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독 관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한국독일의 관계는 1883년 11월 26일 독일 제국의 전권대신 주(駐)요코하마 독일 제국 총영사 에드워드 잡페(Edward Zappe)와 조선 전권대신 민영목간에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외교 관계를 맺었다가 경술국치로 불가피하게 끊어졌다. 일제 강점기 시절 대한민국 임시 정부나치 독일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한 바 있다. 국권 회복 이후 대한민국독일 연방 공화국1955년 12월 1일 재수교하였다. 한독 국교 회복 이후 서독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많은 지원을 해 주었다. 1990년 독일의 재통일 이후에도 한독간의 외교는 유지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對)독일 수출은 107억0218만USD, 독일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143억0489만USD(각 2010년)에 달하여, 독일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8위의 수출국, 제6위의 수입국이다. [1]

2013년 현재 수교 130주년을 맞았다.

외교사[편집]

조선의 개화기[편집]

조선과 독일 양국은 고종 3년(1866) 2월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로나(The Rona)호를 타고 충청도 해미현 조금포(調琴浦)에 와서 입국을 교섭하다가 거절당한 것이 최초의 접촉에 해당한다. 오페르트는 2년 후인 1868년에 다시 프랑스 신부 페론(Feron)과 미국인 젠킨스(Jekins)를 대동하고 차이나호를 타고 충청도 행담도(行擔島)에 정박하였다. 그는 조선의 천주교 탄압에 보복한다고 구만포에 상륙한 후 덕산군청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고, 가야동에 소재하고 있는 흥선대원군의 생부인 남연군(南延君)의 분묘를 발굴하려다 실패(1868년)하였으며, 경기도 영종진을 습격하려다가 역시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굴총강도사건은 흥선대원군의 배외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동시에 그 후 국제적인 문제를 야기시켰다.

조선과 독일 양국간의 정식교섭이 시작된 것은 고종 7년(1870년) 5월이며, 당시 도쿄 주재 독일대리공사 폰 브란트(Von Brandt)가 일본관헌의 소개로 군함 헤르타호를 타고 부산왜관에 내방하여 수호통상을 교섭하고자 하였으나 역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치로 뜻을 못이루고 돌아갔다. 1882년 조선과 미국간의 수교가 이루어지고 이어 조선과 영국간에 수교가 진전되자, 당시 주청(駐淸) 독일공사로 있던 폰 브란트는 북양아문의 서리직예총독(署理直隸總督) 장수성(張樹聲)을 찾아 영국공사 파크스의 전례대로 조·미조약에 따르겠다는 전제 아래 소개장을 받았다. 1882년 6월 30일에 인천에 당도하여 청국도원인 마건충(馬建忠)의 알선으로 조선의 전권대신 조영하(趙寧夏)·김홍집(金弘集) 등과 교섭, 14개조에 걸친 조·독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비준을 얻지 못하였고, 1883년 11월 26일 독일전권대신 주(駐)요코하마 독일총영사 에드워드 잡페(Edward Zappe)와 조선전권대신 민영목간에, 조영수호통상조약과 같이 수정을 가한 다음, 전문 13조의 조독 수호 통상 조약과 3관(款)의 부속통상장정, 3관의 세칙장정·세칙· 3관의 선후속약에 조인을 완료하였다. 이 조약은 1884년 11월 8일에 서울에서 비준이 교환되었으며, 11월 28일에 젬바하하(Zembsch)가 초대 주한독일총영사로 임명되어 서울에 독일 총영사관이 개설되었다. 조약체결 이전에 서울에 주재하였던 부들러 부영사는 재한 독일인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와 있었던 것이다. 주톈진 독일영사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가 청국 재상 이홍장의 천거로 1883년말부터 1885년까지 조선왕국의 외무협변(차관급)으로 임명되고 이조말의 대서양 외교정책 수립을 주름잡았다. 그는 또한 조선해관장직을 맡고 국내정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으며 조선에 조폐시설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1898년 7월 28일, 프로이센 왕자 타인리히가 10일간의 일정으로 방한했다. 1898년 독일인 프란즈 에카르트가 내한하여 최초로 양악을 보급했다. 1901년 3월 민철훈 특명전권공사가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3국을 겸임했다. [2] 그러나 양국의 외교 관계는 경술국치(1910년)로 불가피하게 끊어졌다.

