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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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번의 몰년에 관해[편집]

241년에 죽은 손등의 유언 상소에 우번을 천거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현재 기사의 몰년에 따르면 손등은 무려 시체를 천거한 셈인데, 어찌 된 일일까요?--Synparaorthodox (토론) 2010년 4월 22일 (목) 02:14 (KST)[답변]

문서를 생성할 당시, 일본 위키피디아의 내용을 옮겨적었습니다... 당시에는 생몰이 저렇게 적혀있었는데, 지금 보니 "불명"으로 정정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당시에 누군가가 코에이 삼국지 등등의 기록을 보고 그대로 적고... 저는 그걸 보고 옮겨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_-;;; 정정하겠습니다. --威光 (토론) 2010년 4월 22일 (목) 13:23 (KST)[답변]

우번의 몰년을 233년에 두는 게 아예 근거가 없는 건 아닙니다. 江表傳曰:後權遣將士至遼東,於海中遭風,多所沒失,權悔之,乃令曰:「昔趙簡子稱諸君之唯唯,不如周舍之諤諤。虞翻亮直,善於盡言,國之周舍也。前使翻在此,此役不成。」促下問交州,翻若尙存者,給其人船,發遣還都;若以亡者,送喪還本郡,使兒子仕宦。會翻已終。 (강표전에 이르기를 : 나중에 손권이 병사와 선비를 보내 요동에 이르렀는데, 바다에서 바람을 만나 많이 죽었고, 손권은 이를 후회하여 영을 내렸다. “옛날 조간자가 제군들이 아첨한 것을 칭찬해도, 주사가 직언한 것만 같지 못했다. 우번은 밝고 곧으며, 진언하기를 잘 하니, 나라의 주사로다. 전에 우번을 (아악 해석불능……)” 교주에 하문하기를 재촉하여, 우번이 아직도 있다면 배와 사람을 주어 서울로 돌아오게 했으나, 만약 죽었으면 상여를 본군으로 돌려보내고 그 아들로 사관하게 했다. 마침 우번은 이미 죽었다.) 이 사건을 233년에 전예가 청주에서 요동으로 보낸 오나라 사신을 공격한 것과 일치시키면 이런 결과가 나옵니다. 하지만 예전에 말씀드렸듯이 이는 《삼국지》의 본문인 오주5자전 중 손등전과 모순되는데다, 배송지가 인용한 주석과도 모순되는 점이 있습니다. 會稽典録曰:汜字世洪,生南海,年十六,父卒,還郷里。(회계전록에서 이르기를 : 우사는 자가 세홍이며, 남해에서 태어났는데, 16세에 아버지가 죽어 본향으로 돌아왔다.) 이로 미루어 보면 우번의 유배생활은 적어도 15년 이상입니다. 그런데 233년에 죽었다면 218년에 이미 귀양갔다는 말이고, 여몽을 따라 관우를 토벌하는 게 불가능해집니다. 우번전에도 우번이 교주로 유배간 게 관우를 친 후에 서술되었습니다. 때문에 아무래도 233년 사망설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Synparaorthodox (토론) 2010년 12월 12일 (일) 00:22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