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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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4일 - 1951년 1월 5일)또는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독립신문 발행과 독립협회 건설


서재필이 미국에서 지내고 있던 10년 동안 조선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조선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은 청일전쟁(1894)이다. 동학농민봉기를 두고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 일본이 승리하게 되자, 청나라에 기대고 있던 명성황후 일족이 실권하고, 일본의 지지를 받는 개혁 내각이 들어서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에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에 맞서다 피살 당하였고, 고종은 이른바 ‘아관파천’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조선에 도착한 서재필에게 개혁 내각은 관료로 입각을 제의하였으나 서재필은 이를 거절하고 신문발행 작업에 착수하였다. 갑신정변 실패가 민중의 동의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을 바로 세우기 위한 근본적인 개혁은 바로 민중의 정치의식을 일깨우는 교육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재필은 1896년 4월 7일 신문 창간호를 발행하는데, 이 신문이 바로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 (The Independent)’이다. 엄밀히 말하면, 독립신문이 조선에서 발행된 최초의 한글 신문은 아니다. 이전에 일본인들이 한글과 일본어로 발행하던 ‘한성신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재필이 독립신문 발행 계획을 추진하고 있을 때, 일본인들은 독립신문이 한성신보에 대적하여 조선의 독립과 이익을 지키는 주장을 할 것을 우려하여 서재필에게 암살 위협을 하였다.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정치적 중립을 천명하고, 조선 인민이 남녀, 상하, 귀천의 구별을 떠나 조선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알게 됨으로써 조선인의 지혜가 진보할 것이라 선언하였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논설을 통해 교육, 민주주의, 산업개발의 중요성과 여성평등, 악습폐지, 공중보건 개선을 설파하고, 조선에서 이권다툼을 벌이던 외세와 탐관오리들의 부정축재를 비판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서재필은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나아가 목요일마다 세계사, 정치학, 세계지리 등을 강의 하고, 배재학당 내 학생 토론회 조직인 ‘협성회’를 지도하였다.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 중에는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등이 있다. 이승만은 처음에는 영어를 배우려는 목적으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였으나, 서재필로부터 영어보다 훨씬 중요한 정치적 자유의 사상을 배우게 되었다고 회고하였고, 신흥우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처음 가르쳐 준 사람이 서재필이라고 말하였다. 주시경은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독립신문사에 취직하여 한글 조판을 담당하면서, 나중에 그가 만든 ‘조선어 문법’의 토대를 쌓았다. 서재필은 조선의 독립 의지를 공표하기 위해 ‘독립문’을 세우고 그 옆에 독립공원을 조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1897년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델로 독립문이 세워지게 되었는데, 독립문은 바로 중국에서 온 사신들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독립문 뒤 쪽으로는 독립관이 들어섰는데, 독립관 자리에는 중국을 사모한다는 뜻을 가진 ‘모화관(慕華館)’이 있었다. 그러나 서재필이 말하는 독립은 ‘다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구주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업들을 추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단체가 ‘독립협회’다. 초기 독립협회에는 안경수, 이완용, 이상재 등이 중심 인물로 참여하여 독립문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고, 나중에는 대중 토론회도 개최하였다. 토론회는 서양의 의회 민주주의를 모델로 행해졌는데, 어떤 주제를 두고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좌우 양편으로 갈라 연설을 한 후, 토론의 승부는 방청객의 박수 소리 크기로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독립협회 토론회가 많은 호응을 불러일으키자, 서재필은 토론회를 한 단계 발전시켜 1898년 2월부터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만민공동회는 독립관에서 열렸던 토론회와 달리 서울 종로 한 복판에서 열려 일반 대중이 대규모로 참여할 수 있게 하였으며, 토론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적인 정치적 요구를 하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대중 집회였다. 당시, 만민공동회는 러시아, 일본, 프랑스 등의 이권 침탈을 저지하는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가 절영도를 대여하여 쓰겠다는 요구를 좌절시킨 것이다. 만민공동회가 이렇게 성공하자, 그 범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는데, 서울에 와서 만민공동회를 보고 감명을 받아 평안도 만공공동회 지부장을 맡아 활약한 인물이 도산 안창호이다. 서재필과 안창호는 그 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우의를 계속 이어나갔다. 이렇게 서재필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자,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한 조선의 보수파들이 앞장서서 서재필 추방 공작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고종에게 서재필 추방 압력을 가하였고, 루즈벨트 대통령을 통해 서재필을 소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도 역시 미국 정부에 서재필 추방을 요청하였다. 미국의 알렌 공사도 서양열강의 이권침탈에 반대하는 서재필을 멀리하고 있었고 서재필의 추방에 협조적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서재필은 1898년 5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 서재필은 미국에서 날아온 전보 한 통을 받는데, 발신인은 미국인 장모의 이름으로 되어있었고 내용은 자신이 위독하니 죽기전에 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서재필은 미국에 돌아와서 장모를 찾아가 만났는데, 그런 전보를 장모가 보낸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추적한 끝에, 러시아 측이 미국인 한 명을 매수하여 전보를 조작한 사실을 밝혀낸다.