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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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소씨 족보 관련[편집]

<< 한국학중앙연구원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 - 진주소씨의 허무맹랑한 사기족보,허위주장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1] 한국학대백과사전에 소벌도리의 '소벌'은 신라의 옛 칭호인 '서라벌(徐羅伐)'을 약칭한 '서벌(徐伐)'이고, 도리는 집단의 뜻을 가진 '돌'‧'두레'의 사음(寫音)으로 짐작된다고 되어 있고 삼한 진한 6부촌장의 이름에 불과하며 박(혁거세)씨,이(알평)씨,최(소벌도리)씨,정(지백호)씨 등등은 진주 소씨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데 계속 허위주장으로 명예훼손과 무고를 하고 있습니다 [2] 소씨들은 당장 족보수정 유포중단 허위삭제해야 합니다. 1975년에 진주 소씨족보에서 발견되었다고 주장하는 허무맹랑한 주장은 신구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전혀 나오지 않는 가공인물 허위주장입니다 삼한,진한 6성(이 최 정 손 배설 )과 3왕성(박 석 김) 김해김씨를 소씨의 후손이라고 하는 정신이상적 주장은 명가명문 상기 10여성으로부터 법적으로 엄한 처벌을 받을 명예훼손 무고 범죄행위입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에서 모든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3] 1975년에 발견됐다고 주장하는 소씨족보에 나오는 내용 - ※ 요임금/기근오/기원전 2666년/소벌도리/9대9장군 등과 소경/알천/9형제 - 전부 중국신구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등 정통역사서에 한줄도 없는 허위기록입니다. 어떤 역사책에도 없는 소씨주장 가상 족보 공상소설입니다 - 고려말에 한자 소(蘇)를 인용해 생긴 씨족이 6천년전 중국 요임금,중국 소씨와는 전혀 관련근거가 없고 / 알천은 김씨이고 / 소경이라는 중시조인물은 아예 존재하지 않아 한중원자료에도 전혀 없습니다 - 삼한 신라시대 9성 이최정손배설 박석김 / 삼한 가락 김해본관 김씨등 한국민 5천만중 거의 4천만이 전부 소씨 후손이라고 허위주장 인터넷에 막가파식으로 허위유포해 왔읍니다 [4] 한국학중앙연구원 사료 확인바랍니다 [ 박혁거세 / 이알평 / 최소벌도리 / 정비백호 / 손구례마 / 설호진 / 배지타 / 박혁거세 / 석탈해 / 김알지 / 김알지 / 김수로] 와 진주소씨와는 전혀 관련이 없음이 역사기록에 광범위하게 나와 있습니다 - 진주소씨는 고려말 소희철이 시조이며 그위 상계 기록은 정통역사서에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 전라도 남원 나주에서 누대로 주요 세거지 / 집성촌으로 살아 왔는데 본관은 진주로 쓰고 있으며, 소씨들이 주장하는 역사 가운데 국가가 공인하는 문화재나 인물은 거의 확인이 안되는 허위 주장이 대부분입니다



한중원 자료 - 진주 소씨

성씨의 역사 진주소씨 족보나 씨족원류 등에 의하면 시조는 고려 말기의 소희철(蘇希哲)이다.[각주1] 소희철(蘇希哲)은 상호군(上護軍)이었으며, 소희철의 후손 소세량(蘇世良)은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이었다. 소세량의 아우 소세양(蘇世讓)도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찬성(贊成)과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문정공(文靖公) 시호를 받았다. 조선시대에 소호인(蘇好仁) 등 12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각주1] 박혁거세를 양육하여 왕으로 추대한 소벌도리를 소씨로 보는 주장도 있으나, 소벌도리의 "소"가 성씨라는 기록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없다. "소벌"은 신라의 옛 명칭인 서라벌을 약칭한 것이고 "도리"는 "집단", "두레"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벌도리" 항목 참고.)


