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위만

문서 내용이 다른 언어로는 지원되지 않습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문서는 다음 위키프로젝트의 범위 안에 있습니다.

--Tol6560 (토론) 2019년 3월 16일 (토) 22:27 (KST)위衛 만滿은 중국 사람으로, 상투를 틀었다고 조朝선鮮사람이 아닙니다. 성姓씨氏는 부계 조상 혈족을 표시하는 문자로, 위衛=위卫 서주周 초기 삼감의 난 반란 평정 후 상商나라를 남북으로 나눴고, 남쪽에는 상나라 왕족인 미자 계를 분봉 송宋나라를 세웠고, 북쪽 수도 조가 주변은 강康나라에 분봉했던 주周문왕 9번째 아들, 주周무왕 동복동생, 주周성왕 숙부, 강康숙叔 희姬 봉封을 위卫나라에 분봉했습니다. 분봉지역 이름 = 성씨, 위卫=위衛, 희姬성姓 위卫씨氏, 옛글자 위卫가 바뀐 것이 위衛씨氏입니다. 따라서 위衛만滿은 주周족族, 위만조선은 지도층이 중국이라 한국사에서 빼야 합니다. 단군조선=상=기자조선에도 희姬성姓강康씨氏 주周족族계통있지만, 조朝선鮮 계통 상商나라 왕족 기箕자子 서여가 왕이기 때문에 한국사에 포함돼야 합니다.[답변]

한국인 선조인 단군조선은 요하 넓은 지역에서 시작 된 것이 틀림없고,

"오녀산성(五女山城)은, 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번시 시(本溪市) 환인현(桓仁縣) 오녀산(五女山)에 위치한 산성(山城)이다. 해발 800미터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쌓은 고구려 특유의 테뫼식 축성 양식을 보여준다."

환인桓仁 어디서 많이 보던 문자 아닙니까? "환단고기》는 환인의 표기를 일반적인 역사서와 달리 하고 있는데, 桓因과 桓仁의 두 가지로 사용하고 있다." 밝은 빛으로 부터 만물이 생겨났다는 뜻 환인桓因, 환인桓仁, 어질 인을 쓰는 것은 지도자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상商나라 시조 설契 최초 도읍지가 랴오닝 성이란 얘기도 있고, "은나라 시대의 정치는 신권정치로서 제사·정벌·권농·목축 등 주요한 국사는 신의 뜻을 묻는 점(占)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사회는 부권적(父權的) 씨족제로서 처음은 형제 상속이었으나 곧 부자상속으로 되었다. 귀족은 더없이 정교한 청동기·백도(白陶)·옥기(玉器)를 사용하고 있었다. 농민은 목제 농기구나 석제 농기구를 사용하여 보리·수수·기장 등을 재배하고, 양잠을 하였으며, 말·양·돼지·소 등을 사육했다" 옥기玉器를 사용했다는 것에서, 상商나라 시작이 요하지역 유력한 것은, 홍산문화紅山文化 유적지가 만리장성 산맥밖 지형인 넓고 평평한 땅 = 평양平壤=양평壤平=요동=랴오닝=요하 지역과 북쪽 지역은 중원과 지리적으로 분리돼있고, 대표적인 유물이 옥기玉器란 것입니다.

한반도 북부지역에 넓게 분포된 O1b2a2b-F940 유전자 홍산문화 지역 집중돼있고, 마한 청주 지역에도 나타나고, 한국과 일본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O1b2-M176 유전자 역시 홍산문화 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한반도 동쪽 방향에서 주로 보이는 O1b2a2a-L682 유전자는 그곳엔 나타나진 않지만, 한국인 단일민족 허구인 것은 아는 사실입니다. 홍산문화 요하문명은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선진 문명이고, BC2333년 단군조선 단기는 우리가 오랫동안 써오던 음력 달력, 랴오닝성 지명 환인桓仁 우연일까요? 우리나라에서 주로 나타나는 유전자가 홍산문화 지역에 높게 나타나는 것 우연? 사회 지도층 왕족들은 나라를 뺏기면 마한처럼 다른 지역으로 이주 새 나라를 세우고, 나중에 이주해온 온조에게 멸망당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지역에서 그대로 삽니다.

상商나라 홍산문화, 갑골문자, 주족 주나라에 의해서 잔인하게 묘사된 상商나라는 북방 민족이 틀림없고, 몽골계통 유목민은 농경문화 주周족族이 황하 북쪽 왼편에 있던 화북=오르도스 지역에 거주할 때, 많은 약탈했었고, 그것 때문에 장안長安 서북쪽 기산까지 주周족族 도망가서 부족국가를 형성한 것 아닙니까?

종(宗)을 풀어서 설명하면, 갓 머리 집 면(宀)과 보일 시(示)의 합성어이다. 시(示, 보일 시, 땅 귀신 시)는 귀신이 보인다는 제사적인 용어를 가리킨다. 즉 기상을 가리키는 정(丁) 그 위에 바친 희생(수양, 수소, 어린양, 숫염소)에서, 피가 흐르는 모양을 나타낸 것이 시(示)이다. 제물을 차려 놓은 제단의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그러므로 이 시(示)는 신에게 무엇인가를 바친다는 것이며, 또 ‘보이다’, ‘나타나다’ 혹은 ‘귀신이 보이다’라는 의미이다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 역시 상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이 틀림없고, 유목 흔적 초기 제를 지내는 것 역시 잔인했을 것이고, 상나라 땐 왕이 죽으면 산 사람을 함께 묻는 순장했었고, 나중에 주나라로 바뀌면서, 사람 대신 흙으로 만든 인형으로 대신했습니다.