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서재필은 미국에 돌아와서 군의관으로 미국-스페인 전쟁에 잠시 참전한 후,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몇 년간 연구원 생활을 하였다. 1905년부터는 고등학교 동창생과 동업으로 출판 및 인쇄 사업을 시작하여, 70명의 직원을 둔 사업체의 사장으로 성공하였다. 서재필은 이 무렵 조지메이슨 및 전미안보동맹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필라델피아 시장을 비롯한 많은 정치인, 종교인, 언론인들과 교분을 쌓고 있었다. 서재필이 사업을 시작한 1905년은 조선이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맺어 외교권과 군사권을 일본에 넘긴해이기도 하다. 을사조약 체결 직후 이승만과 윤병구가 서재필에게 찾아와 조선 독립을 보장해달라는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겠다고 하자, 서재필은 이들과 함께 청원서를 완성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였다. 서재필의 회고에 따르면, 서재필은 젊은 청년들이 조국을 구하겠다고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자신이 뿌린 독립의 씨앗이 열매를 맺고 있다는 감동을 받았으며, 조국을 위해 장차 무슨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제적 능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사업을 시작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한국에서 삼일운동이 일어난 1919년 부터이다. 삼일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이승만, 정한경과 더불어 필라델피아에 한인들을 소집하여 ‘한인자유대회(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하였다. 리틀극장(Little Theatre 현재는 Plays and Players Theatre)에서 4월 13일에서 15일까지 사흘동안 열린 이 대회에는 140 여명의 한인들을 비롯해서, 서재필이 초대한 여러 명의 미국인들이 참석하였다. 그 중에는 매일 대회 시작 직전 기도를 한 톰킨스(Floyd Tomkins) 목사, 제임스 딘(James Dean) 빌라노바 대학 총장, 버코위츠(Henry Berkowitz) 유태교 랍비 등이 있다. 서재필과 친구처럼 지내던 스미드 필라델피아 시장은 리틀극장을 주선해주었으며, 자유대회 직후 한인들이 비를 맞으며 필라델피아 시내를 행진할 때 시악대를 보내 격려해주었다. 이 대회에서는 한국이 독립을 달성한 뒤에는 공화정 (republic)을 수립할 것을 결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결의문과 미국민 및 미국 정부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하였다. 대회 명칭은 ‘한인’ 대회라고 하였지만, 실제 대회의 성격은 미국에서 한국문제를 여론화시키기 위한 대외선전의 성격이 강하였다. 특히, 서재필은 한국을 도와줄 수 있는 미국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라고 믿었고, 미국 기독교 인사들에게 삼일운동에 대해 설명하면서, 한국인의 90%가 기독교인이고 삼일운동은 일제의 기독교 탄압에 맞서 종교의 자유를 찾기 위해 발생한 것이라고 과장을 섞어 설득하였다. 서재필의 이러한 노력은 ‘한국 친우 동맹(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이라는 조직의 결성으로 결실을 맺었다. 톰킨스 목사를 회장으로 1919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결성된 이 조직은, 이 후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보스턴, 워싱턴 같은 대도시를 비롯하여 오하이오, 미주리, 오레곤, 미시건 주의 중소도시에도 세워지기 시작하여 미국내 21개 도시에 최소 3,000명 많게는 10,000명에 이르는 회원을 가진 조직으로 발전하였으며, 나중에는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서도 각각 하나씩 지부가 세워졌다. 친우동맹에서는 한국독립을 지지하는 강연회를 개최하고 국무장관이나 상원의원 같은 영향력있는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독립을 지지하는 일들을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서재필은 필라델피아 자신의 사무실에 ‘한국홍보국(Korean Information Bureau)’을 설립하고, 매월 2000부가 넘는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발행하여 정부기관, 대학, 교회 등지에 배포하였는데, 한국평론에도 여러 명의 미국인들이 필자로 참여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선전하였다. 한편, 1921년 서재필은 당시 대통령 당선자인 하딩(Warren Harding) 및 국무장관 내정자 휴즈(Charles E. Hughes)와 직접 면담을 통해, 워싱턴에서 열릴 군축회담에서 한국 문제를 정식 의제로 다루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승만, 정한경과 함께 군축회의 대표로 파견되어, ‘한국인의 호소’ (Korea’s Apeal)라는 문건을 제출하였는데, 워싱턴 회의에서는 일본의 방해로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대신 미국 상원에서 공식 문서로 채택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워싱턴 군축회의가 끝날 즈음, 서재필은 심각한 재정적 곤란을 겪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각지로 뛰어다니면서 자신이 운영하는 사업체를 돌볼 겨를도 없었고, 개인 재산도 독립운동을 위해 많이 지출했다. 무엇보다도 독립운동을 하면서 자금이 부족하자, 모금운동을 통해 갚을 생각으로 은행에서 돈을 대출받았는데, 모금운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서재필 개인이 모든 채무를 지게 된 것이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서재필은 자신이 지출한 사재가 당시 돈으로 70,000 달러가 넘는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사업이 심각한 곤란을 겪자 서재필은 1922년부터 사업체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1924년 결국 파산 신청을 하게 되었다. 필라델피아 시내에 있던 집도 저당잡힐 위기에 처하자 집이나마 건지기 위해 부인과 법적인 이혼을 했다는 설도 있다. 서재필은 1925년 필라델피아 인근의 소도시 미디어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미디어에 소재하고 있는 이 집이 현재의 서재필 기념관(Philip Jaisohn Memorial House)이다. 서재필은 1925년 1년동안 유일한과 동업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도하였으나 이 사업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유일한은 서재필과 하던 미국 내 사업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유한양행을 설립했는데, 유일한이 떠날 때 서재필은 ‘버드나무처럼 비바람에 굳건이 버티라’는 의미로 딸을 시켜서 목곽판에 버드나무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 후 유일한은 이 버드나무 그림을 유한양행의 로고로 사용하였다.


