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카혼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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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혼타스의 초상화
스미스의 목숨을 구하는 포카혼타스, 19세기의 일러스트

포카혼타스(Pocahontas, 1595년경 - 1617년 3월 21일[1])는 영국인 존 롤프와 결혼한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런던으로 이주하여 유명인사가 된 여성이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영국 정착민들 사이의 평화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포우하탄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 추장 와훈수나콕의 딸로, 그녀의 아버지는 지금의 버지니아 주인 미국 동부 지역의 알곤킨 어족 부족들의 연합체를 지배하고 있는 부족장이었다. 포카혼타스의 원래 이름은 마토아카(Matoaka 또는 Matoika, 작은 눈의 깃털)로, 포카혼타스라는 이름은 포우하탄이 그녀가 어렸을 때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지어준 별명이다(포우하탄 언어로 '작은 장난꾸러기'[2]).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는 구약성서 창세기의 '리브가'에서 따온 레베카(Rebecca)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성을 따라 레베카 롤프가 되었다.

생애[편집]

1607년 4월, 영국의 개척자들은 버지니아에 도착하여 거류지를 세우기 시작한다. 포카혼타스는 당시 12세에서 14세의 어린 소녀였으며,,[3] 그녀의 아버지는 포우하탄 부족 연합의 대추장이었다. 개척자들을 통솔하는 자 중의 한 명인 존 스미스는 당시에 포우하탄의 사냥꾼들에게 잡혀서 포우하탄 연방의 추장이 있는 마을인 웨로워코모코로 가게 된다. 스미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사형을 당하기 위해 바위에 눕혀졌다. 곧이어 추장이 곤봉으로 그의 머리를 내려치려 하자, 포카혼타스가 스미스에게 뛰어들어 그를 감쌌다. "내가 사형에 처할 때,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맞을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내 목숨을 살렸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하였고 나는 제임스타운으로 안전하게 호송될 수 있었다."[4] 그녀는 그 사건으로 인해 다른 사람과 영국인 개척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된다.[5]

존 스미스의 사건은 그가 남긴 글만이 유일한 기록으로, 1860년대부터 그 신빙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의문은 제임스가 일찍이 버지니아에 대한 두 개의 책이 출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1616년앤 여왕에게 포카혼타스를 왕족으로 대우 해줄 것을 탄원하는 편지에서 포카혼타스와의 인연이 처음으로 언급된 점을 이유로 들 수 있다.[5] 이러한 시간 격차는 스미스가 유명세가 있던 포카혼타스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높이기 위해 사건을 과장하였거나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최근의 책에서 J.A.O. Lemay는 스미스의 초기 기록이 처음에는 지리적이고 민족적인 내용이였다는 것과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만 머무르지 않은 것을 언급하며 그때까지는 그 사건을 담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6]

또 다른 회의의 증폭은 스미스가 1602년에 헝가리의 터키인들로부터 붙잡혔을 때 아름다운 소녀가 그를 구해주었다는 포카혼타스와 유사한 이야기를 일찍이 언급하였기 때문이다.[7] 한편, 스미스가 이야기한 포카혼타스와의 사건이 사실일지라도, 일부 역사 전문가들은 그가 구해졌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그를 부족의 일원으로 부활시키는 종교의식에 그가 참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8][9] 그러나 《제임스타운의 사랑과 증오》에서, 데이빗 A. 프라이스는 포우하탄의 의식은 단지 추측일뿐이며, 북아메리카 부족 중에는 그와 비슷한 의식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다고 언급하였다.[10]

진실이 무엇이든, 이 만남을 계기로 포카혼타스는 존 스미스와 친해지고, 제임스타운 식민지에 자주 찾아가 소년들과 함께 놀기도 하였다.[11] 식민지 이주자들이 굶주림에 시달릴 때는, 시중을 드는 사람과 함께 스미스에게 굶주린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많은 양의 식량을 공급해주었다.[12] 그러나 식민지 이주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몇몇 토착민들은 그들의 땅이 위협을 받고 있으며, 또 다시 충돌이 일어날 것을 느끼게 되었다.