상商나라 은허 유적지 관련 기사 내용을 보면, "은(상)은 갑골에 하늘신과 조상신, 자연의 신령에게 왕실과 나라의 길흉을 점친 것으로 유명하다. 군대, 형벌, 전쟁, 공납, 농업, 수공업, 상업, 축목, 기상, 건축, 질병, 생육, 길흉 등 국가의 대사는 물론 소소한 일상까지 일일이 점을 친 뒤 그것을 버리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답사 내내 경탄에 마지 않은 것은 은(상)의 청동기와 옥기 제작 기술이었다. 은허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5000점이 넘는데, 사모술(司母戌)이란 명문이 있는 청동방정(鼎·사각형 모양의 솥)은 무게가 832.75㎏에 이르렀다. 옥기는 2600여건이 확인됐는데, 중국 동북방 차하이-싱룽와에서 발원한 옥기문화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은(상)은 동이족의 일파라는 점이다. 고고학자 푸쓰녠(부사년)은 “은(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망한 뒤에 동북으로 돌아갔다”고 단정했다. 이번에 발굴된 원북상성의 경우 중심축이 동북으로 13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이는 전형적인 상나라 도성의 방향인데, “고향(발해연안)에 대한 짙은 향수를 나타낸 것(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이라 해석되고 있다.

이형구 교수는 “고구려·백제의 선조인 부여 역시 점을 치고, 술과 노래를 좋아하며, 백색을 숭상하는 등 은(상)의 풍습을 빼닮았다”면서 “하늘로부터 왕권을 받았다는 뜻인 역법(曆法)마저 은의 역법을 썼다”고 말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0811031740465#csidx7dfcf2830fbff8ea67e8e47088bea89

단군조선 요하문명을 중심으로 상나라가 중국을 통치 옥기 유물과 갑골문자를 증거로 남겼고, 주나라에 망하면서, 상나라 왕족 기자는 5천 유민을 이끌고 요하로 복귀 기자 조선을 세웠습니다. 단군조선이 중국까지 확장했다, 원래대로 축소된 것이 기자조선, 주 무왕이 분봉했다면 둘째 조카 강후가 왕이 되고, 강씨조선이 순리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천년후 위만에 마지막 왕 기준이 망하면서, 청주지역 마한으로 이동 청주한씨 시조가 된 것은, 기자조선 요하문명 특징 옥기+제사 청동기, 그지역 청동기 유물은 기자 조선에서 전파 된 것이고, 철기 유물은 부여 온조 백제왕과 함께 온 것인데, 마한, 부여 모두 기자 조선이 망한 후에 발생한 나라, 유전자 O1b2 같은 계열인 이유로 생각됩니다.

아무튼 위衛만滿 조선 사람인데 연나라에서 살았을 것이란 추정은 성씨가 말도 안되는 현재 한족 계통인 주족 것이고, 당연히 위만조선은 단군조선 수도 요하지역만 점령했을뿐, 병사 1,000명으로 200년 남짓 관할 범위가 넓을 수 없는, 일제치하 보다도 더 느슨한 침략 효과, 단군조선 동북쪽 지역엔 토착호족 부여가 발생했고, 왕과 대신들은 유민을 이끌고 해로를 따라 청주로 이동했으니, 마한 많은 집단중에서 가장 큰 집단 이룰 수 있었습니다.

옛날엔 통일신라, 요즘은 발해 신라 남북국 시대죠? 부여 마한은 그런 개념이고, 봉건왕조를 중심으로 쓰는 역사에서 위만조선은 지도부가 침략 중국 역사라 생각됩니다.

"단군조선이 기원전 194년에 멸망으로 해체되면서 여러 부여족 계열의 나라가 세워졌는데 부여족이 세운 나라로 해모수(解慕漱)가 세운「북부여(北夫餘)」와 해부루와 금와(金蛙)가 세운 「동부여(東夫餘)」그리고 추모왕(주몽)이 세운 「졸본부여(卒本夫餘)」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일부 후대 기록에서는 조선시대까지는 기원전 2세기 초에 기자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을 피하여 바닷길로 달아나, 월지국(月支國)[6]에 세운 나라라는 견해가 있다. 발굴된 유적의 특징으로 볼 때에, 원주민들은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반도 서남부를 중심으로 정치집단을 이루었고,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소국연맹의 형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강康씨 상계에 따르면, 기자조선이 위만조선에 망할 때 조상 전사 기록있고, 마한이 백제 온조왕에 망할 때도 전사한 기록있습니다. 강康씨 조상들은 마한이 망한 후, 백제에서 이어진 것이 아닌, 신라에서 성골귀족으로 벼슬해오다, 김유신 고구려 정벌때 북상해서 정착, 평양주변 신천 토착호족이 됐고, 신라가 망할 땐, 태봉국 궁예 왕비 강康씨를 배출했고, 태조왕건 외가로 배경이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