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리터 폰 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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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식민지주의에 대한 수업을 연 프란츠 폰 에프.

프란츠 리터 폰 에프 (Franz Ritter von Epp, 1868년 10월 16일, 뮌헨 ~ 1946년 12월 31일, 뮌헨) 는 20세기 초반 독일 제국 육군 (Deutsches Heer) 의 정규 장교로, 나치스 치하에서 바이에른 주의 제국지사 (Reichsstatthalter) 를 맡아, 독재 권력을 행사하였다.

생애[편집]

프란츠 리터 폰 에프는 1868년, 뮌헨에서 화가 루돌프 에프 (Rudolph Epp) 와 카타리나 슈트라이벨 (Katharina Streibel) 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보낸 뒤, 뮌헨의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동아시아에서 의용병으로서 1900~01년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였고, 독일의 식민지인 도이치쉬트베스타프리카 (Deutsch-Südwestafrika) 에서 중대장이 되어, 그곳에서 헤레로인의 저항을 유혈 진압하는 데에도 가담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바이에른 보병 연대 (Infanterie-Leibregiment) 의 지휘관을 맡아, 프랑스, 세르비아, 루마니아, 이손초 전선에 참전하였다.

전쟁 중의 활약으로 1918년 5월 29일, 푸르 르 메리트 (Pour le Mérite)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그는 또 1918년 2월 25일에 기사 작위를 수여받아 리터 폰 에프 (Ritter von Epp) 가 되었고, 1916년 6월 23일에는 바이에른의 군사 훈장 (Militär-Verdienstorden) 을 수여받았다.

전후에는 우익 준군사 조직 자유군단 에프 (Freikorps Epp) 를 조직하였는데, 주로 참전 용사들로 구성되었고, 미래의 돌격대 지도자 에른스트 룀도 이 조직의 구성원이었다. 자유군단은 뮌헨에서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을 무력으로 무너뜨렸고, 이 과정에서 대량 학살을 일으켰다. 그는 바이마르 국방군 (Reichswehr) 에 들어가 1922년, 소장 (Generalmajor) 으로 승진하였지만, 1923년에 제대하여 우익 정치 활동에 집중하였다.

1928년, 바이에른 인민당 (Bayerische Volkspartei) 을 떠나,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NSDAP) 에 입당하여 나치당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의원의 지위는 1945년까지 유지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1928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당의 군사 정책국 국장을 역임하고, 나중에는 독일의 잃어버린 식민지를 되찾기 위해 편성된 독일 식민 협회 (Reichskolonialbund) 의 회장이 되기도 하였다.

1933년, 프란츠 리터 폰 에프는 정권을 장악한 아돌프 히틀러빌헬름 프리크의 명령을 받고 하인리히 헬트 (Heinrich Held) 가 총리를 맡고 있는 바이에른 주 정부를 해체하였다. 이후 그는 바이에른 제국판무관 (Reichskommissar, 후에 제국지사 (Reichsstatthalter)) 에 임명되어 바이에른을 통치하였다. 하지만 새로이 바이에른 주의 총리가 된 루트비히 지베르트 (Ludwig Siebert) 와 자주 의견이 맞지 않아 충돌하여 히틀러의 눈 밖에 났지만, 1945년까지 직위를 유지하였다.

1945년, 반란 조직 프라이하이차크티온 바이에른 (Freiheitsaktion Bayern) 에 관여했다하여 바이에른 주 총리 파울 기슬러 (Paul Giesler) 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전후에는 미군에 잡혀 1946년,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출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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