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기토 에르고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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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기토 에르고 숨(라틴어: Cogito, ergo sum, 해석: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은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방법적 회의 끝에 도달한 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제1 원리를 말한다. 사실 데카르트는 이 명제를 프랑스어로 말했으나( "Je pense, donc je suis")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도 《신의 도시(De Civitate Dei)》에서 동일한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데카르트 철학이 상징하는 중세와의 단절을 강조하기 위하여 라틴어 표현이 훨씬 더 널리 쓰인다. 《성찰》에서 데카르트가 많이 사용한 명제이기도 하다.

개요[편집]

“cogito ergo sum”라는 표현 자체는 데카르트의 《성찰》에서는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코기토’라는 표현은 이 경구를 가리키기 위해 쓰였다. 데카르트는 그의 초기 저작에 속하는 방법서설에서 이 구 자체를 사용했는데, 후에 그는 그가 추론하려 해 왔던 내포된 의미가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왔다고 생각했고, 그에 따라 그는 “cogito ergo sum”이라는 표현을 “나는 존재한다(곧 제1의 확실한 사실)”로 바꾸었다. 내가 존재한다는 제1의 확실한 사실과 코기토라는 표현을 분리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두 번째 성찰의 시작부분에서 그는 그가 부정의 극한 지점이라고 일컫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그의 논증은 우리를 속이는 신의 존재로부터 시작한다). 데카르트는 그 부정 속에서 남아있는 것이 존재하는지를 보기 위해 그의 믿음까지도 실험(사고실험) 속에 넣어본다. 그의 존재 속 그의 믿음 속에서 그는 이것을 발견한다: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우리를 속이는 신이나 그의 근거없는 믿음을 멈추게 하기 위해 쓰인 도구인 악마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근거있는 것이다. 그가 속아넘어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세계 안에 어떠한 것도 없다고, 하늘도, 대지도, 마음도, 신체도 없다고 나를 확신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나 역시도 존재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만일 내가 나의 확실한 존재를 나에게 확신시켰다고 치자. 그래도 나를 속이는 절대 권력과 일부러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를 속이는 자는 존재한다. 그러한 경우에도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속이는 자가 나를 계속 속이고 또 그가 가능한 만큼 나를 계속 속이게 한다고 해도, 내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내가 생각한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그는 결코 도출해 낼 수가 없다. 따라서 모든 것들 철저히 고려해 봤을 때, 나는 다음 명제와 같은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나는 존재하며, 또한 나는 존재한다.” 이 명제는 반드시 참이다. 나에 의해서건, 내 마음 속의 속이는 자에 의해서 말해지건 말이다.

중요한 주석이 두 개 필요하다.

1) 여기서 그는 오직 제1 인간의 시점에서 본 “내가 소유한” 존재의 확실성을 선언했을 뿐이다. 그는 다른 마음의 존재를 증명해내지 못했다. 이는 별도로 우리 각각에 의하여 우리 자신을 위해 사유되어야 하며,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윤리학에 대해 코기토와는 별개의 논거를 추가하여 설명을 시도한다.
2) 그는 결코 그의 존재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말했을 뿐이다: “만일 그가 생각한다면” 그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만을.

데카르트는 더 상위의 지식을 쌓기 위한 기초인 코기토 즉 제1의 확실성을 앞의 인용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코기토는 그의 믿음을 다시 세우기 위한 그의 사유 대상으로 정립된 굳건한 기반으로 쓰인다.

아르키메데스는 단 하나의 굳건하고 움직일 수 없는 점을 지구 전체를 움직이기 위해 늘 요구했다; 그처럼 나 역시 하나의 위대한 것을 실현키 위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만일 내가 오직 한 가지를, 그것도 물질적이지 않은(slight) 것을 찾아내야만 한다면 그 하나의 위대한 것은 바로 확실하고 흔들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흔한 오류들[편집]

철학자가 아닌 몇몇 사람들이 코기토를 비판하기 위해 했던 시도는 다음과 같다.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는 이 명제는 이렇게 의 명제가 된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바위는 생각하지 않으나 존재한다는 예를 통해 데카르트의 명제를 반박해 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제들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논리적 오류에 불과하다. 모두스 톨렌스 즉 대우에 의한 옳은 결과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이다.

이런 오류와 이것의 빈발성은 다음과 같은 조크에서 잘 그려지고 있다.

하루는 데카르트가 바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바텐더가 다가와서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 다른 남자 좋아한 적 있소?” “그런 생각 한 적 없소.” 데카르트가 이렇게 답하자, 그는 동성애자의 논리에 의해 사라져버렸다!

코기토에 대한 비판[편집]

코기토에 대한 많은 비판이 지금까지 제기되어왔다. 맨 처음 살펴볼 것은 바로 “나는 생각한다”와 “나는 존재한다”라는 두 명제의 본성을 통한 비판이다. 이것은 삼단 논증의 제1명제와 결론명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제2명제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사고를 소유한 어떠한 것이라도 존재한다”

이 명제는 스스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부정의 방법에 의해 부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는 이러한 형태의 명제는 모두 참이기 때문이다: “F를 소유한 것은 어떠한 것이든 존재한다.”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는 비판자들은 부정의 방법이 통하지 않는 명제가 추가적으로 더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 같다. 그러나 부정의 방법 안에서 사고의 소유자는 의심할 바 없이 그 방법을 사용하는 성찰자일 수밖엔 없다. 헌데 데카르트는 이런 식으로 방어하려 들지 않는 것 같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 그는 실제로 요구된 나머지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의해서만 비판에 반응할 것이다. 그러나 코기토를 부정하는 것 역시 삼단 논법으로 이뤄진 것이다. -->

아마도 좀 더 적절한 논쟁은 데카르트가 ‘나’라고 지칭한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버나드 윌리엄 의 논문 <데카르트, 순수 학을 위한 기획>은 이 문제의 역사와 그에 대한 평가를 다루고 있다. 그 주된 목적은 게오르크 리히텐베르크에 의한 평가대로 사고하는 실재를 뒷받침하는 것이라기보단 데카르트는 다만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는 것에 있다: “어떠한 사고가 행해지고 있다.” 즉 코기토의 힘이 어떠하든지 데카르트는 거기서부터 너무 많은 것을 뽑아냈다는 것이다: 사유하는 것의 존재, 즉 “나”로 지칭되는 것을 코기토가 정당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버나드 윌리엄의 비판[편집]

윌리엄은 신중하고도 철저하게 이 주제에 대하여 사고실험을 행한다. 그는 먼저 사고하는 것의 존재를 느끼는 것은 다른 어떤 것과의 상호작용(relativising)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논증한다. 이 어떤 것은 사유하는 자, 곧 나를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윌리엄은 각각의 가능성을 모두 타진해보고, 어떠한 작업을 수행하는 주체 없이는 그는 결국 데카르트는 그의 정식을 정당화해냈다고 결론짓는다.

코기토에 대한 두 가지 논증이 모두 실패하는 동안, 다른 방안이 윌리엄에 의해 나타나게 된다. 그는 우리가 사유에 대해 말할 때나 우리가 “나는 생각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문법적으로 3인칭의 관점에서 우리를 바라보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앞의 경우에는 사유한다는 것이 목적어로서 쓰였고, 뒤의 경우에는 생각하는 자가 목적어로 취급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 자기 반성 또는 우리의 의식의 경험을 통해서도 삼인칭 사실이 실재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것을 확인하는 데 사유는 필연적으로 불충분하며, 데카르트가 인정했던 것처럼 그가 가진 의식이 홀로 존재한다는 사실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증거도 추출될 수 없다.