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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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화(韓國-映畵)는 조선 말엽에 움직이는 사진인 활동사진이 들어오면서 처음 소개되었으며, 한국인의 손으로 처음 활동사진이 제작된 것은 1921년경부터이다.

역사[편집]

일제강점기[편집]

윤백남은 1921년에 《월하의 맹서》라는 활동사진을 직접 감독하였는데, 이때 배우들로서는 이월화·권일청이 등장했다. 다음해인 1922년에는 《춘향전》이라는 영화가 나왔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이지만 대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식 감독수업을 받지 못한 우리의 실정으로 인해 《춘향전》은 일본 감독 하야가와 마쓰지로(早川松次郞)에 의해 연출되었으며 이도령과 춘향역은 김조성과 김선초가 맡았다.

1923년에는 초창기 한국영화의 개척자로서 높이 평가되는 안종화가 등장하는 시대였다. 그는 감독과 배우를 겸하여 《바다의 비곡》, 《운영전》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화면은 사람이 움직일 뿐 아직도 무성영화였었기 때문에 화면을 설명해 주거나 등장인물의 말을 대신 해주는 변사(辯士)가 필요했다. 따라서 가끔 영화의 성공 여부가 변사의 능력에 좌우될 정도로 변사의 역할이 중요시되었다.

1925년에는 8편의 영화가 나왔는데 이 해에 나운규가 등장했다. 나운규는 감독과 배우를 겸했음은 물론 작품도 직접 썼던 정력적이며 창의적인 영화인이었다.1926년에 그의 유명한 《아리랑》이 제작되었다. 《아리랑」은 전설적인 이야기를 화면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제(日帝)하에서 신음하는 민족의 비애와 항거정신을 고취한 작품으로서 전국민의 절대적인 환영을 받은 특기할 만한 작품이었다. 나운규는 이 영화를 직접 제작·감독·출연하였는데, 영화 《아리랑》이 몰고 온 바람은 영화계에 큰 자극을 주어 이후 많은 영화인들이 모든 고난을 무릅쓰고 영화제작에 몰두하여 1927년에는 13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1935년에 발성영화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형편으로서는 이에 대처할 만한 준비가 없어 그대로 무성영화를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발성영화가 조선 땅에 들어오자 우리의 영화업계는 심한 타격을 받았다. 발성영화제작을 위한 제작비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1936년에 조선에서 최초의 발성영화인 이명우 감독, 문예봉·한일송 주연의 《춘향전》이 개봉하였다. 영화로서는 이렇다 할 평가를 받지 못하였지만, 말을 하는 조선의 영화라는 점에서 많은 관객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군국주의로 치닫고 있던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인이 만든 영화에 대해 심한 검열을 가하여 한국의 영화계는 거의 질식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국책에 상응하는 영화를 제작하라는 일제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한강》 《수선화》 《무정(無情)》 《수업료》, 그리고 연극에서 히트한 작품을 번안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등이 나왔다.

일제의 강압은 더욱 심해져서 1942년에는 안석영 감독, 서월영·김일해 주연의 《흙에서 산다》 한 편이 나올 정도로 조선의 영화계는 가사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총독부는 마침내 영화제작의 모든 권한을 장악할 조선영화주식회사(朝鮮映畵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일제는 일본인 감독과 배우들을 동원하여 전쟁영화 내지는 내선일체를 운운하는 영화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1]