의사 생활의 재개

생계 유지가 곤란에 처한 서재필은 1926년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특별학생으로 입학하여 오랫동안 손에서 놓고 있었던 의업을 재개하였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집을 담보로 2,000달러의 빚을 얻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벌써 62세 였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서재필은 당장 개업할 돈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큰 병원에서 근무하기 위해 병리학을 전공하였다.  병리학자로서 서재필은 영국왕립의학저널을 비롯한 여러 저널에 연구 논문 5~6편을 발표하였다. 개업을 향한 꿈을 갖고 몇 년동안 꾸준히 번 돈을 증권 시장에 투자하였지만, 1929년 대공황이 몰아닥치면서 증권에 투자했던 돈을 모두 잃고 말았다. 그리고 1934년에는 과로로 폐결핵 진단을 받아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외롭게 지내야만 했다. 1936년에야 비로소 개인 사무실을 개업했는데, 이 때 나이가 72세였다. 50년 가까이 서재필과 파란만장한 인생을 같이 했던 부인은 1941년 먼저 곁을 떠났다. 이렇게 생계의 곤란을 겪고 의업에 매진하면서도 서재필은 결코 한국을 잊지 않았다. 1926년 하와이 범태평양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부각시킨 것을 비롯하여, 꾸준히 신문, 잡지에 글을 기고하였고, 많은 독립운동 지사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부인은 서재필이 이제 한국 문제를 잊고 생계에만 신경쓰기를 바랬지만,  자신의 사무실에 찾아온 한국 손님들을 부인 모르게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1941년 미국-일본 간에 태평양 전쟁이 나자 서재필은 징병검사관으로 3년 남짓 자원 봉사하였다. 미국-일본 간의 전쟁에서 미국의 승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미국이 일본을 이기면 그것이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바램이 있었다. 미국 의회는 1945년 서재필의 공로에 훈장을 수여하였다.