한중원 자료 - 알천(閼川)


알천(閼川) 상세정보 자료수정내역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2C54CCC9CFFFFU9999X0 생년 ?(미상) 졸년 ?(미상) 시대 신라 활동분야 왕실 > 귀족

[상세내용] 알천(閼川)에 대하여 생졸년 미상. 신라 진덕여왕 때의 귀족.

화백회의 의장인 상대등(上大等)을 역임하였다. 가계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으나 진골귀족의 대표로 활동한 사실과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섭정왕(攝政王)으로 추대된 사실 등을 미루어볼 때, 골품은 진골이었으며, 성은 김씨(金氏)로 추측된다.

635년(선덕여왕 4)에 이찬(伊飡) 알천공은 독산성(獨山城)에 침입한 백제장군 우소(于召)의 군을 모두 쳐서 죽였으며, 647년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647년(진덕여왕 1)에는 반란으로 말미암아 죽은 비담(毘曇)의 뒤를 이어 상대등에 취임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알천이 상대등으로서 화백회의 의장일 때, 회의의 구성원은 술종(述宗)‧임종(林宗)‧호림(虎林)‧염장(廉長)‧유신(庾信) 등이었다.

진덕여왕이 재위한 지 7년 만에 죽음으로써 성골(聖骨) 신분으로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게 되자 화백회의는 의장인 알천공을 섭정왕, 곧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알천공은 자신은 늙고 덕이 없는 데 반하여 지금 덕망이 있기로는 김춘추(金春秋)만한 인물이 없으며, 그는 실로 세상을 다스릴만한 영걸이라는 이유로 김춘추를 다음 왕위계승자로 추천한 다음 물러났다.

성골에서 왕위계승자가 없을 경우에는 화백회의의 추대에 따라 의장인 상대등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알천공이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정치‧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신흥귀족세력으로서의 김춘추와 김유신의 정치적 책략을 짐작하게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政治社會史硏究(李基白, 一潮閣, 1974) 新羅史基礎硏究(井上秀雄, 東出版, 1974)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申瀅植, 韓國史論叢 2, 誠信女子師範大學, 1977)

[집필자] 김영하(金瑛河)



한중원 자료 - 최소벌도리공 (崔蘇伐都利公)


소벌도리(蘇伐都利) 상세정보 인명전거정보 자료수정내역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4C18CBC8CB3C4U9999X0 일명 소벌공(蘇伐公) 생년 ?(미상) 졸년 ?(미상) 시대 신라 본관 경주(慶州) 활동분야 기타 > 지방세력가

[상세내용] 소벌도리(蘇伐都利)에 대하여 생졸년 미상. 신라 초기의 촌장.

