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더화이
펑더화이(번체: 彭德懷, 간체: 彭德怀, 병음: Péng Déhuái, 팽덕회) (1898년 1월 24일 ~ 1974년 11월 29일) 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이다. 중국10대원수 중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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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편집]
마오쩌둥과 같은 후난 성 출신으로, 어려서 양친을 잃고 9세때부터 노동에 종사하여 어린시절을 광부, 막노동으로 전전하였다. 16세에 탕셩즈 군벌의 사병으로 들어갔다가, 이후 후난군관강무당(군사학교)에 입학하여, 국민당군의 장교가 되었다. 이후 국민당군의 북벌에 참가하고, 1928년 2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국공합작 결렬이후, 휘하 부대를 이끌고 후난 성 핑장에서 봉기하였다가 후에 마오쩌둥과 주더의 해방구에 합류했다.
이후 홍군을 지휘하여 몇차례의 국민당군의 소탕전을 분쇄했고, 장정에도 참여하여 옌안까지 이동하였다.
제2차 국공합작이 결성되자 팔로군을 이끌고 항일전에 나서, 1940년 화북지역에서 100여개의 연대를 동원한 "백단대전"을 지휘했다. 이때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히기는 했으나, 팔로군의 희생도 매우 컸다.
일본의 항복이후,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서북인민해방군(후에 제1야전군)을 맡아 1948년에는 국민당군에 함락되었던 옌안을 수복하였고, 이후 계속 서진하여 서부의 국민당군을 소탕하였다.
한국전쟁 [편집]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펑은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해서 북한군이 유엔군에 밀리자 마오쩌둥은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고 펑을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북한에 파견하였다. 펑은 38선을 넘어 쇄도해오는 유엔군을 정지시키고 38선 근처에 전선을 교착시켰다.
이 과정에서 펑의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통역과 행정일을 담당하던 마오쩌둥의 큰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이 1950년 11월 25일에 미 공군 F80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펑과 마오는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1]
펑은 전선이 교착상태에 있던 1952년 귀국하였고, 1954년 국무원 부총리겸 국방부장에 임명되었다.
루산 회의 [편집]
1955년에 군에 계급제도가 도입되자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계급을 부여받았다. 마오쩌둥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대약진운동이 대실패로 끝나자, 펑더화이는 1959년 7월에서 8월에 걸쳐 열린 루산 회의에서 그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이 회의를 앞두고 고향인 후난성의 농촌 시찰을 실시한 펑더화이는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화에 의한 경제 피폐를 목격하고, 회의 기간중에 마오에게 서신 형식으로 이 정책의 문제점을 전달하고 정책 전환을 요구했다. 이 서신에서는 마오의 지도권을 존중하는 것을 명시하고 있었지만, 마오는 이것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 들였다. 마오는 이 자료를 비판을 추가하여 회의 참가자에게 토론 의제로 채택하게 했으며, 이러한 마오의 배반적인 행동에 펑더화이도 회의 석상에서 반박 했지만, 결국 펑더화이는 국방부장과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의 지위에서 해임된다. 이 해임은 후임 국방부장이 된 린뱌오의 지위를 높여 문화대혁명의 단서가 되었다.
최후 [편집]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마오쩌둥에게 반기를 들었던 펑은 마오쩌둥을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홍위병의 공격대상이 되어 박해를 받았고, 폭행과 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1974년 암으로 베이징에서 사망하였다.
1978년 마오쩌둥 사후, 중국 공산당 제11차 중앙군사위원회에서 그의 사건이 재조사되어 사면이 이루어졌고, 덩샤오핑에 의해 모든 명예가 회복되었다.
같이 보기 [편집]
주석 [편집]
- ↑ 한국에서 전사한 모택동의 큰 아들 (2008년 9월 22일). 2009년 1월 31일에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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