마지막으로 고국에서 보낸 날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에 패망하면서 한국은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만들어 남북을 갈라놓고 있었다.  남한에는 미군정이 들어와 통치를 하고 있었고, 군정책임자는 하지(John Hodge) 중장이었다. 남한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과 같은 해외 독립지도자와 여운형, 박헌영 등의 국내파가 엉켜 혼란스런 시국이 계속되었다. 특히,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 문제를 두고 격렬한 갈등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당시 미군정은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 논의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고, 이승만은 이에 반대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으로 맞서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한 시국을 수습할 목적으로 과도입법의회 의장을 맡고 있던 김규식은 서재필의 귀환을 추천하였고, 하지 장군이 이를 받아들이자, 서재필은 1947년 7월 1일 미군정 최고고문 자격으로 50년만에 고국에 돌아가게 된다. 처음에 초청을 받고 서재필은 ‘나는 지위도 원치않고 명예도 바라지 않는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국민 교육에 있다’는 말로 그의 뜻을 밝혔다. 고국에 돌아온 서재필은 미소공동위원회에 미국측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한국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서재필의 귀국을 원치 않았던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미 한인자유대회 시절부터 서재필과 이승만 사이에는 조금씩 감정의 골이 생기고 있었는데, 이승만은 서재필이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중 1948년 초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백인제, 최능진을 중심으로 서재필 박사 대통령 추대운동이 일어났다. 젊은 시절의 김대중 대통령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서재필에게 미국 국적을 버리고 영도자로 조국에 헌신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84세 노령의 서재필에게 이 요구는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서재필은 정치에 뜻이 없었고, 무엇보다 정국이 우선 안정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서재필은 미국 시민으로 남겠다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으로 초대 정부가 세워지자 철수하는 미군정을 따라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서재필은 국민들이 원해서 자신의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 뜻을 따르겠다고 여운을 남겼지만, 실현되지 못하였다. 1949년 삼일절 날 서재필은 기념사를 녹음해서 한국으로 보냈는데, 여기서 서재필은 남북이 조속히 통일되어야 비로소 완전한 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의 마지막 염원은 정반대의 현실로 나타났다. 1950년 6월 남북간의 전쟁이 터지자, 서재필은 큰 충격을 받았고, 1951년 1월 5일 필라델피아 부근 노리스타운의 한 병원에서 87세의 생을 마감했다.

서재필이 입헌군주제 개혁을 추진?[편집]

서재필은 공화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것은 일본식의 권력집중적 왕정(이른바 전제군주제)이었습니다. 조선에서는 공화제나 입헌군주제로의 개혁이 힘들기 때문에 오히려 일본식으로 부국강병을 이룬 뒤에, 차후에 공화국이든 입헌군주국이든 변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가 독립협회 내부에서 했던 일도 그러한 전제군주제에 대한 지지였지, 입헌군주제로의 개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안경수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면서 독립협회의 지도층과 대립합니다. 독립협회 말기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입헌군주제 개혁 등)은 독립협회 지도층에서 주도한 사건이 아니라, 안경수를 비롯한 친일파가 주도한 사건입니다. 안경수 파벌은 홍범14조를 주장하여 고종에게 승인케 하고는 자기네는 그것을 전혀 지키지 않습니다(그러면서 황제와 고위 관료들이 홍범14조를 무시하고 민의를 왜곡한다고 주장하죠). --Knight2000 2007년 11월 21일 (수) 21:46 (KST)[답변]



서재필의 이승만 대통령 추대 및 옹호 사례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대한인총대표대회' 기간에 서재필은 이승만을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새로 탄생할 신대한 정부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하는 언동을 보여주었다. 그는 4월 15일 회의 도중에 이승만이 4월초에 '만주 접경지역에 수립된 대한공화국'의 '국무경' (Secretary of State)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공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4월 16일 오전 회의에서 그는 아래와 같이 이승만을 노골적으로 칭찬하는 발언을 하였다.