광복 이후[편집]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영화인들은 거의 맨주먹으로 다시금 재기하기에 안간힘을 썼다. 이 당시의 영화는 광복의 감격을 표현한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인들이 그리던 광복의 날은 왔고, 한동안 동면기에 있었던 영화인들이 서서히 일어나 또다시 영화예술을 꽃피우게 되었다. 1946년에 최인규가 고려영화사(高麗映畵社)를 창립하고 《자유만세》를 만들어 흥행에 크게 성공했으며, 뒤를 이어 이구영의 《안중근 사기》, 윤봉춘의 《윤봉길의사>, 전창근의 《해방된 내고향》, 이규환의 《똘똘이의 모험》, 김소동의 《모란등기(牡丹燈記)》 등이 발표되었다. 그 뒤 1947년에 윤봉춘의 《유관순》, 신경균의 《새로운 맹세》, 최인규의 《죄없는 죄인》, 이규환의 《갈매기》가 나왔는데, 특히 《새로운 맹세》에서 최은희가 데뷔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48년에는 한형모가 《성벽을 뚫고》를 발표하여 크게 성공했다. 1950년 6·25전쟁기에 영화인들은 다시 한번 시련기에 처했지만, 각자 역경 속에서도 1952년 전창근은 《낙동강》을, 이만흥은 《애정산맥》을 발표했고, 같은 해 최인규 문하생이던 신상옥이 《악야(惡夜)》로, 정창화가 《최후의 유혹》으로 각각 등장했다. 1954년 수도로 돌아온 영화인들은 외국 영화의 홍수라는 새로운 도전 속에서도 줄기차게 영화를 만들었다. 1954년 김성민의 《북위 41도》, 윤봉춘의 《고향의 노래》, 홍성기의 《출격명령》, 신상옥의 《코리아》 등이 나왔다. 이 해의 ‘영화평론가협회상(永畵評論家協會賞)’과, 한국영화 초창기의 공로자인 이금룡을 추모하는 뜻에서 ‘금룡상(金龍賞)’이 제정되어 영화계에 활기를 주었고, 이강천의 《피아골》에서 김진규가 데뷔하기도 했다. 1955년 5월에는 전 영화인과 관객들의 여망에 따라 국산 영화에 대한 면세조치가 취해져 이후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해 개봉된 이규환의 《춘향전》은 당시 개봉관에서 1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1957년에는 최신 영화 기재를 도입한 안양촬영소의 준공을 보게 되었다.[2]

중흥기[편집]

편의상 한국영화의 시기를 3등분하여 제작편수를 비교해 본다면, 1919년 ~ 1944년에 걸쳐 초창기에 제작된 영화편수가 166편, 1945년 ~ 1953년 과도기에 제작된 영화수가 86편, 1954년 ~ 1970년 중흥기에 제작된 영화수가 2,021편이나 된다. 다시 말하면, 1955년 이후 국산영화 면세조치와 최신 영화 기재의 도입, 그리고 관객의 절대적인 호응이 영화인들을 크게 고무한 결과가 되어, 1954년 이래 영화 중흥기를 맞이하였다고 볼 수 있다.[2]

그러나, 그와 같은 영화 산업의 전성시기도 1968년 이후부터는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전파 매체의 강력한 도전, 그리고 이른바 대중오락의 다극화시대를 맞이하여 소위 영화예술만이 대중들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던 시대가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한국영화계는 일제말의 수난기, 6·25의 진통기를 거쳐, 제3의 시련인 불황기에 접어든 것이다. 물론 1960년대 초반부터 중반 이후까지 일종의 대유행을 형성했었던 청춘영화라든가 문예영화(文藝映畵)라는 새로운 장르의 영화들이 등장, 한때나마 활기를 띠었던 것도 인정할 수는 있다. 특히 신성일은 이 무렵 《맨발의 청춘(靑春)》, 《청춘교실(靑春敎室)》, 《흑맥(黑麥)》 등의 영화를 통하여 한국적인 의미의 스타시스템을 구축했으며, 문예영화(文藝映畵)쪽에서는 1961년 신상옥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유현목의 《오발탄(誤發彈)》, 1965년 김수용의 《갯마을》, 1966년 이만희의 《만추(晩秋)》, 1969년 최하원의 《독 짓는 늙은이> 같은 우수한 작품들이 쏟아져나와 한국 영화의 질을 높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또다시 참담한 불황의 벽에 부딪쳐 허덕이다가, 1974년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故鄕)》, 1977년 김호선의 《겨울여자》로 차츰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2]

평가[편집]

초창기로부터 해방 당시까지 그 의욕은 왕성했지만 예술적인 차원에서는 아직도 미숙했었다.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영화인들은 민족의 고뇌와 분노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데 영화를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한 예가 오히려 많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화란 근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예술로, 사회 근대화의 산물이라는 점으로 볼 때 한국의 영화는 그 발전을 가능케 할 만한 사회적 여건이 너무나 미숙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창기임에도 불구하고 나운규 같은 거의 전설적인 창의적 영화인을 낳게 하였음은 특기할만한 일로 평가된다.[1]

주석[편집]

  1. '한국의 영화', 《글로벌 세계 대백과》
  2. 변인식, 예술·스포츠·취미/영화/영화의 기초지식/한국영화의 역사/한국영화의 역사[개설], 《글로벌 세계 대백과》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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