《삼국사기》에 의하면 소벌도리는 원시 신라를 구성한 육촌(六村) 중 고허촌의 촌장으로, 32년(유리이사금 9) 고허촌이 사량부(沙梁部)로 개편되면서 최씨(崔氏) 성을 하사받았다.(주1) 사성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32년(유리이사금 9) 기사에는 "6부를 개정하였는데 알천양산촌장(閼川楊山村長 : 及梁部) 알평(謁平)에게는 이씨(李氏)를,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沙梁部)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는 최씨(崔氏)를,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漸梁部) 구례마(俱禮馬)에게는 손씨(孫氏)를, 취산진지촌장(취山珍支村長:本彼部) 지백호(智伯虎)에게는 정씨(鄭氏)를,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漢祗部) 지타(祗陀)에게는 배씨(裵氏)를, 명활산고야촌장(明活山高耶村長:習比部) 호진(虎珍)에게는 설씨(薛氏)의 성을 내려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권1 기이편에는 소벌도리의 사량부가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최씨(崔氏)와 정씨(鄭氏)들은 정사인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 사량부에 최씨, 본피부에 정씨를 준 것으로 보고 있으며, 여기서도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다. 이로부터 소벌도리는 최씨의 시조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소벌공(蘇伐公)이라 하였다. '소벌'은 신라의 옛 칭호인 '서라벌(徐羅伐)'을 약칭한 '서벌(徐伐)'로 생각되며, 한편 도리는 집단의 뜻을 가진 '돌'‧'두레'의 사음(寫音)으로 짐작된다. 나아가 고허촌의 ‘고허’는 바로 소벌의 한역(漢譯)일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유사》의 전설적인 기사에 의하면, 처음 육촌에는 소벌도리와 그 밖에 알평(謁平: 及梁部의 시조)‧구례마(俱禮馬: 牟梁部의 시조)‧지백호(智伯虎: 本彼部의 시조)‧지타(祉沱 혹은 只他: 韓岐部의 시조)‧호진(虎珍: 習比部의 시조) 등 6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각기 육촌의 촌장이 되고, 동시에 육부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뒤 서기전 69년 3월 1일에 소벌도리 등 육촌의 우두머리들이 각기 자제들을 이끌고 알천(閼川)기슭에 모여 덕이 있는 자를 찾아서 군왕을 삼을 것과 수도를 정할 것을 의결하였다고 한다. 이에 양산(楊山: 지금의 경주 南山) 아래 나정(蘿井)곁에서 난생아(卵生兒)인 혁거세(赫居世)를 얻어 거슬한(居瑟邯, 居西干)으로 추대하고, 서기전 57년에 그를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한편, 《삼국사기》에 의하면, 나정 곁에서 혁거세를 발견한 것이 소벌공, 곧 소벌도리였다고 하며, 그는 혁거세를 집에 데리고 와서 10여세가 될 때까지 양육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전설은 씨족장들이 모여서 부족장을 선출하곤 하던 원시 신라사회의 모습을 전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따라서 소벌도리 등 이른바 촌장들은 원시 신라를 구성하던 한 유력한 씨족장일 것으로 추측된다.

매년 경주 양산재(陽山齋)에서는 삼한 6부 대부족장 6성[李崔鄭孫裵薛] 후손들이 신라를 개국한 대부족장들의 원훈(元勳)에 감은(感恩)하는 "신라대제(新羅大祭)"를 민관 합동 국가문화재로 거행하고 있다. 그리고 경주의 "소벌도리 기적비", "양산재", 혁거세를 발견한 "나정(蘿井)", 알영의 전설의 있는 "알영교(閼英橋)" 등의 소벌도리 관련 유적이 국가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주 1] 사성기록 : 《삼국사기》 신라본기 32년(유리이사금 9) 기사에는 "6부를 개정하였는데 알천양산촌장(閼川楊山村長 : 及梁部) 알평(謁平)에게는 이씨(李氏)를,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沙梁部)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는 최씨(崔氏)를,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漸梁部) 구례마(俱禮馬)에게는 손씨(孫氏)를, 취산진지촌장(취山珍支村長:本彼部) 지백호(智伯虎)에게는 정씨(鄭氏)를,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漢祗部) 지타(祗陀)에게는 배씨(裵氏)를, 명활산고야촌장(明活山高耶村長:習比部) 호진(虎珍)에게는 설씨(薛氏)의 성을 내려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권1 기이편에는 소벌도리의 사량부가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최씨(崔氏)와 정씨(鄭氏)들은 정사인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 사량부에 최씨, 본피부에 정씨를 준 것으로 보고 있으며, 여기서도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의 起源問題(李丙燾, 震檀學報 8, 1937; 韓國古代史硏究, 1976) 斯盧六村과 六村人의 出自에 대하여(丁仲煥, 歷史學報 17‧18合輯, 1962)

[집필자] 이기동(李基東)


한중원 자료 - 이알평공 (李謁平公)


알평(謁平) 상세정보 자료수정내역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2C54CD3C9FFFFU9999X0 생년 ?(미상) 졸년 ?(미상) 시대 신라 본관 경주(慶州) 활동분야 시조

[상세내용] 알평(謁平)에 대하여 생졸년 미상. 신라 초기 사로육촌(斯盧六村) 중의 하나인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시조.

