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금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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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 탄금대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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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 | 1592년 음력 4월 2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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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 충청도 충주 탄금대 | ||
| 결과 | 일본군의 승리, 조선의 경군 궤멸 |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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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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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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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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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탄금대 전투(忠州彈琴臺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이 이끄는 8000명의 조선 경군(중앙군) 병력이 충주 탄금대에서 전멸한 전투. 1592년 4월 28일.
목차 |
배경 [편집]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서 부산진성에 이어 동래성마저 함락되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전사하자 조정에서는 긴급대책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저 몇십명만 이끌고 와서 재물이나 조금 약탈하고 자기네 땅으로 되돌아갔던 기존의 왜구들과는 차원이 다른 전란에 직면한 조선에서는 일단 경상도순변사 이일을 파견해보지만 상주에서 이일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났으므로 상주마저 함락되었다. 이 전에 선조는 당시 조선에서 최고의 명장 대우를 받고 있던 신립으로 하여금 왜군을 방어하는 임무를 부여함과 동시에 상방검을 하사하여 신립에게 선조 자신과 같은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 신립은 문경으로 출동하게 되었다.
전투 과정 [편집]
전투준비 [편집]
조선에서는 북방에서 여진족을 몰아낸 전력이 있는 신립을 총 지휘관에 임명하였다. 신립은 경상 전라 충청 삼도 도순변사로서 전체 방어전을 지휘해야 하는 위치다. 그리고 신립이 지휘한 경군은 각 도의 상번군, 무관, 종실, 내시위 군졸 등으로 구성된 중앙군으로써, 이는 군무와 훈련 경험이 많거나 양반가문 등에 한정하여 임명되는 인원들이다. 또한 인근 고을로부터 병력 수천명을 징집하였는데 활을 다룰줄 아는 사람에 한정하여 모집한 것으로 전하고있다. 이렇게 징집된 병력은 8천여명에 달하고 군기고와 역마장으로부터 무기와 전마를 지원받았다고 전해지나 어디에도 근접 병과를 모병했다는 기록은 나와있지 않다. 또한 그밖의 다른 지역에서도 병력을 모집하였는데, 신립이 충청도 병력을 증원받지 못한 것이 충청도관찰사 윤선각(후에 윤국형으로 개명)이 저술한 기재사초에 언급되어 있다. 신립군에 예속될 예정인 전라도군 2천 명이 북상 도중 탄금대 패전 소식을 듣고 돌아간 기록이 난중잡록에 보인다.
1592년 4월 24일 충주에 도착한 조선군은 병력을 단월역에 주둔시키고 문경새재에 올라가 작전회의를 하던중 상주에서 패전한 이일을 만나게된다. 이때 종사관 김여물이 신립에게 새재의 바위 뒤에서 궁병으로 왜군을 상대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신립은 탄금대로 내려가 배수진을 치자고 했다.
- 김여물의 논지 - 새재에 있는 바위(높은 언덕)를 방패삼아 궁병으로 공격하면 승산이 있다. (기록에 따라, 이종장, 이일도 이와 같이 주장한다.)
- 이일의 논지 - 새재를 수비하기에는 늦었으니, 한강으로 물러나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했다.
- 신립의 논지 - 기병을 이용한 전술을 이용하면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으며 따라서 충주의 넓은 평야로 적을 끌여들여야 한다. (신립의 아들 신경진은 아버지가 탄금대를 선택한 이유를 전투당시 아군의 낮은 사기와 산악지형의 불리함 때문이었다고 기록했다.)
결국 지휘관인 신립의 의견에 따라 탄금대에서 기병으로 배수진을 치게 되었고 이때 김여물은 이미 조선군의 패배를 예상했다.
한편 경상도를 모두 점령하고 상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제1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4월 28일 새벽에 상주를 떠나 정오 무렵 충주에 진입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27일 밤에 최초로 일본군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와같은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아무런 사전 준비없이 전투에 임할 수는 없으므로 척후대나 선봉대의 움직임이었다고 보여진다.
- 중앙군 - 단월역에서 산길을 따라 우회하여 방비가 허술한 충주성을 공격하여 장악하였다.
- 좌군 - 단월역에서 달천을 따라 충주의 평야 지역으로 진입하였다.
- 우군 - 산을 넘어 동쪽 깊숙히 침투하여 충주의 우회로에 매복하였다.
일본군은 작전지시에 따라 조선군이 주둔한 탄금대를 중심으로 좌우를 포위하고 충주성을 점령하였는데, 민가에 불이 나고 포성이 울려퍼질때까지 조선군은 일본군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강을 등지고 있던 조선군은 작전 요충지를 모두 일본군에 내어주므로써 전세는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제기되는 의혹 [편집]
탄금대 전투가 벌여졌던 음력 4월 28일을 양력으로 계산하면 6월 초인 장마철이었으며 또한 이날 탄금대에는 기병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소나기가 쏟아졌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정만록에 따르면 실제 장마철은 탄금대 전투가 끝난지 열흘 뒤인 5월 8일 이후였으며, 이로부터 약 한달여간 연달아 큰 비가 내린 것으로 기록되었다. 탄금대 전투가 벌여졌던 4월 24일 부터 4월 28일 까지의 기록 중에서 비가 왔다고 쓰여진 기록이 없으며, 전투 당일에는 적군의 무기(창,칼)가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였다거나 먼지가 많이 일어나는 등 날씨가 쾌청하고 무더웠음이 기록되어있다. 또한 일본군 측 기록인 서정일기에서 조차도 전투 당시의 날씨가 맑다고 기록되어 있는 만큼 실제 비가 내려서 불리했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조총을 대량 운용한 일본군에 대한 대처법을 조선군이 제대로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으나 16세기말에 사용하던 화약무기는 기마병을 제압하기에 유리한 수준이 아니었으며, 또한 일본군의 편제에서 운용되던 화포무기의 숫자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이 또한 신빙성이 떨어진다.
