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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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볼프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1679년 1월 24일 ∼ 1754년 4월 9일)는 독일의 계몽 철학자이다. 신학을 배우고 철학·자연 과학을 수학(修學)하였다. 브로츨라프에서 출생. 예나·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수학. 데카르트, 특히 라이프니츠의 영향을 받아 그의 추천으로 할레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당시 대학 용어였던 라틴어 대신에 독일어로 강의를 하여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루터교회의 세속적 신학을 거부하여 독일에서 주창한 '금욕적 경건주의' 교파를 신봉하는 신앙적 중심지였던 왕립학교였던 할레 대학 총장으로 있던 1721년 7월12일에 볼프는 총장에서 물러나면서 "공자(孔子)의 말과 행동은 유럽인들이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얻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도덕철학과 국가철학의 보물창고입니다. 중국에서 그를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직책이 아니라 '영광'의 표현이며, 공자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받는 것과 똑같은 경배를 중국인들에게서 받고 있습니다. 중국의 옛 황제들은 정치가인 동시에 철학자였습니다. 요순과 같은 고대의 성군(聖君)은 바로 플라톤이 말한 철인(哲人)정치가들입니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다가 이 연설을 들은 차기 총장 랑에가 전직 총장의 이임연설문을 당시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국왕에게 고해바치자 은 "그가 이만큼 지독한 무신론자인줄은 몰랐다. 내 나라에 둘 수 있는 국민이 아니니, 48시간 내에 프로이센을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하여 볼프는 1723년 11월 8일 프로이센을 떠났으나 경건주의에 대한 은밀한 저항감이 볼프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 그의 철학은 시대정신의 표상이 되고 곳곳에서 초빙했다. 연설문은 판매금지되었지만 불법적으로 인쇄되어 토론장마다 많이 팔렸으며 독일 전역에서 200여건의 관련 저술이 나오고 연설문은 1726년에 정식 출판되었고 1732년에는 "아무리 마음껏 행동해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는 공자의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1736년 국왕의 지시로 볼프 재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고 "볼프철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1740년 국왕이 서거하자 볼프 마니아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이 왕위에 오른 이후 처음 한 일이 할레 대학 총장 복직이었으나 이듬해 1754년 12월6일 사망했다.[1]

볼프 학파[편집]

독일에 처음으로 학파를 형성한 사람이라고 불린다. 19세기초 칸트주의가 대두될 때까지 독일 철학계를 풍미했던 학파로서 18세기의 독일을 '공자 마니아들의 세상'으로 만든 주역이었다. 철학적으로는 독창성이 적으나, 라이프니츠의 뒤를 이어 계몽주의 철학을 체계화하였으며, 논문 용어를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옮기는 데 공적이 컸다. 그는 여러 가지 분류를 통해 사상의 형식편에서 엄밀하게 논리적·합리적으로 정비해 나가는 것을 가르친 점에 공적이 있다. 예컨대 모든 인식은 철학적·역사적·수학적 가운데 어느 하나이며, 제1의 것은 사물의 가능성을 연구하고, 제2의 것은 그것을 현실화하여 증명하며, 그리고 제3의 것은 양의 결정에 속한다고 한다. 또 이 분류와 함께, 학문을 합리적 이론학과 합리적 실천학으로 대별한 분류가 있는데, 거기에 의하면 전자에는 존재론·합리적 우주론·합리적 심리학·자연신학이, 그리고 후자에는 실천철학·자연법학·윤리학·정치학·가정(家政)학이 속한다고 되어 있다. 볼프는 각 방면에 걸쳐서 이상하리만큼 많이 저술했으며, 더욱이 형식의 정비와 합리성을 지향하는 볼프답게 독일 문장의 저작은 모두가 <…에 관한 이성적 사상>이라는 표제를 가지고 있다.

볼프 학파[편집]

볼프는 독일에서 유일하게 생겨난 학술적 파벌인 학파를 형성한 최초의 독일 철학자였는데, 그의 생존중인 1737년에는 이미 107명 정도의 볼프 학도(學徒)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충실한 제자로서는 <볼프 학파 철학의 교정(敎程)>의 저자 튀미히(1697-1728)나, <아름다운 볼프 학파>를 쓴 포르마이(1711-1797) 등의 이름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볼프의 체계 자체에는 새로운 것을 첨가할 여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일은 볼프 철학의 적요(摘要)를 쓰는 일에 시종되었는데, 그러한 가운데서 단 한 사람, 볼프에게서 등한시되어 있던 영역(미학)의 개척을 시도한 것이 바움가르텐이다.

반볼프파[편집]

볼프와 그의 학파는 엄격한 기하학적 방법에 입각한 형식주의에 의해 철학의 체계를 완성시켜 당시의 철학적 일반 교양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 학파의 무미건조한 분석이나 모든 것을 기하학적 증명으로 단정하는 독단적 태도는 거기에 반발하는 사람들을 낳게 했다. 안드레아스 뤼디거(1673-1731),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크루지브스(1715-1775), 요한 하인리히 람버르트(1728-1777)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모두 실질적인 내용을 갖는 인식이 경험을 기본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주장하여 논리만을 고집하는 볼프의 입장을 수정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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