하늘에서 강림하여 표암봉(瓢浨峰)에 내려왔다고 한다.

사로국에는 6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급량부(及梁部)‧사량부(沙梁部)‧점량부(漸梁部)‧본피부(本彼部)‧한기부(漢岐部)‧습비부(習比部)이다. 이 중 알천양산촌에 해당하는 것은 급량부로 신라의 국가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부락이다.

급량부의 성(姓)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한데 이병도(李丙燾)‧이기백(李基白)은 박씨(朴氏), 천관우(千寬宇)는 김씨로 비정하고 있다.

6부(部)에 이(李)‧정(鄭)‧손(孫)‧최(崔)‧배(裵)‧설(薛)이라는 성의 비정은 중국식 성을 후세에 붙인 것으로, 알평이 경주이씨의 시조라는 것은 후세에 붙인 것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東史綱目 新羅의 起源問題(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韓國史新論(李基白, 一潮閣, 1976) 新羅 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 上(金哲埈, 歷史學報 1, 1952) 三韓의 國家形成(千寬宇, 韓國學報 2, 1976)

[집필자] 김혜완(金惠婉)


한중원 자료 - 정지백호공(鄭智伯虎公)


지백호(智伯虎) 상세정보 자료수정내역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9C0BC31D638U9999X0 생년 ?(미상) 졸년 ?(미상) 시대 신라 본관 경주(慶州) 활동분야 기타 > 지방세력가

[상세내용] 지백호(智伯虎)에 대하여 생졸년 미상. 신라 건국기 사로육촌(斯盧六村) 가운데 하나인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의 촌장(村長). 정씨(鄭氏)의 시조라고 한다.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며, 서기전 69년 3월 초하루에 다른 다섯 촌장과 함께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임금을 세울 것을 논의하다가, 이때 하늘에서 내려오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맞이하여 뒤에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2년(유리이사금 9) 봄에 사로육촌의 이름을 고치고 촌장들에게 성씨를 하사할 때, 본피부(本彼部) 정씨를 하사받아 정씨의 시조가 되었다.(주1) 사성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32년(유리이사금 9) 기사에는 "6부를 개정하였는데 알천양산촌장(閼川楊山村長 : 及梁部) 알평(謁平)에게는 이씨(李氏)를,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沙梁部)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는 최씨(崔氏)를,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漸梁部) 구례마(俱禮馬)에게는 손씨(孫氏)를, 취산진지촌장(취山珍支村長:本彼部) 지백호(智伯虎)에게는 정씨(鄭氏)를,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漢祗部) 지타(祗陀)에게는 배씨(裵氏)를, 명활산고야촌장(明活山高耶村長:習比部) 호진(虎珍)에게는 설씨(薛氏)의 성을 내려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권1 기이편에는 지백호(智伯虎)의 본피부(本彼部)가 최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최씨(崔氏)와 정씨(鄭氏)들은 정사인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 사량부에 최씨, 본피부에 정씨를 준 것으로 보고 있으며, 여기서도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다. 매년 경주 양산재(陽山齋)에서는 삼한 6부 대부족장 6성[李崔鄭孫裵薛] 후손들이 신라를 개국한 대부족장들의 원훈(元勳)에 감은(感恩)하는 "신라대제(新羅大祭)"를 민관 합동 국가문화제로 거행하고 있다.