" … 이승만 박사는 놀랄만큼 훌륭한 업적을 달성한 인물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과거 29년간의 역사를 통해 그를 [여러분의] 지도자로 절대 신뢰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지옥의 열화같은 고난을 극복한 인물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5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분의 신뢰를 받을 만합니다."

(Dr. Syngman Rhee os a man of wonderfully high attainments, and I know that you have absolute confidence in him as your leader, who han a history of covering the last twenty years. He is a man who has gone throught hellfire and brimstone; he was five years on prison because he belived in Christ, and he is worthy of your confidence ....) (The Frist Korean Congress, p. 71)



그리고 4월 16일 오후 대회 폐회 선언을 한 다음 서재필과 참가자 일동은 필라델피아의 스미스(Thomas Smith) 시장이 제공한 기마대와 군악대의 호위하에 회의장인 '리틀 시어터'(Little Theater)를 출발, 미국의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적인 '독립[기념]관' 까지 태극기를 흔들면서 행진하였는데, 일행이 독립관에 도착하자 서재필은 이승만으로 하여금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토록 하였다. 이승만은 영어로 번역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어서 일행은 이승만의 선창에 따라 '대한공화국 만세' 와 '미국 만세' 를 3창하였다. 마지막으로 일행은 각자 독립관내에 보존된 '자유의 종'(Liberty Bell)을 오른손으로 만져보고 기념관내를 순람하였다. 이 때 서재필은 독립관 관장의 양해 하에 이승만으로 하여금 1787년 미국 헌법 선포 당시 미국 초대 대통령 G.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사용했던 의자에 앉아 기념촬영을 하도록 배려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재필을 대회 참가자들의 마음속에 이승만이 한국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임을 각인시키고 있었다.



필리델피아 대회 이후 1949년까지 서재필은 기회 있을 때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대통령' 내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을 옹호하는 글들을 집필, 발표하였다. 그 예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1) 서재필은 1920년 9월 8일자 상해 임시정부 각료들에게 보낸 공한에서 아래와 같이 이승만 '임시대통령'을 잘 받들어 모시라고 당부했다.



" … 대한인 중에는 특수한 지도자가 다수 있다. 또한 저들이 다 애국자인 줄 믿는다. 그러나 저들 중에 많은 사람은 조직적 사역의 경험이 부족하니, 이는 이 일에 생소한 연유이다. 본인이 열망하는 바는 대통령 이하 각 사람이 조직적 사역, 즉 미국에서는 팀웍[team work]이라 칭하는 것을 연구하기 바란다.



이박사께서는 많은 친구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반대자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를 복종하는 사람도 많으며, 그를 복종하지 않는 사람도 많은 것을 본인도 안다. 아마 제공 중에도 동일한 사정이 있을 줄 안다. 그를 정부의 수석으로 모시게 한 일이 양책인지 아닌지 모르겟으나, 이 일을 이미 세계에 공포하였는지라, 제들은 그를 복종치 아니하며 혹은 대통령의 명칭을 쟁론하는 이도 있겠으나 이 문제로 우리의 시간과 정력을 소비할 때가 아니다.



이미 된 일은 사실이니 우리는 마땅히 그를 옹호해야 할 것이다. 이승만으로 생각함이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생각하자. 이 동일한 의의를 제공들에게도 마땅히 응용할 것을 바란다. 제공이 제공의 직무에 자격이 상당하든지 아니하든지 우리가 제공을 대한민국의 대표자로 세계에 공포하였으니, 우리가 제공을 가불가를 막론하고 마땅히 제공을 옹호할 것이다.



우리의 전투는 일본을 대적함이요 대한인을 대적함이 아니다. 만약 제공이 사소한 사정으로 제공의 동족을 대적함에 시간과 정력을 소비할 진대 일본에게 큰 안위를 줄 것이오, 제공 중에 당파전투를 하는 것보다 일본을 더 기쁘게 사는 것이 없을 것이다 … "(『신한민보』1920. 11. 25,「서재필박사가 임시정부 각원에게 보낸 공문」)



(2) 서재필은 1922년 2월 6일 구미위원부의 임시위원장직을 사임하고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날 때 이승만 '임시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사임서를 제출하였다.