국교 수립과 독일의 경제 원조[편집]

서독은 1954년 2월 12일 ‘한국에서의 독일 적십자병원에 의한 원조에 관한 협정’을 미국과 체결하고 야전병원을 부산에 설립, 의료봉사로 적극 원조하였다. 그리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구호계획에 따라 47,619달러를 기부했다.[3]한국 전쟁의 휴전 후 한국은 총영사관 교환을 희망한 데 대해 독일연방공화국은 상업 대표단의 교환을 희망하였다. 이러한 이견 속에, 1954년 10월 1일 한국은 독일 레마겐에 총영사관을 개설하고, 초대 총영사직은 이한호가 맡았다(1954년 5월 20일~1956년 8월 2일). [4] 독일 정부는 한국에 세운 총영사관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한국무역대표단(Koreanische Handelsvertretung)으로 승인(1955년 1월 22일)했다. 대한민국과 서독간의 공식적인 외교관계는 1955년 12월 1일 양국이 상호 승인함으로써 재개되었다. [5][6] 그러나, 독일은 2년이 지난 1956년 봄에야 영사 인가증(領事認可證)을 발급하고 6월 5일에 주한독일 총영사를 임명하였다. 1956년 8월 총영사관을 쾰른으로 옮겼다. [7]10월에 독일은 한국의 서울에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8] 그 후 양국정부는 총영사관을 공사관으로 승격시켰다(1957년 3월 5일). 1957년 6월 5일, 주미 대사 양유찬은 친선사절로서 서독을 방문하여 콘라트 아데나워와 회담하고 조만간 국교를 수립하기로 합의하였다. [9] 한국 정부는 쾰른에 있는 총영사관을 폐쇄하고 서독의 임시 수도로 정해진 본(Bonn)에 대한민국 공사관을 설치하였다(9월 25일). 이 공사관은 라인 강을 앞에 두고 서독 외무성과 마주 보는 유서깊은 아데나워 가(Adenaueralle)에 위치하고 있다.[10]1958년 8월 1일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키게 되었다. [11] 같은 날, 주독일 대사관이 에 개설되었다. 한국은 초대 주서독 대사에 군인 출신으로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손원일(1958년 8월 22일 부임)을 임명하였다. 이후 서독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많은 지원을 해 주었다. 1960년대, 한국으로서는 서구국가 중 독일 연방공화국과의 관계가 가장 중심이 되었다. 1961년 2월 초,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수상은 전규홍 서독 대사와의 회견을 통하여 "서독정부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도와줄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여 왔다. 앞서 제의되어온 서독의 민간차관에 있어서도 우선 10만 킬로 화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5명의 기술자를 제1진으로 한국에 파견키로 합의를 보았다. [12] 이어 양국은 1961년 3월 18일 한·독 기술원조협정(직업학교 설치에 관한 각서교환)을 체결[13]한 것을 비롯하여, 동년 12월 13일에는 한·독 차관협정(韓獨借款協定), 1962년 3월 15일 한·독 경제협력의정서, 1963년 2월 14일 한·독 경제고문단 설치에 관한 협정 등이 체결되어 경제협력 관계가 강화되었다. 1963년 12월 22일, 123명의 한국 광부 제1진이 서독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하여, 주서독 최덕신 대사 등의 환영을 받았다. [14]

서독을 공식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좌)과 빌리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우)(1964년 12월 10일)
서독을 방문중인 한국의 국회의원 6인(왼쪽부터, 3. 김성용, 4. 장경순 5. 김홍일, 그리고 김우경, 문태준, 김정렬은 순서 미상 ) - 1970년 11월 10일


독일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1964년 12월 6일에는 박대통령이 독일을 공식 방문하였다. 에르하르트 수상을 면담할 때, 그는 박정희의 손을 잡고 한국에 지원을 약속했다.[15] 이것은 한국의 국가 원수로서는 최초의 유럽 방문으로서, 이 방문을 통한 양국 정상회담에서는 한·독 양국간에 우호와 협조를 증진시키고, 국토가 분단된 공동운명체로서의 유대의식을 재확인하고, 공동목표의 성취를 위해서 동일보조를 취한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또한 박대통령의 방독 중인 12월 7일에는 한·독 경제협력협정이 체결되어 1억 5,900만 마르크 규모의 차관을 공여(供與)받았다. 박대통령의 방문 중, 에르하르트는 ‘라인강의 기적’을 예로 들며 고속도로와 제철산업, 자동차산업, 정유산업, 조선산업 등을 할 것과‘한·일협정’을 맺을 것도 자문하였다.[16] 1965년에는 MRO차관 1,500만 마르크, 통신시설의 확장을 위한 재정차관(財政借款) 1,900만 마르크를 제공받고, 한·독 실무자 회담을 서울에서 개최하여 양국경제관계의 전반을 협의하였다. 1966년에는 효성물산 나일론사(絲) 공장차관 832만 마르크와 영남화력발전 차관 8,800만 마르크가 도입되었다. 1967년 3월 2일에는 박대통령의 초청으로 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방한(訪韓), 3월 6일 국토통일을 위한 긴밀한 협력, 한국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한 지원, 독일 기업의 대한투자(對韓投資) 장려, 제2 영남화력 발전소·낙농(酪農) 시범농장·부산 직업학교·괴테회관의 설립 등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1970년 2월 18일에는 한·독 광부협정, 5월 15일에는 한·독 문화협정이 체결되고, 이어 다음날 부산 직업훈련소 설치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는 등 양국의 경제협력관계는 미국 및 일본에 다음가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17] 북한과의 관계는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로 동독과의 외교관계가 끊겼으나 2001년 3월 1일에 다시 수교하였다. 약 2만 9천 명의 한국인이 독일에 살고 있다.독일 문화는 특히 한국의 철학, 의학, 물리학, 음악, 법학, 정치학의 분야에서 모체가 되고 있다.[18] 현재, 독일연방공화국 특명전권대사는 2009년 9월 부임한 Dr. 한스-울리히 자이트(Hans-Ulrich Seidt)이다. [19]