1608년, 포카혼타스는 두 번째로 스미스를 구하게 된다. 스미스와 몇몇 이주자들은 친근한 관계에 있는 포우하탄 추장에게 웨로워코모코로 초대를 받는다. 그들은 우호적인 대접을 받았으며, 인디언들과 거래를 하기도 하였지만, 갈 때를 놓치고 그곳에서 밤까지 지내게 된다. 그날 밤, 포카혼타스는 스미스의 오두막으로 들어와 자신의 아버지가 사람을 시켜 음식을 보낼 때 그들이 먹기 위해 무기를 내려놓으면 그들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해준다. 포카혼타스는 그들에게 그것을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녀는 영국인들이 떠나기를 빌었다. 미리 경고를 받자, 영국인들은 음식을 먹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 무기를 들고 있었고, 공격 받지 않을 수 있었다.[13]

1609년, 화약 폭발 사고로 부상을 입은 스미스는 영국으로 치료를 받으러 돌아간다. 영국인들은 토착민들에게 스미스가 죽었다고 말하며, 스미스는 프랑스 해적에게 납치되었고 해적들의 배가 브르타뉴 해안에서 난파되었으며 모두 가라앉았다고 말하였다.[14] 포카혼타스는 그녀가 몇 년 후 존 롤프의 부인으로서 영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가 죽었다고 믿었다.[15]

윌리엄 스트레이치의 말에 따르면, 포카혼타스는 1612년이 되기 전에 포우하탄의 전사 코코움(Kocoum)과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결혼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16]

스미스와 포카혼타스가 연인 관계였다는 역사적 기록은 전혀 없다. 이런 낭만적인 형태의 이야기는 디즈니의 영화처럼 그들이 서로 사랑했다는 허구적인 설정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납치[편집]

포카혼타스 유괴, 조안 시오더어 드 브리, c. 1618

1613년 3월, 포카혼타스는 포우하탄과 무역을 하는 아메리카 토착민 부족 파타워멕(Patawomeck)의 마을인 파사파탄지인(PassapatanzyIn)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버지니아 스탠포트 지역의 프레더릭스버그와 가까운 포토맥 강가에서에서 살고 있었는데, 웨로워코모코와는 65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스미스는 그의 책 《Generall Historie》에서 포카혼타스가 1611년부터 1612년까지 파타워멕의 추장인 자파자우스(Japazaws)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두 영국인 이주자들이 파타워멕과 교역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포카혼타스가 그곳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파자우스의 도움으로, 그들은 포카혼타스를 납치하여 가두는 계략을 꾸몄다. 편지에 적혀있는 그들의 목적은 포카혼타스의 몸값으로 포우하탄 추장이 가둔 영국인 죄수들과 포우하탄이 훔친 무기와 도구들을 돌려 받는 것이었다.[17] 포우하탄은 죄수들을 송환시켰지만, 그가 돌려준 무기와 도구의 양은 이주자들을 만족시키기엔 부족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두 세력 간의 교착 관계는 계속 되었다.

1년의 세월을 기다리면서, 포카혼타스는 오늘날의 버지니아 주 체스터필드 군인 헨리쿠스(Henricus)에 억류되어 있었다. 이주자인 랄프 하모르가 그녀가 "비상할 정도로 예의바른 태도"를 인정 받았다고는 하였으나, 포카혼타스는 그곳에서의 자신의 삶에 대해 알고 있었다.[18] 영국인 성직자인 알렉산더 휘태커는 그녀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하고 영어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녀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은 후, 이름을 레베카로 개명하였다.[19]

1614년 3월, 서로의 교착 관계로 인해 파문키 강에서 영국인과 포우하탄인 100명 간의 폭력적인 충돌이 이루어졌다. 맛치콧의 포우하탄 마을에서, 영국인들은 몇몇의 포우하탄 지도자들과 조우하게 된다(포우하탄 추장은 없었음). 영국인들은 포카혼타스가 그녀의 부족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부지사였던 토마스 데일에 따르면, 포카혼타스는 부재 중이었던 자신의 아버지가 그녀를 "오래된 칼, 조각, 도끼보다 못한" 가치로 여긴 것을 비난하였고 그들에게 자신은 영국인들과 살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20]