" … 이렇게 각하와의 공적 관계를 중단하면서 본인은 각하께서 그 동안 본인이 구미위원부의 [임시 위원장] 직을 맡았을 때 베풀어주신 갖가지 후의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본인은 한국 [독립]운동(the Korean cause)을 위하여 각하께서 본인의 도움이 필요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다시] 각하의 명령에 따를 것을 확실히 말씀드려 두는 바입니다." (연세대 현대한국학 연구소 소장 '이승만 문서' 에 포함된 서재필의 서한문)



이 사임서는 서재필이 '워싱턴군비축소회의' 후 이승만과 공적 유대를 단절할 때에도 이승만의 지도력에 대해 여전히 신뢰와 존경심을 갖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3) 서재필은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워싱턴D.C. 의 라파이엣 호텔(Hotel Lafayette)에서 이승만이 주최했던 '한인 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에 참석한 다음 7월 23일『신한민보』를 통해 '한국인 친구들' 에게 다음과 같은 공개서한을 공표했다.



" … 저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노련한 지도자 이승만 박사가 그동안 착실하게 운영해온 워싱턴의 구미위원부르 ㄹ밀어줄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박사가 한국인의 자유를 위해 헌신한 사실은 한국어를 말하고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단점을 꼬집어 트집잡는 [따위의] 비난은 [제발] 중지하고 한국의 자유라는 크고 고상한 목적을 위해 그분에게 가능한 한 최선의 지원을 베풀어 드리십시오. 여러분들이 그분에게 아낌없는 정신적 · 물질적 지원을 해주지 않으면 그분은 무력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한국 독립운동은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저는 올바른 생각을 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한 [무모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현재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의 전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께서 저의 생각이 어떤지를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신한민보』1942년 7월 23일, 서재필,「나의 모든 한국인 친구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4) 서재필은 1949년 이승만 전기 집필가 올리버(Robert T. Oliver)박사에게 보낸「이박사에 대한 나의 인강」(My impressions of Dr. Rhee)라는 글에서 아래와 같이 이승만이야말로 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며 한국 역사장 가장 걸출한 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 … 조국[독립]을 위한 그의 집념과 불요불굴의 헌신적 노력은 그가 한국을 위해서 한 봉사 가운데 가장 돋보인다. 작년[1948]에 대한민국 국회는 오랫동안 최악의 조건하에서 자기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그의 노고를 인정하여 그분을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정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습니다. 나는 이박사 이외에 이 영예에 더 합당한 인물을 알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그가 성공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것을 바라며 또 그는 그렇게 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봅니다. 나는 그와 그의 보좌관들이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들의 직책을 현명하게 수행하는 한 그와 그의 정부를 밀어주려고 합니다. 그 앞에 놓이 과제는 험난하고 그 과업을 실천함에 필요한 [제도와] 설비는 미비합니다. 나는 한국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이 시점에서 그와 그의 보좌관들을 가혹하게 비난하거나 근거 없이 험담하지 말고 그들에게 동정과 격려를 베풀어주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나는 이박사와 그의 보좌관들 측에서 정치적 · 경제적 현안들에 관련하여 정직하게 의견을 달리하는 인사들에 대해 좀더 관용적일 것을 바랍니다. 적어도 공적인 문제로 인한 그들과의 의견 차이가 그들과의 인간적 유대에 까지 악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훌륭하고 대범한 정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근본 원칙은 타협하지 말고 끝가지 지켜야 하겠지만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불필요하게 소외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나는 이박사가 한국 역사장 걸출한 인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난날 자기 나라를 위해 많은 고초를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제] 필생의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한 만큼 여생을 행복하게 즐기기를 바랍니다."