주독일 대한민국 대사[편집]

역대 주(駐)독일 대한민국 대사 [20]
대수 이 름 임기
1 손원일 1958년 8월 22일 부임
2 전규홍 1960년 11월 21일 부임
3 신응균 1961년 7월 4일 부임
4 최덕신 1963년 8월 27일 부임[21]
5 김영주(金永周)[22] 1967년 9월 9일 부임
6 진필식 1974년 3월 8일 부임
7 이창희 1975년 9월 17일 부임
8 이문용 1980년 9월 2일 부임
9 송광정 1981년 11월 26일 부임
10 정순근 1984년 5월 9일 부임
11 신정섭 1987년 5월 13일 부임
12 신동원 1990년 3월 5일 부임
13 김태지 1993년 5월 4일 부임
14 홍순영 1995년 2월 4일 부임
15 이기주 1998년 5월 7일 부임
16 황원탁 2000년 10월 24일 부임
17 권영민 2003년 6월 18일 부임
18 이수혁 2005년 6월 15일 부임
19 최정일 2007년 3월 26일 부임
20 문태영 2010년 3월 3일 부임

주요 인사교류[편집]

독일 방문[편집]

대한민국 방문[편집]

주요 협정[편집]

교통[편집]

한-독간 항공노선
거점 도시 공항
IATA
공항
ICAO
거점 공항
이름
항공사 및 상대국 취항지
대한민국 서울/인천 ICN RKSI 인천 대한항공(1개) : 프랑크푸르트
아시아나항공(1개): 프랑크푸르트

스포츠[편집]

차범근, 이영표, 손흥민 등의 축구 선수들이 독일에서 활약한 적이 있었다.

연예계[편집]

하하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났고 한국 방송에 출연하고 있다.

주석[편집]