[주 1] 사성기록 : 《삼국사기》 신라본기 32년(유리이사금 9) 기사에는 "6부를 개정하였는데 알천양산촌장(閼川楊山村長 : 及梁部) 알평(謁平)에게는 이씨(李氏)를,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沙梁部)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는 최씨(崔氏)를,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漸梁部) 구례마(俱禮馬)에게는 손씨(孫氏)를, 취산진지촌장(취山珍支村長:本彼部) 지백호(智伯虎)에게는 정씨(鄭氏)를,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漢祗部) 지타(祗陀)에게는 배씨(裵氏)를, 명활산고야촌장(明活山高耶村長:習比部) 호진(虎珍)에게는 설씨(薛氏)의 성을 내려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권1 기이편에는 지백호(智伯虎)의 본피부(本彼部)가 최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최씨(崔氏)와 정씨(鄭氏)들은 정사인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 사량부에 최씨, 본피부에 정씨를 준 것으로 보고 있으며, 여기서도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집필자] 정중환(丁仲煥)

생몰연대[편집]

알천공의 생몰연대 표기가 잘못되었기에 바로잡아주시길 바라며 올립니다. 577년 진지왕 2년 5월 6일에 태어나 686년 신문왕 6년 10월 12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는 진주소씨대동보와 씨족문헌에 기록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일반적으로 족보는 문헌 사료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adidas (토론) 2009년 9월 20일 (일) 20:35 (KST)[답변]
알천의 조상인 소벌도리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등장한 신라의 개국공신이었습니다. 너무 날조 쪽으로 단정짓는 건 아닌가요? -- Doint (토론) 2011년 11월 18일 (금) 20:45 (KST)[답변]
죄다 거짓은 아닐 수 있으나, 사실이라고 볼 근거도 미약합니다. 다른 사료와 교차 검증되지 않는 내용은 일반적으로 사실로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adidas (토론) 2011년 11월 20일 (일) 00:54 (KST)[답변]
따라서 사료와 족보의 내용은 구별되어 서술되어야 마땅합니다. 화랑세기 역시 원본이 아닌 '필사본'인 관계로 나눠서 서술하는 것이 백과사전적으로 옳습니다. 현재 내용이 다 뒤섞여 있어서 사실과 주장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adidas (토론) 2011년 11월 20일 (일) 00:58 (KST)[답변]

알천의 성씨 문제[편집]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역사적 기록들을 통해서 볼 때, 알천은 신라 왕실의 일원이며 진골 귀족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씨는 김씨이며, 김알지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진주 소씨의 족보에서는 알천을 소씨의 조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알천이 신라 왕실의 일원이 아닌 소씨의 일원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족보에서만 이루어지는 주장일 뿐 사실은 아니므로 족보 틀을 부착하고 사실을 중심으로 서술한 뒤 족보의 주장을 병기하였습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10월 20일 (화) 16:24 (KST)[답변]

예전에는 아예 '소경'이라는 이름으로 생성되었던 문서입니다. 소경=알천이라는 사실도 선덕여왕 드라마 전에는 잘 몰랐었는데, 어찌되었든 지금에라도 올바르게 바로잡았으니 다행입니다. adidas (토론) 2009년 10월 20일 (화) 17:54 (KST)[답변]


진골 귀족은 모두 김씨였나요? 진골과 성골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씀하신 분이 있습니다.

진골과 성골의 차이나 구분은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고 여러가지 가설만 존재한다. 1.진흥왕의 직계(성골) 및 방계(진골)를 구별하기 위한 표현이다. 2.성골은 왕족 내부의 혼인[1]으로 태어난 집단이고, 진골은 왕족과 다른 귀족의 혼인[2]으로 태어난 집단이다. 3.같은 왕족이면서도 성골과 진골로 구별되는 것은 모계(母系)에 의한 것인 듯하다. 4.정치적인 면에서 구분하여 왕실 직계의 왕위 계승자 및 왕위 계승을 보유할 수 있는 제한된 근친자를 포함하여 성골이라 칭하고, 그 외 왕위 계승에서 소외된 왕족을 진골이라 하였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Billycrane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현재 문서에는 김씨라는 표현은 없어졌네요 adidas (토론) 2013년 3월 26일 (화) 15:43 (KST)[답변]

문서 정리[편집]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내용을 토대로 확실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아울러 생몰년에 대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알천 열전이 없음) 생몰년은 미상으로 바꾸었습니다. adidas (토론) 2009년 11월 25일 (수) 01:19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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