(His perseverance and unswerving devotion to the cause of his country is one of his most notable services to Korea. the long years of his work for his people under thr most trying circumstance war recognized and last year The National Assepmbly elected him to the presidency ofn the first democratic government of Korea. I know of no one who deserves this honor more that Dr. Rhee. I wish him the success which he richly deserves and it is my purpose to support him and his governmentslong as he and his aides do their duties within the framework fo their constitution. His task before him is a difficult and thr facilities with which to carry it on are limited. It is hoped that all lovers of Korea extend to to him more symapthy and emcouragement rather than hurling at them harsh criticisms and unfounded accusations at this time.

Also, it is hopesd that Dr. Rhee and his lieutenats will be more tolerant toward those who have honest but different opinions on political and economic questions, at least, let not the difference of opinion on public problems in terfere with their personal relationship because it is not good politics and it is not broadminded. There should bo no compromise on fundamental principle, but we should not alienate unnecessarily those who hold views different from our own.

I think Dr. Rhee is one of the outstanding figures in Koream history. He has suffered much for his country in the past, but I hope he will enjoy the remainder of his years with some measure of happiness derived from successful achievement of his life's aim.)



이상의 예문들은 서재필이 독립운동가 내지 정치가로서의 이승만에 대해 시종일관 최고의 존경심과 신뢰를 갖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Ⅴ. 맺음말



서재필은 '근대 한국 최고의 사상가요 실천가' 였다. (전봉덕.「서재필의 법사상」,『한국근대법사사상사』<서울: 박영사, 1981>, 266쪽). 그는 또한 3.1운동 후 미주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미국시민이었던 그는 1919년 4월부터 1922년 2월까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그 기간에 그는 이승만 임시대통령을 받들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해 홍보 및 외교면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워싱턴 군비축소회의' 에서의 외교가 실패한 다음 1925년 3월에 이승만 임시대통령이 상해의 임시정부에 의해 탄핵 · 면직당함으로써 - 단기적으로 볼 때 -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승만이 서재필이 표방한 외교독립노선에 따라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함으로써 그의 노력은 장기적으로 볼 때 주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발표에서는 이승만과 서재필이 3.1운동 후 3년간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실을 부각시켰다. 서재필은 1919년 4월에 필라델피아에서 개회된 '대한인총대표회의' 에서 이승만을 한민족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로 추대한 다음 1940년대까지 꾸준히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 옹호하고 있었다. 이승만에 대한 그의 이러한 태도와 평가는 해방후에도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이승만에게는 여러 가지 약점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승만을 한국인 지도자 가운데 가장 유능한 인물이며 따라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될 자격을 가장 잘 갖춘 지도자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이승만을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종래 이승만 비판자들이 주장한 이승만 '지도자 자격 미달론' 내지 '서재필의 이승만 불신론' 이 사실무근임을 보여준다.




<참고 자료> Philip Jaisohn's Memo to John J. MUccio, the first U.S. ambassador to Korea, September 1948



" .... What I wish to tell you is something about a few key men in the present Korean Government. While I do not know many of them personally, I am familiar with some of them. I have known Dr. Syngman Rhee for many years. In fact, I know him better than any other persons in his Government. I also know some members of the National Assembly and have found them to be willing to do what id right for their country. But all of them, including Dr. Rhee, have had no practical experience in government ro business, and have little education except, perhaps, Dr. Rhee who has had an Americam college educations.

Dr. Rhee is a man of some ability and of patriotism for his country, but his views are narrow and some of his ideas are impractical; this is due to lack of experience. His Cbinet is composed of men and a woman who do not seem to enjoy the confidence of the majority of the Korean people. However, I rather think the present sentiment against the Rhee Cabinet is unjust because it has not had time to demonstrate whether it is or is not capable of servinf Korea as it should.

Before I left Seoul, I advised the Korean people to give the Rhee Government a chance to show what it can do. I think a year's trial will definitely tell whether it can or cannot do the job expected of it. I am in hopes that the people will give Rhee and his Cabinet that chance and I sincerely hope they will make good for their own as well as that of Korea. I think, with your advice and Washington's friendly direction, they will be kept in the right path. However, you will have to watch their actions closely and, if you find that they do anything to deviate from the right path, you will need to give them your friendly advice; at times you may even have to be firm. this is a confidential communication, and I hope you will treat it as such,"



(Channing Liem, Philip Jaisohn, pp. 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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