  1. 국가별 수출입. 한국무역협회.
  2. "韓獨修交82年略史", 《매일경제》, 1967년 3월 2일 작성. "1901年3月 閔哲勳特命全權公使가 英國․独逸․墺地利3國을 兼任했다."
  3. 최종고, 《韓獨交涉史》 홍성사 (1983) 244쪽, “1950년 한국에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의 아데나워 수상은 독일군을 연합군의 일환으로 한국에 파병하지는 않았으나, 1954년 2월 12일 ‘한국에서의 독일 적십자병원에 의한 원조에 관한 협정’을 미국과 체결하고 야전병원을 부산에 설립, 의료봉사로 적극 원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구호 계획에 관한 결의에 따라 기증금 47,619달러를 제공하는 한편 유엔에서 한국을 지지해 주기도 하였다.1) ... 1) Karl Silex, Adenauer und Korea, Die Ära Adenauer, Fischer Bücherei 550, 1964, S. 143-6.”
  4. "初代西獨總領事 李漢浩氏를任命", 《경향신문》, 1954년 5월 25일 작성, 1면. "韓國과 獨逸聯邦共和國(西獨)이 外交關係를 맺는 最初의 措處로서 總領事를 交換하기로 兩國間에 合意를 보았다는 바 獨逸 「본」市에 駐在할 初代總領事로서 李漢浩 博士가 去二十一日字로 任命되었다하며 同氏에 對한 信任狀도 이미 發送되었다고 한다"
  5. 최종고, 《韓獨交涉史》 홍성사 (1983) 244쪽, “그래서 한국 정부는 1954년 10월 1일에 독일의 레마겐(Remagen)에다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초대 총영사직은 이한호 박사가 맡았다(1954.5.20-1956.8.2). 독일 정부는 처음에는 이 총영사관을 ‘한국무역대표(Koreanische Handelsvertretung)’로 승인하였다가(1955.1.22), 1955년 12월 1일에 한독간에 양국이 상호 국가 승인을 하기에 이르러 완전히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6. 공관 약사. 주독일 대한민국 대사관. “1955.12.1 한·독 양국, 상호 국가승인 외교관계재개”
  7. "韓獨修交82年略史", 《매일경제》, 1967년 3월 2일 작성. "56年8月 總領事館을 「쾨른」으로 옮겼다."
  8. 최종고, 《韓獨交涉史》 홍성사 (1983) 245쪽, “1956년...독일 정부도 그 해 10월에 한국의 서울에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9. "正式國交에 合意", 《동아일보》, 1957년 6월 8일 작성, 1면. "韓國의 親善使節인 梁裕燦大使는 五日 西獨의 「콘라드 · 아데나워」 首相을 訪問함으로써 三日間의 西獨訪問을 終結하였다 그들은 約一時間에 걸쳐 西獨의 首相官邸에서 會談하였다 西獨과 韓國은 不遠한 將來에 正式外交關係를 樹立하자는데 合意를 보았다"
  10. 최종고, 《韓獨交涉史》 홍성사 (1983) 245쪽, “그리하여 다음해인 1957년 3월 5일에 대한민국 정부와 독일연방공화국 정부는 각각 총영사관을 공사관으로 승격시켰다. 한국 정부는 그 해 9월 25일에 쾰른에 있는 총영사관을 폐쇄하고 서독의 임시 수도로 정해진 본(Bonn)에 대한민국 공사관을 설치하였다. 이 공사관은 라인 강을 앞에 두고 서독 외무성과 마주 보는 유서깊은 아데나워 가(Adenaueralle)의 가장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1.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과도기의 서구 제국과의 관계〉 "독일과의 관계는 한국이 휴전 후 총영사관 교환을 희망한 데 대해 독일연방 공화국은 상업 대표단의 교환을 희망하였다. 이런 이견 속에 1954년 5월 20일 총영사를 임명하였으나, 독일은 2년이 지난 1956년 봄에야 영사 인가증(領事認可證)을 발급하고 6월 5일에 주한독일 총영사를 임명하였다. 그 후 1957년 3월 양국정부는 총영사관을 공사관으로 승격시켰고, 다시 1958년 8월 1일 대사관으로 승격시키게 되었다."
  12. "對西獨覺書準備中", 《경향신문》, 1961년 2월 12일 작성.
  13. 즉시 발효. 대한민국 정부와 독일연방공화국 정부간의 기술원조협정 (직업학교 설치에 관한 각서교환) ( Exchange of Notes concerning the Joint Establishment of a Skilled Workers School between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Government of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 《국가법령정보센터》. 법제처.
  14. "광부제1진,서독에안착", 《동아일보》, 1963년 12월 23일 작성, 7면.
  15. 오창규. "이미륵과 에르하르트, 그리고 곤노", 《문화일보》, 2006년 12월 12일 작성. "1961년 말. ... 그리고 그해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 국빈방문 초청을 받았다. 총리가 된 에르하르트는 박 대통령의 손을 잡고 지원을 약속했다."
  16. 오창규. "이미륵과 에르하르트, 그리고 곤노", 《문화일보》, 2006년 12월 12일 작성. "한발 더 나아가 ‘라인강의 기적’을 예로 들며 경부고속도로와 제철산업, 자동차산업, 정유산업, 조선산업 등을 할 것을 주문했다. ‘한·일협정’을 맺을 것도 주문했다."
  17.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제3공화국의 대서구 외교
  18. "韓獨修交82年略史", 《매일경제》, 1967년 3월 2일 작성. "...独逸文化는 中國․美國․日本의 文化못지않게 强한 뿌리가 박혀졌으며 特히 哲學․医學․物理學․音樂․法學․政治學의 分野에서는 独逸文化가 바로 우리 文化構成의 母體가 되고 있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19. 대사와 각 부서 소개. 주한 독일 대사관.
  20. 공관 약사. 주독일 대한민국 대사관.
  21. "瑞典大使에- 劉載興씨任命", 《경향신문》, 1963년 8월 7일 작성. "西獨大使에는 崔德新前外務部長官이 決定되어 있다."
  22. "12國大使任命의결", 《동아일보》, 1967년 9월 16일 작성. "國務會議는 16일 駐美·駐英·駐日·駐獨大使를 포함해서 12개國駐在大使를 새로 任命키로 議決했다. 이날 議決된 大使級의 大幅移動은 朴大統領의 決裁가 나는대로 月內에 發令케 되었다. … ▲駐西獨 大使〓金永周(43·外務次官)"

PD-icon.svg 본 문서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지식공유 프로젝트를 통해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한 저작물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