는 세계대전과 그 후 국가사회주의독일로동자당 집권하 독일 군대가 점령한 탓에 사회가 어수선해서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의 많은 위작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국가사회주의독일로동자당 집권하 독일 군대 점령기에도 미술품은 거래됐다. 1942년에 그린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의 위작은 160만 휠던에 팔렸는데 이것은 회화 거래 사상 최고가였다.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이 그린,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위작은 〈간음한 여인과 기독〉였는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헤르만 괴링의 손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이 〈간음한 여인과 기독〉이 후일 연합군에 의해 발견되고 이 회화 때문에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이 체포된 일변, 헤르만 괴링이 지불한 금액은 모두 위조지폐였다고 한다.

조작 증명과 재판[편집]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이 자신의 회화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직품이 아니라 자신의 위작이라고 고백하자 아무도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의 고백을 믿지 않았다. 결국 경찰 측은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이 직접 위작해야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의 고백을 믿을 수 있다는 주장에 선뜻 응한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은 3개월간 가택 연금당한 기간 경찰 측의 감시하에 최후의 위작 〈신전에서 설교하는 젊은 예수〉을 그렸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언론 매체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은 네덜란드의 수상에 이어서 두 번째로 유명한 네덜란드 사람이었다.

재판은 1947년 8월 29일에 열렸다. 당시 58세였고 건강이 매우 안 좋았던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는 사람들이 자신에 관심하자 매우 즐거워했고 자신이 위조범으로 유죄 판결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예술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것을 우려하여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가 위작한 회화를 심사하고 싶어하지 않았으나 위작 여부를 조사하려는 위원회가 꾸려졌다. 조사 결과,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살던 17세기에는 쓰이지 않았던 코발트블루가 위작에서 발견되었고 이것으로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의 회화는 모두 위작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은 국가사회주의독일로동자당 측에 국보급 미술품을 팔아넘긴 매국노가 아니라 국가사회주의독일로동자당 측까지 속여넘긴 사람이 된 셈이었다.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 메이헤런는 미술품 위조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 상태가 안 좋아서 감옥 대신 요양원으로 보내졌고 1947년 12월 29일에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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