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뇨 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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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뇨 투지만

프라뇨 투지만(크로아티아어: Franjo Tuđman, 1922년 5월 14일 ~ 1999년 12월 10일)은 크로아티아의 정치인이다.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서 떨어져 나온 후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자그레브 부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 부대에 들어가 활동했고, 전쟁 후에는 베오그라드의 군사학교를 수료하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군대(유고슬라비아 인민군)에서 복무하며 장군으로까지 승진했다. 그 후 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크로아티아 노동운동사 연구소에서 일했다. 사학자로서 그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민감한 민족 문제에 관심이 많았으며, 크로아티아의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을 했다. 그의 논문이 세르비아크로아티아의 대립을 유발시키고 크로아티아 분리 운동을 펼쳤다는 이유로 공산당(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SKJ)에서 추방되고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생활을 했다.

1981년, 스웨덴 언론과 유고슬라비아 내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상황을 인터뷰한 것이 문제되어 다시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군 시절 받았던 훈장은 취소되었다. 그 후 1989년, 동구권의 민주화 물결 속에 유고슬라비아에서도 다당제 자유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자 그는 크로아티아 민주 동맹(HDZ)을 창당, 그 이듬해 총선에 나섰으며,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 동맹은 공산당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에 지명되었다.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 정당인 크로아티아 민주 동맹이 크로아티아에서 우세하게 되면서 유고슬라비아에서의 분리 독립 여론은 더욱 거세졌고, 1991년 5월 분리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90% 이상의 찬성을 얻자 6월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크로아티나 내 세르비아인 거주지역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고 연방군이 투입되어 내전이 일어났으나, 그 해 말부터 국제사회에서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승인받기 시작했다. 그 다음해 대통령 선거에서 과반 이상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 - 자유의 태양 ( 예술가 Ladgrad )


이에 따라 크로아티아의 독립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았으나, 차츰 국내외의 신임을 잃었다. 국내에서는 독립 과정에서의 업적을 내세워 권위적인 통치 스타일로 권력을 휘둘렀고, 국내의 세르비아인들을 탄압했다. 또 보스니아 내전에 개입해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내세워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장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과 대립하였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으나, 1999년 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그에 대해서는 독립영웅이라는 평가와 전쟁범죄자·독재자라는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