존 롤프와 결혼[편집]

포카혼타스의 세례, 존 개즈비 채프먼 (1840)

포카혼타스는 헨리쿠스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존 롤프를 만나게 되어 그와 서로 사랑하게 된다. 영국인 부인과 사별한 롤프는 버지니아에서 새로운 품종의 담배 개간에 성공하였고,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데 보냈다. 그는 이교도와 결혼함으로 인해 겪는 잠재돼 있는 윤리상의 책임에 대해서 매우 괴로워할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주지사에게 그녀와의 결혼을 허락해줄 것을 청원하는 편지에서, 그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그녀의 영혼을 아껴줄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하였다. 그는 자신이 다음 사항에 자극받지 않을 것을 요구 받았다.

세속된 애정의 풀려버린 욕망, 그러나 이 농장의 상품을 위해, 우리 국가의 명예를 위해, 신의 영광을 위해, 나 자신의 구제를 위해… 다시 말해 포카혼타스, 나의 진심과 최고의 생각을 그대에게, 그리고 매우 혼란 스럽고 긴 시간을 보내온, 또한 매우 뒤얽힌 미궁에 마음이 매료된, 나 자신을 그것으로부터 풀기 위해 나는 지치기까지 하였다.[21]

포카혼타스가 롤프와 결혼한 것에 대한 반응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은 1614년 4월 5일 결혼하였다. 포카혼타스는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어 레베카 부인이 되었다. 결혼 후 몇 년간, 부부는 함께 헨리쿠스의 새로운 공동체에서 제임스 강을 가로지르는 곳에 위치한 롤프의 플랜테이션인 버지니아 농장에서 살았다. 그들은 1615년 1월 30일에 아들 토마스 롤프를 낳았다.

그들의 결혼은 포우하탄 부족이 영국인 포로를 풀어주도록 할 수는 없었지만, 제임스타운의 이주자들과 포우하탄 부족이 몇 년 동안 평화로운 관계를 조성하는 것에 큰 도움을 주었다. 1615년, 랄프 하모르는 그 결혼 이후 내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우리는 포우하탄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는 그들의 사람들과도 우호적인 교류와 교역을 하게 되었다.[22]

주석[편집]

  1. Pocahontas and St. Georges Church was called worship pocahontas.. The Story of Princess Pocahontas page 4. St. George's Church, Gravesend. “(Photograph of entry in the Gravesend St. George composite parish register)”
  2. Strachey, Historie, p. 111
  3. Smith, True Relation, p. 93.
  4. 세계의 창, '포카혼타스 전설의 고향'
  5. Smith. Letter to Queen Anne.
  6. Lemay, in Birchfield, Did Pocahontas, p. 25.
  7. Karen Ordahl Kupperman, The Jamestown Project (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7), 51-60.
  8. Gleach, Powhatan's World, pp. 118–121.
  9. Kupperman, Indians and English, pp. 114, 174.
  10. Price, pp. 243–244
  11. Strachey, Historie, p. 65
  12. Smith, General History, p. 152.
  13. Carbone,Elisa, Blood on the River: James Town 1607, Pages 180-181
  14. Donald Culross Peattie, America's First Great Lady, Reader's Digest April 1947 pg. 94.
  15. Smith, Generall Historie, 261.
  16. Strachey, Historie, p. 54.
  17. Argall, Letter to Nicholas Hawes. p. 754.
  18. Hamor, True Discourse, p. 804.
  19. http://www.dhr.state.va.us/hiway_markers/marker.cfm?mid=3334 Pocahontas Highway Marker
  20. Dale, Letter to 'D.M.', p. 843–844.
  21. Rolfe. Letter to Thomas Dale. p. 851.
  22. Hamor. True Discourse. p. 809.

바깥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