전투내용 [편집]
조선의 여러 기록에서는 패전 원인을 잘못된 전장의 선택과 정찰, 경계의 실패로 인한 적군으로부터의 기습공격 허용으로 보고 있다. 신립이 적침을 발견한 아군의 척후 보고를 거짓으로 간주하였으며, 충주성을 나와 탄금대에 주둔한 사이에 적군이 성을 함락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적군이 충주성을 침입한 이후에야 신립이 주성(州成)으로 말을 달려나갔으며, 성중에서 적군이 호각 소리를 세번 울리자 신호에 맞춰 복병이 사면을 포위했다고 기록하였다.[1] 또한 전투를 직접 목격했다고 하는 신흠은 상촌집에서 적군이 몰래 충주성에 침입하고 민가에 불을 지를때까지 신립이 적침을 감지하지 못했으며, 아군이 말을 달려 나간 지점에 마을의(민가,도로 등) 사이가 비좁고 논이 많아서 말을 달리기 불편했다고 기록했다.[2] 그 밖에 난중잡록 등 여러 기록에서 적군이 충주성을 침략한 사실을 기록하였으며, 이후 아군이 좌우 방향 혹은 후방에서 포위당한 사실을 기록했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하여 실제 격전이 벌여졌던 지점은 탄금대가 아니라 충주의 도심지 인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본군의 지휘관 고니시 유키나가는 서정일기에 탄금대전투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충주에 도착한 시간과 교전이 발생한 지역의 간략한 설명이 쓰여있으며, 전투가 끝난뒤 조선인을 죽여 머리를 베었다고 전하고 있다.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는 그의 저서 【일본사(Historia de Japam)】에 임진왜란과 관련한 기록을 남겼다. 탄금대 전투와 관련하여 조선측 기록과 유사하게 쓰인 내용이 있는데, 조선의 부대를 기마병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이나 일본군이 매복 작전을 성공시킨 장면의 묘사 등은 상당히 자세하게 보인다. 그러나 루이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 나카사키와 중국 마카오를 오고 가던 상황이었으므로 실제로는 전쟁을 볼 수 없었다. 프로이스는【일본사】에서 "전투에 나갔던 병사의 말에 따르면" 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1594년 이후에 종군 신부로 활동했던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의 기행일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정보를 얻은 것 이다.
전투승패 [편집]
일본군은 조선군이 충주 외곽의 탄금대 인근에 진을 친것을 확인한 뒤에 부대를 돌려 몰래 충주성에 잠입하였다. 조선군은 뒤늦게 충주성을 수비하려 돌격을 감행하였지만 시간을 너무 지체한 이후였으며, 말을 달려나간 지점의 지형마저 도와주지 않아서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때 충주성에서 신호가 울림과 동시에 충주의 야산과 강변에 숨어있던 병력들이 쏟아져나오며 조선군을 동서방향으로 포위하여 난도질하였다. 조선군 상당수가 죽고 진형이 붕괴되어 무관들 마저도 도망쳤으며 조선군의 지휘관 신립은 다시 탄금대로 퇴각하였다.
일본군의 지휘관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투경험이 많고 전술적인 노련함이 돋보인 반면에 조선군의 지휘관 신립은 전투경험이 현저히 부족하여 지형적 불리함을 깨닫지 못하고 기병전술을 고집한 결과 탄금대에 고립되어 전멸하였다.
신립의 자결 [편집]
재조번방지나 연려실기술, 선조수정실록 등에 의하면 전투 막판에 신립이 김여물에게 "살고자 하는가?" 라고 묻자 김여물이 "내 어찌 살고자 하겠소" 라고 답하고 신립과 김여물이 함께 적병을 죽이고 둘다 강물에 뛰어들어 죽은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신립이 물에 뛰어든 지점이 탄금대의 열두대로 알려져있기도 하지만 기록에는 월탄에 이르러 뛰었다고 되어있다.
결과 및 영향 [편집]
이 전투의 영향으로 인하여 일본군은 한양까지 일사천리로 올라갔으며 선조는 어쩔 수 없이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몽진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전투에서 장사로써 살아남은 사람은 서너명에 불과하며, 조정에 패전 장계를 올린 이일은 평복으로 갈아입고 북상해 어가행렬과 만난다. 충주의 사민과 관속들은 신립의 방어군을 믿고 피난하지 않아 유독 인명피해가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같이 보기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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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전투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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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92년 |
부산진 전투: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4월 17일 ~ 4월 28일 | 상주 전투: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4월 28일 | 한강 전투: 5월 2일 | 옥포 해전: 5월 7일 | 합포 해전: 5월 7일 | 적진포 해전: 5월 8일 | 해유령 전투: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5월 18일 | 기강 전투: 5월 18일 | 사천 해전: 5월 29일 | 당포 해전: 6월 2일 | 당항포 해전: 6월 5일 | 용인 전투:6월 5일 | 무계 전투: 6월 6일 | 율포 해전: 6월 6일 | 정암진 전투: 6월 8일 | 여주 전투: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6월 15일 | 웅치 전투: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 ~ 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 ~ 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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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3년 | |
| 1594년 | |
| 1597년 | |
|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 ~ 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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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편집]
- ↑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선수 26권 25년 4월 14일 (계묘) 16번째기사 / 적병이 충주에 침입하여 신입이 전사하다 .
- ↑ 충북일보 ,신립, 과연 임란 충주전투 때 자결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