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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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풍납동 토성
(서울 風納洞 土城)
대한민국 대한민국사적
종목 사적 제11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 문화재구역: 353,588.6㎡[1]
시대 삼국 시대
소유 국·공유, 사유
위치
풍납동 토성 (대한민국)
풍납동 토성
주소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72-1 외
좌표 북위 37° 31′ 50.25″ 동경 127° 7′ 0.62″ / 북위 37.5306250° 동경 127.1168389° / 37.5306250; 127.1168389좌표: 북위 37° 31′ 50.25″ 동경 127° 7′ 0.62″ / 북위 37.5306250° 동경 127.1168389° / 37.5306250; 127.1168389
정보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서울의 역사

풍납토성(風納土城)은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토성 유적으로, 정식 명칭은 서울 풍납동 토성[2](서울 風納洞 土城)이다. 풍납토성이라는 명칭은 풍납리일대의 토성이라는 뜻에서 온것이며 , 정확히 조선시대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고산성(古山城)" 이라고 나와있다. 이를 보아 중세인들도 백제의 오래된 성곽이라 추측한것으로 추정된다 . 풍납토성이 정식적으로 1900년대 학계에 처음 발견된 것은 1925년대홍수 때이며, 지난 1997년 아파트 공사를 계기로 다량의 백제 유적유물이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유적이 한성 백제 시대(온조왕 ~ 개로왕)의 이른바 하남위례성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역사[편집]

백제 때의 하남위례성의 북성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1900년대 정론적인 학계에서의 발견은 1925년 홍수 때로, 당시 풍납토성은 한강의 의해 서벽이 유실됨으로써 발견, 조사되었다. 이후 1963년 성벽 둘레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성의 내부는 사유지로 남아있다. 1964년 시굴조사에서 백제 건국초기의 철기시대 유물이 발굴되었다. 1997년 아파트 공사를 하던 중 유물이 발굴되어, 발굴 조사를 하였다.

문화재청과 사업자와 주민들 사이에 보상비 문제로 갈등이 생겼고, 2000년 5월 13일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주민들이 굴삭기로 발굴 현장을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1][2]

성의 규모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편집]

현재 동벽 1.5km, 남벽 200m, 북벽 300m로 둘레가 약 2.7km가 남아있지만, 선문대학교 고고학과 이형구 교수가 측량한 결과, 풍납토성은 본래 둘레가 약 3.5km, 밑변이 30~40m, 높이가 15m, 넓이 약 26만평으로, 현존하는 토성 중 대한민국에서 최대 규모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이 성이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에 축정된 것이라고 2000년 4월에 발표했다. 성의 규모와 축성 시기를 보았을때 당시 이 성을 축조한 백제는 이미 상당한 규모의 중앙집권국가 체제를 수립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해석하고 있다.

이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중국 은나라의 수도 유적이다. 9.9m이상의 성벽을 가진 9km의 유적은 1만 여명이 일년에 330일씩 18년 이상을 작업해 축조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에 비추어보았을때 풍납토성도 그만한 인력을 동원하여 장기간 시간을 들여 축조할 수 있는 국가와 그만큼 막강한 사회ᆞ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도자가 설계ᆞ지휘한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성벽은 돌이 없는 평야지대에서 성을 쌓는 방식으로 고운 모래를 한층씩 다져 쌓았다. 성벽의 표면은 잔디와 잡초로 덮여 있는 곳이 많으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다. 동쪽에는 4곳에 출입문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남아있다.

풍납토성은 백제만의 독자적인 설계방식이 돋보임과 함께, 당시 중국의 축조기법이 여러 반영된 것을 보아, 당시 백제가 중국과 활발히 교류했을 정도로 해상무역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풍납리식 민무늬토기·신라식 토기들과 그물추·물레·가락바퀴(방추차)·기와 등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출토되어, 풍납토성 지역권은 백제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임을 알게 되었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도성인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와 방어성으로 보는 두가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더욱 연구·조사 되어야 한다. 그러나 초기 백제의 중요한 성으로서 당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며, 주변에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과 관련되어 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치있는 곳이다.

출토유물[편집]

1925년 대홍수 때 청동제 초두가 2개 발견되었으며, 이후 토기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1996년 이후 발굴로 토기, 그물추, 물레, 가락바퀴,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1999년 이후 한신대 박물관은 경당지구를 발굴하였는데, 제사유적과 제사후 폐기된 도구와 음식을 버리는 구덩이 유구, 기와와 건물바닥에 까는 전, 토기, 유리구슬 조각, 제물로 보이는 12마리의 말머리 등이 나왔다. 경당지구의 제사유적 주건물은 길이 13.5m, 폭 7, 길이 3m의 궁자형 가옥이었다.

교통[편집]

참고문헌[편집]

사진[편집]

주석[편집]

  1. 문화재청고시제2014-106호, 《서울 풍납동 토성 사적 추가지정 고시》, 문화재청장, 대한민국 관보 제18373호, 76면, 2014-10-24
  2. (광주풍납리토성 →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문화재청고시제2011-116호,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명칭 변경 및 지정·해제 고시》, 문화재청장, 대한민국 관보 제17560호, 392면, 2011-07-28)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